00231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그 후의 일에서 나는 꽤 긴 시간동안 관찰자였다.
이미 초전에서 기세를 잃고, 마법과 화살에 수없이 시달리며 – 우리 병사들은 방패가 있었지만 그들은 없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 병력의 수도 꽤나 잃었던 흑인 병사들은, 애초부터 수가 비등했던 우리 보병들을 막지 못했다. 사르임 장군은 능수능란하게, 우리 보병을 반으로 갈라, 반은 적 병력을 마법사들이나 궁수들과 연합해 밀어내었고, 나머지 반은 모루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50명의 병력이 망치가 되어 적의 반쪽 위로 내리쳐졌다. 다량학살을 할 필요도 없고, 이미 큰 추는 기울어진 뒤라, 나는 화살을 쏘지 않고 진형의 안에서 황제 폐하와 함께 대기했다. 그동안, 숙달될 대로 숙달된 기사인 린베크 아버님과 부관들은 끊임없이 마나 에지가 씌워진 검을 휘둘러 돌격을 막는 것들을 베어버리며 적 병력의 붕괴를 유도했다. 그렇게 적 병력의 절반이 말발굽과 칼과 창 앞에서 고깃덩어리가 되거나 불구가 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하자, 린베크 아버님은 지체없이 기병을 몰아 반대쪽 병력의 도주를 막았다.
그리고, 그 때, 엔데 경이 “다르임 경이 돌아옵니다!”라는 보고를 해 왔다. 우리가 적 병력을 한참이나 두들기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들이 들려오더니... 칼과 창 끝에 피를 묻힌 채 기세등등한 다르임 형님 이하 기병들이 거의 피해 없이 돌아왔다. 뭐 그 사이에 전령을 보냈다거나, 기병대가 전장을 보고 놀랐다거나, 공중에서 정찰하던 마법사가 적 기병대가 30분 거리라고 했다거나 하는 보고를 해왔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보병들이 항복한 흑인 병사들을 묶어 포로로 처리하고, 아군의 부상자들을 처리하는 동안, 엔데 경과 반토막났지만 어쨌든 아직 마법을 시전할 수 있었던 마법사들은 아까 관이 빠져나와 지반이 약해진 땅에 마법을 시전했다.
그제의 기습, 그리고 오늘의 회전에서 나는 철저하게 주역이었다.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되었던 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는 평상시의 관찰자 역할로 돌아갔다. 그런 관찰자의 입장에서... 나는, 주역일때는 보지 못했던, 다른 이들을 관찰하는데 애썼다.
그들은 마치... 기계 같았다. 마력석을 넣어주면, 마력석에서 전해지는 힘이 떨어질 때까지 저절로 돌아간다. 멈추지 않고, 당기는 부분은 당기고, 누르는 부분은 누르고, 자르는 부분은 자른다. 거기에는 아무런 감정도 개입될 필요가 없고,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숙련된 병사들이 그러했다. 마치 기계처럼, 주어진 일을 했다. 목을 벨 사람은 베고, 부상자를 돌볼 사람은 돌보고, 포로를 묶을 사람은 묶고, 정리할 사람은 정리하고. 그들은 주어진 일을 할 뿐, ‘나는 왜 여기에 있나’ ‘이들의 죽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 ‘이 부조리한 광경이 대체 왜 있는 것인가’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요안나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협상’에 대해 해 준 이야기. 자기 감정은 중요도가 가장 낮다는 말. 그런가. ‘이 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 목표라고 보면 거기에 부수되는 감정이나 그로 인한 잡생각은 뒤로 해도 되는 건가... 그런 건가? 모르겠다. 기계가 되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마법사들조차도 아무런 의문이나 잡생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서서히 흩어지는 구름이 가는 비를 뿌리고 있었다. 나는 비에 젖어 푸르륵거리는 레브를 조심스럽게 달래며, 구릉지에 가득한 핏물들이 비에 씻겨 흩어지는 것을, 자욱한 피의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감상적인 사람이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편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머리를 터트리고 불태우고 팔다리를 자르게 되는 이 지독한 부조리에 비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감 같았다.
그때 엔데 경이 먼 곳을 보며 눈을 껌뻑껌뻑하더니, 사령관님에게 말했다.
“옵니다. 10분 거리입니다. 저들이 우리의 기병 척후를 발견한 듯하다고 합니다.”
사령관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신호를 보냈다. 혹시나 저들이 소리를 듣고 먼저 반응할까봐 호각이나 고함소리는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 사령관님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어냈던 부관들이 다시금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깃발을 수 차례 휘둘렀고, 곧 모든 사람들은 하던 것을 즉각 멈추고 진영을 꾸리기 시작했다.
보병들이 중앙에 밀집해 서고, 기병대가 둘로 나뉘어 양쪽으로 섰다. 마법사대와 궁병대는 최대한 보이지 않게 보병들의 뒤에 섰다. 그리고... 아까 정찰을 위해 출발했던, 10여기의 기병이, 깃발을 나부끼며 언덕을 넘어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기사가 깃발을 X자로 흔들고 있었다.
“온다. 대기 신호를 보내라!”
