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4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그 날 저녁 식사는 간만에 신선한 재료로 만든 샐러드와 고기가 나왔다. 나스프 영지로부터 공급을 받는 우리 군으로서는 끊이지 않고 꼬박꼬박 제 때 따뜻한 밥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기에, 아삭한 야채나 신선한 과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내가 야채를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아삭아삭한 오이 하나에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식사 자리가 조금만 더 화기애애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
고향에 자의와는 관계없이 끌려온 파라 경은 삶기 전의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요리를 기계적으로 입으로 가져가고 있을 뿐이었다. 신분은 죄수가 아니었지만 죄수나 다름없는 신세로 지내는 그는, 고향과의 연락도 차단당하고, 작전회의에서도 배제당하고... 며칠 지나 굳어버린 빵 같은 신세였다.
이런 자리에서 누군들 화제를 쉽게 꺼낼 수 있으랴. 누구의 눈치도 볼 일이 없을 황제 폐하조차 묵묵히 고기를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나처럼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들을 관찰 반 눈치보는 것 반 하는 사람도 몇 명 보였다. 아. 싫다. 밥만이라도 좀 편한 분위기에서 먹고 싶다.
“음악이라도 있으면 좋겠군.”
사령관님의 짤막한 한 마디에 몇 명이 고개를 무의식중에 끄덕였을 정도로 식사자리는 적막했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씹고 삼키는 소리 정도.
나는 아까부터 나스프 공작님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파라 경은 사실 신세가 뻔했다. 현재의 융파트 공작은 아마 작위를 박탈당하지야 않겠지만, 체포되고, 수인(囚人)의 신분이 될 것이 뻔하다. 그리고 나면 파라 경이 새 융파트 공작이 되겠지. 아무리 황제 폐하가 국가의 구조를 바꾸니 어쩌니 해도 공작령을 한 번에 없애거나 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아마 파라 경을 공작으로 세우고, 대신 그가 말을 잘 들을 수 있게끔 조치를 취하겠지.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나스프 공작님의 마음은 어떨까? 백색 산맥에서 내려오는 마수들을 막기 위해 애써야 하는, 그리고 영지의 동쪽이 신의 황무지 지역이라 아무 것도 없어서 먹고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든 북부 대공령과는 달리, 중부의 융파트와 남부의 나스프는 늘 앙숙같은 관계였다. 제도의 정치판에서도, 각자의 영지 접경지역에서도 온갖 사소한 것들을 동원해 서로를 이기려 애쓴 관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융파트의 추락을 나스프 공작님이 결코 즐거워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번 회전을 통해 전 대륙은 거의 100년만에 황실 기사단을 비롯한 기사들의 힘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영지에 가지고 있는 사병이 아무리 많다 한들 제국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아마 융파트가 흑인 병사들을 끌어들인 이유가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내야 할 거니까) 황제의 말을 잘 들을 수 밖에 없는 후계자가 융파트 가를 물려받는다면, 그것은 나스프 가로서도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나스프 공작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라고 묻는 눈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싱거운 사람 다 보겠군, 하는 표정으로 그는 다시 자신의 식기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 표정 어디에서도 내가 기대했던 초조함이나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 대한 불안함 같은 건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가 담대해서라기보다... 그만큼 자기 통제력이 강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식사가 끝났다. 아, 징하다 징해. 사람들. 이런 게 귀족들 간의 알력이라면 나는 참 하기 싫을 것 같다. 밥 먹을 때는 좀 편하게 있고 싶은데. 황제 폐하가 시종들과 함께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가고, 각자가 각자의 천막으로 흩어지자 나는 내 천막으로 향했다.
“백작님, 식사 맛있게 하셨습니까?”
내 천막 앞에서는 저번 회전 초기에 목재로 쌓은 단상에서 나를 호위했던 기사 중 한 명인 나르시 경이 서 있었다. 내 호위를 맡으면서 웬만한 임무에서 모두 제외된 그들은(그래도 내 전공이 워낙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지라 그들 역시도 섭섭지 않게 대우받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매일 밤 내 텐트 앞에서 교대해가며 불침번을 서고는 했다. 필요없다고 제발 가라고 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그만큼 중요 인물이라나.
“네, 나르시 경은 식사 하셨어요?”
“끝나고 가서 먹어야죠. 조금 있으면 교대할 사람이 올 겁니다.”
“진중의 한가운데인데 굳이 이렇게 교범대로 보초 서지 않으셔도 될 텐데.”
나르시 경은 고개를 저으며 웃으며 말했다.
“교범대로 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교범대로 해야 나중에 뒷말이 없습니다.”
