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2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전쟁이 끝났지만 어느 누구도 쉬지 못했다. 기병대는 일부는 후방에 있던 보급대와 사제들을 호송해 오는 임무에 투입되었고, 일부는 교대해 가며 정찰 임무에 투입되었다. 마법사 부대의 손실이 심각한데다 아까 마력을 과다사용한 사람이 많아 회로 과부하를 피하기 위해서는 전원 휴식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병대는 전장을 정리하고 지난 구릉지를 내려온 곳에 숙영지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다행히, 적들이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적을 추격하는 데 병력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일부의 병력은 에아임 형의 지휘 아래 들어가...
“아아아아아악!”
숙영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심문에 들어가 있었다. 에아임 형은 “에빌로가 그립군”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제도에 꼭 에빌로 누나가 아니더라도 심문 마법을 사용가능한 사람과, 남대륙어가 가능한 사람을 지급으로 보내달라고 사령부에 요청을 넣었다.
문제는 흑인 병사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북대륙에서 쓰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 중에 누가 북대륙어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누가 지휘관이고 누가 주술사이며 누가 참모인지 등등은 알 수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생존한 흑인 병사 대략 200여명의 손을 꽁꽁 묶고, 손가락을 튕기지 못하게 손가락을 따로 묶어두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심문은 북대륙인들(이렇게 말하니 좀 이상하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에 우리를 상대로 돌격하다 급조한 함정에 빠져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님크 기사단의 생존자들에게 집중되었다.
“끄아아아악!”
너무 멀어서 가느다란 비명소리밖에 들리지 않지만, 온갖 ‘기술’들을 동원해 심문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에아임 형의 표정이 궁금했다. 형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가 아는 에아임 로그푸스라는 사람은, 적어도 나에게는 한없이 자상한 형이지만, 나는 미틱 시에서 형이 수사할 때 보여주었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위압감 넘치는 모습을. 그런 모습으로 조금의 주저도 없이 명을 내리고 있을까. 아니면 고문받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이를 꽉 악물고 있을까.
...정작 내가 그 앞에 서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데 남의 반응을 궁금해하다니 나도 참...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했다.
“...이상과 같이 진행된 전투는 오후 1시경, 신원미상의 기마대의 잔당이 항복을 선언하며 종료되었음. 기사 127명, 흑인 211명, 그 외 적의 보병과 궁병 등을 합하여 80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들에 대한 간략한 심문이 실시되고 있음. 적었냐?”
아버님이 불러주시는 속도가 너무 빨라 애를 먹었지만,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아버님의 말에 안도하며 나는 어찌저찌 불러주는 내용을 다 적었다. 내가 “다 적었습니다.”라고 답하자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내용을 부르기 시작했다. 작전의 간략한 평가 – 아버님은 자신이 세운 작전에 대해 상대의 궤계를 예상하지 않고 너무 정공법으로만 나간 무모함이 있었다고 신랄한 평가를 내렸으며, 보병대를 지휘한 사르임 장군과 마법사대를 지휘하며 스스로도 탈진 일보직전까지 마법을 사용한 엔데 경에 대해서는 후한 칭찬을 한 반면 기병대장을 맡은 둘째 아들 다르임 경에 대해서는 ‘돌격을 일찍 끊을 수도 있었는데, 본대의 상황에 대한 파악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라고 냉정히 평가했다. - 가 이어지고, 아버님은 본격적으로 받아적는 내가 민망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작전에 있어 일등의 공훈은 기리인 모스 백작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 본 사령관의 판단이자 지휘부의 중론이며, 동시에 황제 폐하의 뜻이기도 하다. 모스 백작은 그 믿을 수 없는 위력을 내는 활로, 지난 야습 작전에 이어 이번 지난 구릉지의 회전에서도 여러 차례 혼자서 전황을 좌지우지하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운 공훈은 다음과 같다.
1. 적 보병대의 2~300명을 그의 산탄 화살로 살상하여 적 보병대의 붕괴를 이끌었다.
2. 믿을 수 없는 거리의 초장거리 저격으로 적의 마법사대의 마법 시전을 막아, 아군 보병대의 피해를 미연에 방지했다.
3. 사전 작전회의에서 들은 정보를 기억하여, 적군이 흑인 병사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본대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였다.
4. 적의 지휘관을 수 회 저격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특히 아군의 마법사대가 아까 서술한 대로 적의 궤계에 휘말려 마법이 역류하여 큰 피해를 보았을 때, 그 궤계를 시전한 이들을 저격하여 더 이상의 피해가 없게끔 막아냈다.
5. 기병대가 없는 상황에서 적의 추가병력의 매복에 습격받았을 때, 약간의 시간 여유를 이용해 적 병력의 1/3을 혼자서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기한 대로 그의 전공은 압도적이라는 표현조차 빛이 바랠 정도이다. 이에 본 사령관은... 뭐하냐, 기리인?“
“아버님, 민망해서...”
