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5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프그단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이번 전쟁에 많은 것을 걸었었네.”
“‘우리’요?”
“내 동족들이 융파트를 많이 도왔지.”
프그단이 이렇게 나타난 시점에 그건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자네가 떠올리는 이번 전쟁은 어땠는가?”
프그단의 말투는 상황에 맞지 않게 대단히 여상스러웠다. 그게, 그가 지금 상황에서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음. 뭐랄까. ‘좀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하자’는, 일종의 한 발 물러나는 신호 같았다.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되려나?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그 때 마차에서 자신의 두 손목을 스스로 자르고 탈출하던 프그단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손목 자리에 지금은 은빛의 의수가 달려 있었다. 마법으로 작동하는 듯, 은색의 의수는 회색인 프그단의 팔 끝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든, 평범한 대화가 당신의 뜻이라면, 일단은 같이 놀아주도록 하지.
“첫 전장이라 정신없고 힘들었다는 말을 기대하시는 건 아닌 것 같군요.”
“내가 묻고 싶은 건 저번 회전에 대해서라네.”
“저번 회전 말입니까...”
유독 역겨웠던, 한 편의 부조리극 같던 그 회전 말인가. 편이 다르다는 이유 만으로 쉽게쉽게 머리가 터져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렇게 머리를 터트리는 사람들. 그 위로 내리던 비 말인가. 하지만 프그단은 그런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겠지.
“융파트 쪽의 대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더군요.”
프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우리 동족들이 조언해 주거나 은근슬쩍 유도한 대로 작전이 짜여졌지. 그리고 그 작전대로 황제군은 움직여 주었고 말이야. 초전에 패배하여 점령하고 있던 고지를 내어준 것도, 황제군의 주전력인 기병을 따로 떼낸 것도, 매복병들을 준비해 벽을 세운 것도, 그리고 황제군의 두 번째 주전력인 마법사대를 반사의 주술을 이용해 혼란에 빠트린 것도, 그리고 – 만에 하나 매복병들이 뚫릴 경우를 대비해 황제군의 진영과 진영 사이에 추가로 솟아오르게 할 매복병들까지. 모든 것이 우리의 뜻대로 돌아갔지. 아마 특별한 변수가 없었다면 우리는 황제군을 붙들어놓는 데 성공했을 거고, 융파트의 님크 기사단의 나머지 병력이 뒤로 들이닥쳐 나머지를 박살냈겠지.”
“확실히 위험한 상황이 많았습니다.”
프그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황제는 말발굽에 휩쓸려 죽었을 거고, 융파트는 곧바로 나스프를 쳤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 제국은 온통 전란으로 휩쓸리겠지. 융파트의 병력 이동을 북대공이 가만 두고 봤을까. 그 역시 미틱 시를 비롯한 남쪽에 교두보 확보를 위해 아래로 밀고 내려올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게 너라는 하나의 변수 때문에 틀어져버렸다.”
“...네?”
하도 당황스러워서 좀 멍청하게 반문했다. 그는, 하지만 전혀 화내지 않는 어투와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도 그렇게 느꼈지만, 회색의 피부에 사람보다 좀 더 길쭉해 보이는 얼굴이라도 표정은 사람의 그것과 거의 같다고 느껴졌다. 그런 프그단은, ‘내일도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이라는 말을 하듯, 사실을 말하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너의 그 활. 상식을 뛰어넘는 위력을 지닌 그 활과, 못을 흩뿌리는 그 화살 때문에. 황제군의 야습은 성공했고, 야습한 병력을 노렸던 우리의 역습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에 붕괴되어 너의 활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저번 회전만 해도 그렇다. 너의 활 때문에, 융파트의 보병대는 생각보다 너무 빨리 무너져버렸다. 너의 활 때문에 매복병들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반사의 주술 역시 너무 빨리 끝나버렸다. 결정적으로 2차 매복병들이 깨어나기도 전에 넘어져버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
“...몇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듯 프그단은 손을 내저었다.
“나는 마나의 유동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흑인 병사들이 펼치는 걸, ‘주술’이라고 하는 모양이지요? 그것에는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손가락만 딱! 하고 튕기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더군요.”
“마나의 유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민감한 건 아닙니다. 대규모로 마법을 쓰기 위해 마나를 끌어모으는 사람이 있는 걸 안다 정도지요. 어쨌든, 마나 없이도 가능한 겁니까? 그 ‘주술’이라는 건?”
프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대륙인들에게는 우리처럼 정령을 부리는 엘프도, 마법 체계를 전해줄 드래곤도 없었지. 그래서 그들은 정령을 부리거나 자연력을 직접 다루지는 못하지만 정령이나 자연의 원소(元素)의 힘을 빌어 쓰는 방법을 깨우쳤다고 하더군. 그걸 주술이라고 하고, 주술을 사용하는 법을 깨우친 이들을 주술사라고 부르는 것 같네. 지식이나 개인의 노력보다는 혈통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양이야.”
