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37화 (237/309)

00237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나에게 원하는 게 뭡니까.”

프그단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나는 우리 종족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야.”

“뭐라고요?”

“말했지 않나. 우리는 이미 회생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말일세. 설령 자네가 우리같은 다른 종족들의 구원자가 맞다 한들... 우리 회색 엘프와 우리에게 동조한 몇몇 동족들은 이미 스스로 되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수가 축소되어 버렸다.”

“...”

‘책에 적힌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담담했기에 더욱 처연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기리인 모스. 내 부탁은 한 가지이다.”

뭘까. 살려달라는 부탁도, 종족의 부활에 협조해달라는 부탁도 강제도 아니라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반란이 최대한 빠른 시기에 종결되게끔 돕겠다. 그리고, 공공연히 목을 바치지는 못하겠지만 – 회색 엘프를 비롯한 몇 종족의 엘프들은 푸른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영원히 인간들의 세상에 나타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나를 묶어 황제에게 데려가라. 그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끔 내 목을 바치겠다.”

나는 너무 놀라 대답하는 것조차 잃었다. 다시금, 탈출을 위해 스스럼없이 손목을 휘둘러지는 칼날에 가져다대던 그날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도 그대의 우리 소수 종족들에 대한 분노가 사라질 리 없다는 것은 잘 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나서서 우리의 금제를 풀어주려는 노력 같은 걸 할 리 없다는 것도. 그리고 그것이 우리 스스로 만든 결과이니 누구를 탓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 대체 나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늦건 빠르건 그대에게 다른 이종족들이 접근할 것이다.”

한 마디 쏘아주지 않고는 못 배겼던 건 아직 내가 협상에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연습이 덜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아직 치기가 남아있어서일까?

“당신처럼 나를 납치하려고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보장은 할 수 없겠군.”

“...거짓말은 안 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안심이군요.”

독기가 묻은 내 말에도 그는 그저 담담한 미소로 대답해왔다.

“악의에까지 선의로 대하라는 뜻은 아니니까 안심하라. 내 부탁은 이렇다, 인간 기리인 모스. 내 목숨과, 우리 종족과, 반란의 빠른 종전을 걸고 부탁한다. 그들에게 협조하라는 부탁도 아니다. 그들이 접근하거든 이야기만 한 번 들어줄 수 없겠나.”

오늘 저녁 나는 계속 놀라기만 하는구나. 프그단은, 더 이상 담담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탁한다. 우리야 우리의 우행과 악행의 결과로 재생의 길에서 탈락하지만, 그래. 자네들 인간들이라면 트리클 신의 역사라고 봐도 되겠군. 어쨌든, 그런 우행과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다른 종족들에게도 그런 운명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야기만이라도 꼭 들어주기 바란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너무나 절실하고 절절하게 말하는 그 광경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프그단이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하면 엿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목숨과 자기 종족들의 은둔을 약속했다. 그걸 믿을 수 있는가는 별개로 하고... 그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리고 반란의 빠른 종결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약속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거래 아닐까.

‘띠링!’

<메인 퀘스트 업데이트>

<퀘스트 달성 조건 : ‘이티클레 대륙의 진실’을 안다.

퀘스트 진행 힌트 :

1. 제도로 가서 요안나와 함께 당신의 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세요. - 진행중

2. 은둔중인 고대 종족들에 대해 알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고대 종족들 사이에 조각조각 널리 퍼진 그들의 ‘금제’에 대해 단서를 모으세요.

- 엘프 종족들에게서 ‘마나의 갑옷을 입은 자’라는 단서를 수집하였습니다.

- 단서를 수집하면 메인 퀘스트 진행에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

‘띠링!’