이제는 말리다 말리다 포기하게 된 나는, “네... 그럼 저 들어가 볼게요.” 라고 한 마디 남긴 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네, 편히 쉬십시오.”라는 나르시 경의 말이 천막 입구를 덮은 천 너머로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나는 어두운 텐트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막 그믐을 지나 조금씩 낫의 모양을 갖춰가는 달빛에 의지해 부싯돌을 찾아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쓸데없이 진중 한 가운데에서 초병을 선다’고 안쓰러워하던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 ‘대체 경비를 어떻게 선 거야’라고 욕하는 마음이 마구마구 일어났다.
“나한테는 식사 했는지 물어보지 않을 작정인가?”
제기랄. 식사 자리라고 무기고 뭐고 아무 것도 들고 가지 않은 내 실책이다. 무기는 저 놈이 앉은 의자쪽에 있다. 칼이고 갑옷이고 활이고 다 말이다. 게다가 상대는 나보다 크고 경험이 많을 것이다. 민첩은 내가 우위니까 내가 빠르기야 하겠지만... 젠장. 외통수로 걸렸군. 대체 어떻게 이렇게 한 걸까.
“말해도 되는 겁니까?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게 다 수를 써 두었으니 걱정하지 말게, 모스 백작.”
어쩔 수 없다. 이미 외통수로 걸렸고, 나를 죽이려면 이미 죽일 수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를 끌고 와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 더욱 냉정해야 한다. ‘시스템’, 부탁해.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고급 언변이 발동합니다.>
<극한의 위기 상황입니다. 의지력이 발동합니다.>
에?
<당신의 모든 능력에 긍정적인 가산이 이루어집니다. 의지력 101, 판정합니다... 당신의 가산 정도는 S랭크입니다. 가산이 10% 이루어집니다. 보정 중... 능력치 100을 넘을 수 없습니다. 보정 결과 냉철 100, 고급 언변 100으로 보정되었습니다.>
헐... 100이면 대륙 최고 수준이라고 했었지?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며, 거칠게 두근거리던 가슴이 약간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두 손목을 바라보았다.
“의수는 문제 없이 작동합니까? 프그단.”
회색빛 피부의, 두 손목에 금속제의 의수를 찬 그는, 순식간에 냉정을 회복한 나를 보고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끔 보면 자네는 인간 같지 않을때가 있군.”
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로 인간이 아닌 분께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각별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바빴지. 자네 덕택에 전면에 나설 수가 없게 되어서 더 바빴다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는 말 같아서 나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말을 이었다.
“전장 생활은 힘들지 않은가?”
“눈을 계속 피해다녀야 했던 프그단 당신 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대체 여기까지는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적진 한 가운데에.”
“자네는 엘프들에 대해 잘 모르는군?”
“오래전부터 사라진 분들이라서 학교에서도 잘 안 가르치거든요.”
“엘프들은 정령을 다루지.”
“정령(spirit)?”
“자연현상의 뒤에 숨어있는 존재들 말이야. 땅, 물, 바람, 불... 대부분의 것들에는 정령이 숨어있지. 그리고 엘프들만이 이 정령의 존재를 인식해서 부릴 수 있지.”
그제야 나는 학교 다닐 때 요안나 선생님에게 배웠던 내용이 생각났다.
“기억나는군요. 인간들은 배울 수도 없거니와, 인간들이 흔히 쓸 수 있는 마법보다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마 그때 배웠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점차 사장되었을 거라고 배운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마법에 비해 월등한 면도 있지. 땅의 정령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늘 여기에 오지도 못했을 거야.”
흐음, 정령이라... 이건 꼭 기억해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나에게 그는 물었다.
“먼저 말해둘 것은 오늘 자네를 해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네.”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해칠 생각이었으면 아까 불 켜기 전에 정령들을 동원해 저를 공격하셨으면 될 일일 테니까 말이죠.”
프그단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추론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추론을 이제 갓 성인이 된 자가 하다니. 역시 인간은 대단하군. 우리가 번영할 힘을 잃지 않았더라도, 자네같은 자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건 어차피 힘들었겠군...”
“갑자기 신파로 빠지지 마시고, 그럼 오늘 여기 온 건 어떤 것 때문입니까?”
============================ 작품 후기 ============================
으악. 왜 휴재기간중에는 선삭이 없다가 연재하니까 선삭이 있는 걸까요?;;
제 글을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주시는 독자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휴재 기간동안 이 말이 치고 싶어서 근질근질했습니다.)
제 일신상의 변화가 있어 당분간은 하루 한 편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혹 두 편이 써지면 바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감사합니다!
|라랄라랄라| 님 // 그게 궁극적인 목표이긴 합니다만 당분간은 어려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