깃발이 여럿 다시 휘둘러졌다. 나는 여전히 관찰자요 방관자였다. 모든 것이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급히 언덕을 넘어온 정찰조는 미리 예비된 안전한 통로로 지나왔다. 그들이 그곳을 지나는 순간,
아무런 색깔이 없는 파란색 깃발을 선두로, 갑옷을 입고 랜스를 앞으로 세워든 기병들이 하나씩, 둘씩, 그러다가 수십 수백기씩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보고서도 전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당연한 반응이다. 기병은 속도를 살려 부딪히는 쪽이 당연히 우세하니까. 설령 우리가 뭔가 준비했다 한들, 기세를 살려 힘으로 뚫고 지나가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정찰조가 저들을 화나게 해 무작정 달려오게 한 공도 컸고.
빠밤-빠밤-!
기수가 허리춤에서 나팔을 꺼내 불었다. 맑은 소리의 음이 평원 전체에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적군 기병은, 일제히, “와아아아아!” 하고 함성을 지르며,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언덕을 달려내려오기 시작했다. 언덕길을 달려내려오는 말들의 무릎 관절에는 전혀 관심없는 모습이었다. 황제를 사로잡는 건곤일척의 승부가 되느냐 마느냐 하는 시점이니까 말들 따위에 신경쓸 겨를은 없겠지.
그럴 거라면 땅에도 조금 신경썼어야지.
“어어어어어!”
선두에 선 적병의 기수가 내지른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우리 앞의 땅이 대략 20보 넒이에 10보 깊이로 푹 꺼졌다. 엔데 경과 마법사대의 필사의 공작으로, 평원에 내린 습기를 모아 얇은 얼음을 얼리고, 그 위에 흙과 풀을 덮어 가렸다. 그 아래에는, 아까 흑인 병사들이 관을 묻느라 흐물흐물해진 땅을, 엔데 경을 비롯한 고위 마법사들이 소멸(disintegrate) 마법으로 흙 자체를 없애는 방식으로 만든 거대한 공동이 생겼다.
그리고... 관성을 이기지 못한 적의 기사들은 순식간에 말째로 땅 아래로 처박히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끄아아악!”
엔데 경과 마법사대가 거의 탈진할 정도로 마법을 써서 만든 함정은 어마어마하게 넓고 깊었다. 아무리 능숙한 기수라도 뛰쳐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 후에는 예정된 파멸이 있을 뿐이었다. 관성을 도저히 이기지 못한 그들은, 하나씩, 둘씩, 이어 수십 수백씩 아래의 함정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나는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보려고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정말 생생하게 들려왔다. 말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함정 아래로 떨어지며... 먼저 떨어진 사람을 짓뭉갰다. 쿵, 쿵. 그리고 그럴 때마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살과 살이 부딪히고 뼈가 우그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시체의 구덩이 안에서 지르는 끔찍한 비명소리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를 꽉 깨물고 있었다.
“우회하라! 우회하라!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도망쳐라!”
님크 기사단이라 했던가. 황실 기사단 만큼은 아니지만 지방 기사단 중에 이름을 날리는 기사단 답게 그들도 빠르게 대응했다. 아니, 대응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렇겐 안 되지. 궁수대!”
함정이 파지는 순간부터 미리 활을 내리고 시위에 화살을 먹이며 대기하고 있던 궁수대가 일제히 일어서, 화살을 준비했다.
“쏴라!”
일제히 화살 수백발이 날아갔다. 오른쪽으로 우회할 것을 (어떻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상한 사령관님 이하 사령부는 그들이 우회하지 못하게끔 화살을 예상 경로 위에 쏟아부었다. 간신히 우회에 성공할 뻔했던 몇 기의 기사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온 화살에 맞아 뒹굴었다. 땅을 뒹군 기사들과 말은 그대로 시체의 벽을 만들었고... 아까 땅을 팔 때 불편한 휴식을 취해 마력이 충분했던 마법사들이 그 시체의 벽을 겨냥해 화염 마법을 일제히 구사했다.
그 후로는 일방적인 참사가 이어질 뿐이었다. 순식간에 기병의 절반, 아니, 2/3 이상이 구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오직 말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던, 운 좋은 일부와... 구덩이에 떨어졌지만, 이미 너무 많은 말과 사람이 떨어져 시체로 다져진 바람에 만들어진 끔찍한 경사로를 타고 올라온 극소수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우리 군이 아니었다.
“기병대! 보병대! 돌겨억!”
“와아아아아아!”
양 옆에 서 있던 기병대가 전장을 널리 우회하는 경로를 그리며 뒤에 살아남은 병력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동시에, 앞에 뛰쳐나온 극소수의 병력을 향해 보병대가 창을 앞으로 한 채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도주할 수 없게끔 좌우에 궁병대가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나는, 고작 100걸음 앞에 있던, 그 끔찍한 구덩이에서 살아나온, 기사들 중 한 명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부정할 수 없는 절망이 덧씌워지는 것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대충 회전이 끝났습니다.
여러 기습상황에도 불구하고 황제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마법사대의 피해가 좀 있는 상황입니다.
전쟁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싸움보다 그 앞뒤의 일이 더 귀찮은 일이 많죠.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무패의 기록을 보며 경이를 느끼지만, 장군께서 그 무패의 기록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탐망선을 보내고 정찰을 유지하며 부하들을 험하게 굴렸는지(...)는 사람들이 잘 모르지요. 저도 그랬었구요.
언제나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melontea 님 // 언제나 감사합니다. 쿠폰 감사합니다. 무사히 과제 시즌 돌파를 기원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그러게요 ㅎㅎ 너무 냉철하면 성장하기 힘들 것 같아서 전쟁터에서는 약간 너프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eastarea 님 // 언제나 감사합니다!
DarkBnana 님(1편) // 한 소설 안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추천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