“이 놈 보게. 사실을 사실대로 적는 것이 뭐가 민망하냐. 전장에서는 신궁 소리 들어도 가만히 있던 놈이.”
“그거야, 아군의 사기에 도움이 되니 그랬습니다만...”
아버님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었지. 내가 자꾸, 네가 마법사 출신이었다는 걸 잊는구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지?”
나는 웬지 뜨끔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버님은 허허, 하고 웃으며, 약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니다. 야단치는 것이 아니야. 단지, 네가 전공을 욕심내고 조금이라도 더 큰 공을 세우려는 기사들같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을 뿐이다.”
“아...”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칼밥을 먹는 놈들에게는 당연한 태도야. 이기고 또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야만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지 않겠냐. 하지만 마법사 출신들은 다르지. 군 마법사들은 약간 또 다르다고는 하지만... 기리인.”
“네, 사령관님.”
“부끄러워하지 마라. 네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결과가, 너와 가까운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해 애쓴 결과가 전공으로 돌아온 거니까 말이다. 당당히 받아들여라. 너는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지. 너는 우리 모두의 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야말로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님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아까는 그렇게도 냉정하게 백발백중의 활을 날리더니, 이렇게 민망해하는 면모도 있었나?”
그러면서 아버님은 내가 적고 있던 서류를 가져갔다.
“그리 민망하면 마무리는 내가 하도록 하지.”
“죄송합니다, 아버님...”
“죄송은 무슨. 자기 일 자기가 적는 것도 사실 꽤 민망하고 힘들 거야. 그럼 다른 걸 좀 부탁하자.”
“말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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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세 시간 동안, 숙영지 건설이 끝나고 전장 정리도 끝나고, 에아임 형이 대략적인 심문보고서를 들고 들어와 사령관님에게 보고하려다가 “어? 기리인, 니가 왜 여기 있냐?” 이런 말을 할 때까지 나는 꼼짝없이 그 자리에 앉아서, 사령관님이 대략적으로 작성해 준 편지의 개요를 제대로 된 편지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학교에서 시험 볼 때나 이렇게 앉아서 펜을 놀렸지... 아우. 손 아프다. 손을 털고는 작성이 끝난 보고서와 편지들을 아버님에게 드리자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쉬어라.”라고 말했다. 으아. 아직도 안 끝났나보다... 실제로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여러 참모들이 들락날락하며 사령관님의 결정이 필요한 사항들에 대해 말했고, 그런 사람이 한두명 왔다 갈 때마다 내가 써야 할 보고서는 한두 개가 늘어나고는 했다. 내 얼굴을 본 에아임 형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실감이 나냐? 지휘관은 서류로 싸운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심한 줄은 몰랐죠...”
“이게 별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하겠군.”
“이게 별 게 아니라고요?”
“이번 건 친정(親征) 아니냐. 황제 폐하께서 직접 보신 일이니, 황제 폐하께 보고서를 따로 드릴 필요가 없지. 그것만 해도 일이 크게 줄어드는 거다.”
나는 입을 쩍 벌렸고, 에아임 형과 아버님은 잠시 껄껄거리며 웃었다. 웃음기를 지운 에아임 형이 말했다.
“남대륙어가 가능한 능력자와, 심문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가 오면 좀 더 자세한 심문 결과가 나오겠습니다만... 우선은, 지금 체포한 사람들을 통해 융파트가의 반역은 확실히 입증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 그랬군... 그럼 이 배후에 융파트가가 있다고 봐도 무방할까?”
“그것이...”
형은 약간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다.
“수사 기사단에도 분명 융파트 영지의 정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융파트 영지에서 전해져 오는 정보는, 님크 기사단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 말고는, 전혀 특별한 게 없습니다. 아버님. 휘하의 기사단을 비롯한 대규모 병력과, 남대륙에서까지 빌려온 병력을 동원하는데, 영지가 아무런 변화가 없답니다.”
“확실히 이상하군...”
“물론 융파트 영지에 있는 우리 기사단 전원이 배신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흐음. 이건 내가 직접 결정할 사항은 아닌 것 같구나.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시게끔 진언드려야겠다.”
“내가 뭘 결정해야 한다고요?”
저 분 귀족답지 않게 이름을 부르니 나타... 아니지, 귀족이 아니지. 황족이시니까. 황제 폐하가 시종을 거느리고, 사령부 천막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 작품 후기 ============================
잠시 전장정리하며 쉬어가는 파트입니다.
다음 편에서 앞으로의 대응 방침에 대해 정하게 됩니다.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이 되어주십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물론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 되겠죠. 기리인도 원한다면 냉철을 동원해서 냉정하게 굴 수 있을 거에요. 본인이 그러면 인간성이 마모될까봐 참는 중이죠. ...사실 얘가 의지력이 강해서 어지간한 건 다 참아낼 수 있으니까...
eastarea 님 // 과찬이세요. 언제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