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40화 (240/309)

00240 8. 시궁창에서 꽃은 필 수 있을까 =========================

내가 폐하와 망중한을 즐기는 동안, 적이 항복했다는, 그것도 무조건 항복이며 내일쯤 반란의 수괴들이 스스로 폐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소식이 즉시 전 군에 전파되었다. 시종들이 잠에 빠진 폐하에게 파라솔을 잘 씌워드리는 동안, 나는 먼저 일어나 내 천막으로 향했다.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나에게 특별한 일이 없는지는 꽤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내 입장을 생각해 일을 찾아서 하기도 하고, 사령부나 에아임 형 부탁을 받아 서류작업을 돕거나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 활이 초장거리 저격이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나는 일종의 전략병기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귀하신 몸에게 이런 잡일을 시킬 수는 없지요’처럼 말이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나를 무시하거나 하기는커녕 공손히 인사하는 병사들이나 장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그러지 말라고 편하게 할수록 오히려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노력을 반쯤은 포기했다.

나는 진영 안을 걸으며 병사들을 관찰했다. 분명 그들의 얼굴은 어제에 비해 밝아진 것 같았다. 진영 전체에 뭐랄까, ‘활기’가 돌고 있었다. 서로에게 외치는 목소리 같은 것들도 더 밝아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오늘이 쉬는 날이 되면서, 병사들은 우리 군의 진영 근처를 지나는 강에서 강물을 길어와 빨래를 하는 등 ‘개인정비’를 하고 있었다. 몇 명 지나가는 병사들의 얼굴은 ‘밝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빠른 종전. 황제 폐하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야 반역이라는 게 제국의 정계를 어지럽히는 걸 더 신경쓸 테지만, 실제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들은 어떨까. 그저 ‘집에 간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반기는 걸까. 하긴 나도, 선생님의 얼굴을 비롯해 몇 명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진영을 가로질러, 목적한 천막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 기리인, 왔냐.”

형은 잠깐 고개만 들어 나를 보고는 다시 서류에 고개를 파묻었다. 휘리릭 휘리릭, 종이가 넘어가고, 형이 펜을 들어 뭐라고 긁적거리고, 서류를 넘겼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서류를 받아들고 나갔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서류를 들고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어, 형, 안 좋은 시간에 온 것 같은데... 있다가 다시 올게요.”

“아냐, 아냐. 5분만 쉬자. 잠깐만 산책하고 올게. 괜찮지?”

아까 서류를 들고 나갔던 기사가 돌아와 서류다발을 텅 하고 책상에 내려놓은 후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대신 부장님께서 늦으면 늦을수록 서류가 더 쌓일 거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서류 쌓을 책상 하나를 더 갖고 들어와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형은 과장되게 어깨를 푹 떨구며 천막 문을 나섰다. 나는 황급히 형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정말 바쁜가봐요 형.”

형은 짧게 한숨을 푹 쉬었다.

“아침에 들었잖냐. 이트 누웨트 경이 반역자였다고 말이다.”

아, 그랬었지. 우리는 특별히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5분 밖에 없기도 했고, 형에게는 지금 햇빛을 쬐게 해 주는게 가장 좋은 휴식 같아서였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형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 그래서, 우리가 파악하고 있던 융파트 영지에 대한 정보는 모두 틀려먹은 거라는 거야.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두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는 중이다. 두 달 남짓한 기간동안 들어온 융파트 쪽에서의 보고서를 전부 파악해 이 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엿먹였는지를 보고 있어. 동시에 지금 반군을 바로 장악할 수 있게끔 준비도 하고 있다.”

“...안 바쁘면 이상한 정도의 양이네요.”

“그래도, 이런 게 다행이지. 전쟁터에서 직접 뛰는 것보다는 말야. 그리고, 이것만 끝나면 집에 가니까. 아-! 얼른 마누라랑 자식새끼 보고 싶다.”

“결혼하면 다 그렇게 되나봐요?”

“무슨 소릴. 우리 집이 화목한 거야.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 대는 선배 유부남들을 니가 봤어야 되는데. 연애할 때가 좋은 거다, 라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처음엔 엄청 겁났다니까.”

분위기 나쁘지 않군. 슬쩍 물어볼까.

“형.”

“어. 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그러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다들 자기 일에 바빠 우리 얘기를 들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형은,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 거란 생각을 하는 듯, 덩달아 약간 긴장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까 황제 폐하의 곁을 떠나 여기까지 걸어오며 생각을 정리했던 대로 형에게 물었다.

“형. 형은 그 때, 프그단 보고 말이에요.”

“언제. 프그단 본 날이면 그 날 밖에 없구나. 니 방에서 프그단 체포했던 날?”

“네. 그 때, 프그단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어요?”

형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혐오감...이라고 해야 할까.”

“혐오감이요.”

