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36화 (236/309)

00236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헛소리라.”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나와는 생각이 다르군’ 정도의 말투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나는 게 아니고, 오히려 화가 식어버렸다. 마법을 이용해 바위나 흙 같은 무기물에 지성을 부여한 후 대화하면 저런 느낌일까.

“이해할 수 없군. 내 말의 어디가 비합리적인지 모르겠군.”

후우.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내 입장이 불리해서라기보다는, 화를 내 봐야 소용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합리적이 아니고, 합리화했을 뿐이죠. 자신이 고통을 겪을 각오가 없이 어찌 남에게 고통을 가한단 말입니까.”

“인간들은 동물들에게 마음대로 고통을 가하면서, 자신들이 고통받는 것은 싫어하는군.”

“궤변입니다. 적어도 인간은 당신들처럼, 사회 속으로 숨어들어 위장하거나, 목적한 사람 이외의 사람을 단순히 공포나 위압감을 위해 동물들을 잡지 않습니다.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의 몸을 괴상한 마법으로 터트려 수백 수천명에게 고통을 준 당신들의 행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용서하지 말게.”

“뭐...!”

그는 정말 상관없다는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천칭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 ‘천칭’과는 무관하다네.”

“어찌... 트리클은 만물의 신 아닙니까.”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뭐...?!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네.”

“그것도 금제입니까? 그거 참 편리하군요.”

그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무튼,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은 아니라네.”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에게 화를 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고, 또한 내가 화를 내면 오히려 나에게 좋을 것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 기리인 모스. 내가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겠지. 우리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말이야.”

“전쟁 중에 수많은 충돌이 일어나면서 숨겨져 있던 수많은 인간형들이 세상에 튀어나오기를 바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인간 이외의 이종족의 번영을 막는 금제를 푸는 단서는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우리는 우리를 비롯한 엘프 몇 종족의 단서 말고는 알아낸 단서가 없다. 그 단서들을 조합한 결과는 전에 말해줬었지. 기억하나.”

“‘마나의 갑옷’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엘프들 가운데는 이야기가 몇 가지로 나뉜다. 이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해석이... 바로, 자네 같은 특이한 체질의 사람을 찾는 것이라 하겠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은, 나 같은 사람이 이전에 있었습니까?”

기대하며 물었지만, 아쉽게도, 프그단은 고개를 저었다.

“천 년이 지났지만 정확히 어떤 원인으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 그리고 그런 현상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작용하는지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네. 천 년동안 기다린 우리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려고 했던 것도, 실은, 도저히 단서가 나오지 않았기에...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면 다양한 사람들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절박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지.”

어지간하면 고개를 끄덕여줄 대목이지만, 도저히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저들이 인간의 고통을 담보로 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합리화다.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 그 과정에서 온갖 위기를 겪으며 목숨이 위험한 경험마저 하는 것이, 결국은 내가 내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점을 잊지 말자. 감정을 무시해서도, 억눌러서도, 그렇다고 폭발시켜서도 안 된다. 분노를 조절하되, 차갑게, 냉정하게 분노하자. 냉철하게 분노하자.

“엘프들에게 전해지는 전승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얘기와 제가 어떻게 관련이 있는 건가요.”

프그단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내 모든 관찰력을 동원해서도, 그의 표정으로부터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한참 말이 없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은 채 그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 동안 나는 시선을 그에게서 떼지 않은 채, 곁눈질로만, 열심히, 주변에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는지를 찾았다. 프그단의 뒤에 칼과 화살, 활 등이 있지만, 그건 닿지도 않을뿐더러... 나는 나보다 크고 길며 이제는 금속 의수까지 장비한 프그단을 뚫고 칼을 집어들 자신이 없었다.

책상 위에 내가 놓고 간 만년필이 하나 놓여있었다. 하지만 나에게서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닿을 수 있을까. 이걸 무기로 쓸 수 있을까... 그 때, 머릿속에 뭔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능할까. 나는 주변에 뻗은 마나를 조심스럽게 배치했다. 일단은 대비해놓는 수단으로만 준비해 두며, 나는 계속, 프그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깥이 어두워지며 군데군데에서 횃불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천막의 두껍지 않은 천을 뚫고 밖에서 켠 횃불의 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우리가 천막을 편 풀밭에서 풀벌레들이 찌륵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도록 프그단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내 얼굴을 보며 말을 했다.

