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38화 (238/309)

00238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폐하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시종들이 달라붙어 온갖 애를 썼지만 거의 잠을 설쳐 눈 밑이 거뭇거뭇하고 피부가 거칠어진 얼굴은 누가 봐도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했다. 그리고, 몇 사람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

내가 인사하자, 폐하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잤냐, 기리인.”

“네, 폐하. 폐하는...”

“내 걱정은 됐다.”

손을 내저어보이는 폐하. 어젯밤 일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 심사를 추측하기가 참 어려웠다. 내가 그 입장에 서기 전까지는 알 수 없지 않을까... 그렇게 한가로운 생각을 하며 폐하의 뒤에 가서 시립하자, 린베크 아버님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대충 모든 사람들이 들어와 앉자 시종이 한 사람을 데려와 앉혔다. 아는 사람이었다.

“고즈스... 경이었던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미천한 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셔서 영광이옵니다.”

회전을 청하러 왔던 적의 사절, 님크 기사단 기병대장 고즈스였다. 내 기억속의 그는 사신으로 온 입장을 망각한 채 단순한 도발에 분노해서 떽떽거리다가, 내 얼굴을 보고 얼굴이 새하얘질 정도로 놀라 도망가버린 어설픈 무장이었는데.

“좋다, 고즈스 경. 무슨 일인가.”

그는 대뜸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건 무슨 뜻인가? 고즈스 경.”

“폐하.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저희들은 현 시간부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폐하의 발 앞에 엎드리고자 합니다.”

“무조건 항복이라.”

폐하와, 옆에 서 있던 나의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시, 시선이 얽히고, 폐하가, 이제는 전혀 적대할 생각 없이 납작 엎드린 고즈스에게 물었다.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하니, 이제부터 그대들을 반란군으로 칭하겠다. 반란군의 수괴는 누구인가.”

고즈스는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룬폿 융파트 공작과, 브리앙 뫼르말 백작, 그리고 폐하의 관료들 몇 명이옵니다.”

“내 관료들이라. 예를 들면?”

“수사 기사단 융파트 지부 지부장 이트 누웨트 경이라든가...”

아, 하는 소리가 났다. 좌중의 시선은 그 소리를 낸 에아임 형에게로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형은 고즈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이트 경이 처음부터 반란에 개입했습니까?”

고즈스는 엎드린 채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수사 기사단으로부터 전해지는 지시를 통해 적의 정보를 추론하였지요.”

“아아...”

얼굴이 새하얗게 된 형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형은 멍한 얼굴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를 돌이켜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린베크 총사령관님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반역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께서 결심하시는 대로 처리될 것이다. 하나 그 전에, 먼저 반역의 수괴들이 황제 폐하의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고즈스는 이에 대해서도 언질을 받은 듯 여전히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들은 내일 이 곳으로 찾아와 황제 폐하의 앞에 엎드릴 것이옵니다. 또한, 융파트 성의 모든 문이 개방되고, 현재 융파트 성 내에 있는 경비를 포함한 모든 병력들이 즉각 무기를 버릴 것이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폐하가 말을 끊으며 말했다.

“지금 융파트 성내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을 터. 아닌가? 전쟁으로 인한 유민이 다수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렇다면 경비병을 성 밖으로 뺀다면 치안이 유지될 리 없지 않은가. 그들을 성 밖으로 뺄 필요는 없다. 그들은 성 내에 남아 그대로 임무를 수행해도 좋다. 대신, 우리가 파견할 몇 명의 관리들에게 감독을 받아야 할 것이다.”

폐하의 옆에 시립해 있던 나는, 좌중의 모든 사람이 문무를 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듣기에도 시의적절한 지시였으니까.

“그 인선에 대해서는 카라 장관과 에아임 경, 두 사람에게 맡기겠소.”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약간이나마 냉정을 회복한 형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폐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고즈스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항복은 빠른 종전을 말한다. 제국 모든 생명의 주재자인 짐으로서는 당연히 빠른 종전을 반긴다. 하나 한 가지 안 물을 수 없군. 그대들이 회전에서 대패한 것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왜 오늘 아침에서야 갑자기 항복의 의사를 밝힌 것인가.”