“어. 너는 안 그랬냐? 천 년 전부터 암약했던 존재들이잖아. 황실에 잠입했던 것도 50년 이상 된 장대한 계획이었다며. 인간을 꼭두각시로 여긴다는 느낌 안 들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게 좋겠군.

“네, 그랬죠.”

“그렇지? 그리고, 너한테만 온 메시지 스펠이었지만, 프그단이 그, ‘인간 폭탄 사건’의 배후라며. 황제 시해범이기도 하고, 아니 그에 앞서서, 스스럼없이 하등 상관없는 사람들을 폭탄으로 만든 건 신의 천칭 앞에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 아니냐.”

마법 아카데미의 필사적인 연구와 조사 끝에 알아낸 것은, 황제 폐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인간 폭탄은 아무에게나 막 시전하면 되는 마법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미리 그 마법을 위한 시약을 몇 차례 마셔서, 몸의 모든 혈액이 통증을 유발하는 검은 혈액으로 되고, 뼈가 산산조각나서 무기처럼 작용할 수 있게끔 미리 잘게 갈라져 놔야, 때를 맞추어 터트릴 수 있다는 것이 조사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그 ‘인간 폭탄’들은, 그 날 대신전에 올 가능성이 높은 제도에 거주하는 무작위 인간들, 황궁에서 일하는 기사나 시녀들 중 몇 명, 그리고 황제 폐하를 노린 알리시아 뫼르말, 이렇게 예비되어 있었다... 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리고 간밤, 황제 폐하에게 가기 전에 나는 프그단에게 그 사실을 물어 확인을 받았고, 황제 폐하에게는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안그래도 분노하고 있는 폐하에게 더 분노할 거리를 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음... 형.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그래. 안 그래도 슬슬 들어가야겠다.”

“어... 프그단이 저지른 건 물론 극악무도한 범죄임에 틀림없죠. 그런데 형, 혹시, 프그단이나, 다른 엘프나, 혹은 다른 이종족에 대해서... 그 이상으로 증오나 혐오가 들지는 않았어요?”

“무슨 말이냐?”

“어, 예를 들면... 프그단의 동족 중에, 혹은 그와 소통하던 다른 이종족 중에... 범죄와 관련 없는 이종족이 한 명 있었다고 치면요.”

“그랬다면 스스로 그 사실을 알렸어야 마땅하다.”

형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우선 범죄의 대상이 제국의 지존하신 황제 폐하, 혹은 다음 황제의 보위에 오르실 당시 황태자 저하셨다. 이는 제국에서 있을 수 있는 범죄 중 가장 큰 범죄이며, 제국의 신민은 어느 누구나 그 사실을 안 순간 곧바로 음모를 신고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설령, 그들이 이종족이라 제국의 신민이 아니라고 주장하려 든다 쳐도... 그들은, 프그단처럼, 인간 사회에 숨어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위장하는 인간 신분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제국법의 ‘옷에 걸맞는 행동’이라는 원칙이다.”

형은 마치 외운 것을 읊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태도가 이상하다기보다는, 수사 기사로서 법률을 다뤄야 할 때 자주 그러는 태도 같았다. 법률을 다룰 때는 딱딱해야만 하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범죄가 매우 극악무도한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살인범과 이단 다음으로 흉악범죄로 치는, 아동에 대한 범죄, 연고 없는 대상에 대한 무차별 습격, 마법이나 약물을 이용한 범죄,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도덕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마땅히 범죄의 발생 전부터 이를 막았어야 옳다. 제국법의 ‘인간성을 버리는 범죄’의 원칙이다.”

형은,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원래의 형으로 돌아가, 내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내가 이런 법 외우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겠냐? 너도 미리미리 공부해 둬. 언젠가는 너도 이 지식을 가지고 온갖 유형의 범죄자와 싸워야 하지 않겠냐.”

“형... 아직 한다고 안 했는데...”

이 사람이 어디서 은근슬쩍 수사기사로 끌어들이려고. 형은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헤집은 후, “그럼 나 간다. 있다가 식사 시간에 볼 수 있으면 보자.” 하면서 돌아갔다. 나는, 머리를 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 거리가 꽤 많았다.

============================ 작품 후기 ============================

예전같은 속도가 안 나오네요. 하루 세편 네편씩 어떻게 썼지... ㄷㄷㄷ

제 글을 찾아서 읽어주시고, 선작/추천/코멘트/쿠폰 보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가 연재를 계속하게끔 해 주시는 힘이십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쇠황조롱이 님, 스카테 님 // 이종족 관련 떡밥은 메인 스토리와 연관된 부분이다 보니 가타부타 바로 답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적네요. 내일 기리인의 입으로 조금 더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관심가져주시고 상세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월요일이 무사히 지나갔네요! ㅎㅎ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