자연의 원소의 힘이라...
“강력한 주술사는 세상을 혼자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도 하지. 하지만 그런 주술사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이야기하느라 인간 세상에 흥미가 없다던가...”
프그단은 피식 웃었다.
“또 궁금한 건 없는가?”
“그, 관 비슷한 것을 이용해 땅에서 튀어나오는 병사들을 매복병이라고 부릅니까?”
“그래. 문자 그대로의 매복(埋伏)이지. 남대륙 전쟁에서는 꽤 널리 쓰이는 주술을 이용한 전술이었던 모양이야.”
“‘이었던’이라고요? 지금은 안 쓰이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다들 쓰다 보니 익숙해졌기도 하지만, 매복병은 그 주술의 한계상 튀어나온 이후 5분은 무방비상태거든. 그리고 그 와중에 만약 넘어지기라도 하면 5분은 50분이 되어버린다던가. 실제로 남대륙에서 쓰이지 않게 된 이유가 매복병이 나타나면 일제히 달려들어 그 관을 넘어트려버리는 통에 효과가 거의 없어지게 되어서라고 하더군.”
프그단은 그렇게 말하다가, 흠칫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것이 100의 고급 언변 수치로 펼쳐지는 유도의 힘입니다.>
시스템의 자랑하는 듯한 메시지. 아니, 저 정도라면 자랑할 만 한 것 아닌가. 나에게 좋은 감정이라고는 요만큼도 남아있지 않을 프그단을 저렇게 떠벌이로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아까 저를 해치기 위해 온 건 아니라고 했죠.”
프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얼굴에 여전히 나를 원망하는 빛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담담했다.
“자네가 도박을 해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번의 회전에 너무 큰 판돈을 걸었다. 그리고, 아주 처참하게 실패해 버리고 말았지.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는커녕, 황제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왜죠?”
“왜라니?”
나는, 전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에 당신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죠. 당신 종족의 재생에 금제가 걸려 있는데, 그 금제가 뭔지 말은 못 하지만, 그 해결을 위해서는 어떤 능력을 지닌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세상이 필요하다, 고.”
“그렇지. 그리고 그 능력은...”
“몇 가지 해석이 있지만, 나처럼, 마나를 직접 만지고 마나 회로 없이도 배치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고 그때 말했죠.”
프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이런 모든 걸 꾸민 겁니까?”
프그단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하게. 나는 그의 얼굴에서 감정의 한 조각이라도 – 분노든, 슬픔이든, 혹은 즐거움이든 찾아보려 애썼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리고 그 담담함이 나를 다시금 역겹게 만들었다. 나는 치밀어오는 욕지기를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나는 그같은 오래 산 엘프가 아니라서 내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누르기가 힘들었다.
“그걸 위해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의 제국 사람이, 당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이, 고통받아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신의 천칭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프그단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트리클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해. 우리에게 천칭은 의미가 없네.”
“뭣...”
“그리고 말일세.”
그는 내 말을 끊으며, 조금 전보다는 열기띤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의 몸에서 나올 수 있는 것 중 가장 더러운 것이 똥이지. 하지만 그 똥을 모아서 퇴비를 만들면, 그것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꽃이나, 풍성한 수확을 일궈내기도 하는 법이야. 역사에 남을 수많은 인재가 전쟁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아는가? 치르낙 대왕이라는 어이없을 정도의 인재가 나타나 제국을 하나로 만든 이후, 인간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말이야.”
나는, 동의하기 싫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법사였으니까. 400년 전 드래곤 르플레스탁에게 배운 마법을 인간은 거의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우리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고통이 따를지언정,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셈이야. 우리 그레이 엘프에게도 좋고, 인간에게도 좋은 결과가 아닌가.”
나는 목젖까지 올라온 욕지기를 억누르며, 이를 꽉 깨문 채, 잇소리를 뱉었다.
“헛소리 집어치우시죠.”
============================ 작품 후기 ============================
진도나가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론 자기합리화 쩌는 미친놈의 헛소리이기도 합니다만...
슬프지만, 그런 미친놈들의 미친 짓 때문에 역사가 굴러간 적도 많으니까요...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날려주시는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잊지 않아주셔서 돌아올 용기를 내었습니다.
코멘 달아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jin-matient 님, 니코틴 님 // 그러게요. 예정된 상처였던 것 같네요. ㅠㅠ
화이트프레페 님, 체크필통 님 // 진짜 암이 암에 걸려 나아버릴 것만 같은...
박성빈 님 // 혹시 인벤에 비슷한 이야기가 올라온건가 하고 검색까지 해봤다는... 코멘트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