<메인 퀘스트 – 프그단의 부탁>

<황제 시해범이며, 반란의 배후이며, 당신의 목숨을 위협한 바 있는 회색 엘프 프그단. 당신이 그에게 좋은 감정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어, 당신에게 부탁을 제시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메인 퀘스트에 분기가 일어납니다.>

<어느 쪽이 유리하다 불리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또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이성과 품성을 동원해 결정하도록 하십시오. 결정의 권한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당신의 것입니다. 본 시스템은 그런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를 것입니다.>

<프그단의 부탁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N>

프그단은 한참동안 눈을 꿈뻑거리며 가만히 보고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내가 말하기를 기다려주었다. 나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읽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프그단. 두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프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만, 내가 당신의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프그단은 미리 생각해둔 대답인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일 아침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사절이 도착할 것이고, 2~3일 안에 ‘반란의 수괴’들이 스스로를 묶어 황제군의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또한 반란군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도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게끔 해 주지. 엘프들의 은둔에 대해서는, 사라지게 될 사람들에 대한 인명부를 주겠다. 그 사람들이 다시금 나타나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겠나.”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 나타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 물어야겠지만... 나는 인명부를 확보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이 사용하는 변신 마법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저 말에 이견을 제시하면 그가 저 의견을 철회할까 걱정되어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프그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목숨에 대해서라면...”

그는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마나를 움직여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끔 경계하고 있는 동안, 그의 읊조림이 끝나자... 철컹. 그의 두 손에서 의수가 떨어져내렸다. 그는 가지가 베어져나간 나무 둥치같은 두 팔을 들어보이며 담담히 말했다.

“이제 나를 묶어서 황제에게 데려가도록 하게.”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말을 꺼냈다.

“먼저 남은 질문을 해야겠군요. 당신의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동기?”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절실하게 만드는가, 이 말입니다. 사라져가는 당신들의 종족을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합시다. 그 시점에서 당신이 이런 조건 없이 그냥 은둔을 택했더라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아니, 인류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겠지요.”

프그단은 ‘계속 이야기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말을 이었다. 괜히, 입이 말라온다. 물 한잔이 마시고 싶다.

“그리고 당신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철천지 원수에 가까울 겁니다.”

“그 역시 부정하기 힘들군. 인간의 희노애락을 아직 갖고 있었더라면 아마 아직도 그대에게 분노하고 있었겠지.”

“바로 그 점입니다. 왜, 철천지 원수에게 이렇게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며, 그리 어렵지도 않은 부탁을 하는 것입니까?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너무 불공정한 거래이기에 당신의 동기가 오히려 의심스러운 지경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네가 그렇게 생각할 만 하지. 자네가 실제로 우리 소수 종족들의 금제를 푸는 데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이야기만 듣는 것이라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겠지.”

그는, 뭉툭한 팔을 움직여 팔짱을 끼려다가... 흠칫한 후, 두 팔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그는, 예의 담담한 듯 처연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트리클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 는 생각이라면, 대답이 되었는가?”

---

온갖 일들이 있던 밤이 지나고, 새벽. 나는 부산스러운 전령의 소리에 깨어났다.

“모스 백작님!”

마스 경이었다. 마스 경이 천막의 문을 젖히고 들어와 내 몸을 흔들었다. 간밤에 잠이 모자라 밤늦게야 잠이 들었던 나는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아-함. 아, 마스 경...”

“정신차리십시오. 회의가 소집됐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주요 지휘관들을 모으셨습니다.”

“아... 뭐 반란군이 항복의 사절이라도 보냈답니까...?”

마스 경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그렇게 하게 한 게 나니까... 라고는 죽어도 대답할 수 없겠지. 나는 웃으며, “금방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서서히 메인 스토리도 진행시켜야겠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제 끈이고 힘입니다.

대왕물개 님 // 세월의 돌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한참 그 글이 연재될 때 전민희 작가님과 메일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있네요. 세월의 돌과 여기서의 차이라면... 이 놈들은 아무리 봐도 '자업자득' 이라는 평을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는 점 정도?

|라랄라랄라| 님 // 자기들 살려달라는 이야기는 다행히 아니었...

박성빈 님 // 아무래도 천 년이나 지났는데 일반적인 번식으로는 힘들겠죠?

화이트프레페 님 // 아무래도 인간이 아니니까요. 처음에 기리인이 '바위가 말하면 저럴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은 이유가 있겠죠 ㅎㅎ

eastarea 님 // 며칠간 님의 코멘트가 없어서 아쉽고 걱정되었는데 이렇게 돌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프그단은 어떻게 됐든 죽음을 면치 못할듯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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