“이제 와서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겠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날 죽이고 내 시체를 가져가든가’라고 할 확률이 크겠지요.”

프그단은, 예의 그 담담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조용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 종족은 이번 전쟁에 많은 것을 걸었다. 변신 마법을 이용해 위장하여 기사단이나 융파트 영지의 중책을 맡고 있던 자들을 이번에 총동원했다. 총동원했기에 꼬리가 밟힐 확률도 클 것이다. 영민한 자라면 행적을 추적해 누가 이종족인지 알아내기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완벽한 준비를 하고서도 말이다.”

“그게 나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는 모든 변수를 고려했다. 하지만 자네의 능력을 이용한 그 말도 안 되는 위력의 화살이 모든 것을 뒤엎었다. 자네 같은 특이한 사람들을 여럿 찾아내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역설적이게도, 자네 때문에 조기에 종료되게 된 것이다.”

“아직 융파트는 저항할 뜻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는 아무런 몸짓이나 표정 변화 없이 피식 비웃는 듯한 인상을 주는 신묘한 재주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전략회의에 참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회전에서 처참하게, 남대륙의 매복병들까지 거의 다 잃어버린 융파트에게 저 성벽 이외에 어떤 저항 수단이 남아있다는 말인가. 영지민을 인질로 잡는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내 텐트 안에 나타난 이래 처음으로, 깊이 심호흡한 후, 말했다.

“그리고 나와 내 동족들은, 남은 우리의 끈을 동원해서, 융파트가 조기에 항복하게끔, 그리고 전란의 주범들이 스스로를 묶어 칭죄하며 황제의 앞에 엎드리게끔 주선할 계획이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잠시만. 이 사람이 이렇게 나온다는 건.

“...그게 내가 당신들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조건입니까? 당신들의 금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빠른 종전을 위해 협력할 테니, 대신 특수한 체질을 가진 기리인이 종족의 금제를 풀기 위해 협력하라’는 조건을 내거는 것이 아니냐, 는 내 물음에, 프그단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머리가 없지는 않다. 그런 조건이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자네가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울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 내 눈 앞의 상대는 천 년 가까이 산 존재다. 오랜 세월이 지혜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멍청했다면 그 긴 세월동안 정체를 위장하며 살지 못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내 말을 얼마나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떤 노력을 한들 믿어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 종족은 전쟁 중에 남아있던 인원 중 반수 가까이가 다시 사라졌다. 정체도 많이 드러났고 말이다. 그러니, 설령, 자네가 우리에게 협력해서, 금제를 풀어준다 한들... 우리가 종족의 재생의 힘을 되찾기에 충분한 수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인 셈이다.”

설마... 내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처음으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그의 담담한 표정을 이어받고 있었다. 담담하면서, 하지만 처연한 구석이 있는 미소였다.

“인간 기리인 모스. 그러니 나는 두 가지를 제물로 내놓는 셈이다. 첫째는 반란의 주역들이 스스로 항복하는 것, 그로 인한 빠른 종전. 둘째는 우리 종족의 존망이다.”

“우리 앞에 목을 바칠 생각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네만, 우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사회의 혼란을 줄이기에 더 나을 것이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혼란스러운 사회를 원하지 않네. 남은 우리 종족이 은둔하기에는 안정된 사회가 훨씬 나으니까 말이야.”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렀다.

============================ 작품 후기 ============================

조만간 다사다난했던 8챕터도 끝나겠네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꽁냥꽁냥씬을 넣고 싶긴 합니다만 ㅎㅎㅎ

휴식기간이 있었음에도 제 글을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오니아 님 // 사실 기리인에게 님의 댓글을 대신 말하게 하고 싶었습니다만... ㅎㅎ;;

쇠황조롱이 님 // 아마 프그단이 아름다운 여자 엘프였다면 기리인이 그렇게 했을지도...? ㅎㅎ (그럼 장르가 바뀌겠네요 ㅋㅋ;;;)

Theshadow 님 //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이상하게 인재들이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이 낳는 결과겠죠.

박성빈 님 // 천 년쯤 산 사람은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를 것 같습니다.

얼룩야옹이 님 // 이번 편으로 답변이 되셨을까요?

화이트프레페 님 // 바로 그거죠. 스스로 고통을 지려는 생각이 없으니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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