고즈스가 당황했다는 것은 그를 내려다보는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폐하를 바라보았다. 짓궂으시군요, 폐하. 진짜 원인을 알면서 뭐라 답변할지 궁금해서 물어보시기는. 고즈스는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

“어, 그것이... 실은 내부에 사정이 있어... 함께 싸우던 몇 명이 야반도주를 하고...”

그렇게 처리한 건가. 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우선 반역의 수괴들이 와서 머리를 조아리도록 하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후, 일을 처결하도록 할 것이다. 나머지 일은 경들이 듣고 처리하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기리인. 따라와라.”

폐하는 나에게 그렇게 지시한 후 천막 문을 열고 나섰다. 나는 린베크 사령관님에게 고개를 숙인 후 황급히 폐하를 따라 나섰다. 폐하는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걷자.”

“네, 폐하.”

언제나 그렇듯 병영은 부산스러웠다. 황제 폐하를 본 병사들이나 장수들이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하느라 잠시 지체되고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바삐 뛰어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끝나고 앞으로는 큰 싸움이 없을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도 그랬다. 바쁜, 혹은 바빠 보이는, 혹은 – 바빠 보여야만 하는 것이 군대의 본질이려나.

이 모든 부산스러움 가운데 폐하의 곁만이 조용했다. 시종들과, 전쟁터에까지 폐하를 수행한 비르히를 포함해 여남은 명만을 곁에 두고 걸어가는 폐하의 곁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 조용했다. 나는 이들과 자주 함께 있었기에 이들이 폐하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며칠이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가만히 폐하의 뒤를 좇기만 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걸어간 우리 일행은, 우리 진영의 한쪽 구석에, 물자가 몇 개 부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비어있는 들판을 발견했다. 시종 중 한 명이 황급히 휴대하던 짐 중에서 너른 돗자리를 꺼내 깔았고, 다른 시종이 자신의 짐 중에서 조립할 수 있는 커다란 파라솔을 펼쳤다. 비르히는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을 살피며 폐하에게 위험이 될 만한 것이 없는지를 찾고 있었다. 충견같은, 한결같은 그의 모습.

폐하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은 후 돗자리 위로 올라가 팔베개를 하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말했다.

“기리인, 뭐 하냐?”

“네?”

“신발 벗고 올라와.”

히엑?

“폐, 폐하, 소신이 어찌...”

“황제의 명이다.”

흐아... 나는 별 수 없이 쭈뼛거리며 부츠를 끌러낸 후 폐하가 누워있는 옆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좀 편히 좀 앉아라.”

“이게 편합니다.”

“확-! 명하기 전에 좀 편하게 앉아라.”

폐하는 한 쪽 팔을 빼서 정말로 나를 한 대 치려는 듯 팔을 치켜들며 말했다. 여기서 더 눈치보다가는 황제의 명이 문제가 아니고 폐하가 정말 삐지겠다. 나는 별 수 없이 무릎꿇었던 다리를 풀며 좀 더 편한 자세로 앉았다. 아. 누가 보지 마라. 분명 누가 보면 ‘폐하의 앞에서 불경하다!’고 하고도 남을 자세니까 말이다.

내가 편히 앉은 걸 본 폐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폐하. 내가 ‘주무시려나’하고 생각하는데, 폐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그대로 됐구나.”

자세한 설명 없이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기에 나는 곧바로 말했다.

“저도 사실은 약간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어젯밤 그 일을 겪었는데도 아직도 꿈인 것 같단 말이다.”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불경을 저질렀다. 폐하가 딱히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아서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

막 잠자리에 들려다, ‘지급한 일이라’는 내 말에 방문을 허락한 황제 폐하는, 프그단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 폐하가 어떤 종이든 이종족을 직접 본 것은, 프그단의 잘린 손목을 제외하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폐하에게 자초지종을 – 이종족의 부활과 그가 내건 조건 이야기는 빼고 – 말했고, 프그단은 폐하의 앞에 묵묵히,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 같은 팔을 뒤로 묶임당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영 진도가 나가지 않네요. 늦게 시작하기도 했지만...

독자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에 씁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그렇긴 하죠 ㅎㅎ;

eastarea 님 // 바쁜 일은 대략 정리되셨는지?

박성빈 님 // 오.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인데요.

얼룩야옹이 님 // 각자 유대감이나 정보통 같은 것은 없습니다만, 프그단이 저렇게 나오는데는 이유가 있긴 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