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6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세상에...”
향긋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나는 테밀 누나, 오레즈 할아버지, 에노 할머니에게 지난 두 달간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흑인 병사의 출현 같은 군사 기밀이나, 혹은 프그단의 정체 같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빼도, 전쟁 이야기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흥미진진한 법이다. 하물며 내 언변은 92나 되고 ‘고급’ 이라는 수치가 붙어있으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아까 개선식 할 때, 니가 ‘제일 영예로운 마차’에서 꽃을 뒤집어쓰는 걸 보고 깜짝 놀라긴 했는데... 세상에. 그렇게 대활약을 했으니 놀랄 일도 아니구나...”
“제가 알기로 궁수가 그 마차에 앉은 게 명궁 온케오 님 이래 처음일 겁니다요.”
“세상에...”
옆에서 네모나게 자른 수박을 먹고 있던 뢰다가 물었다.
“삼촌, 삼촌은 어떻게 그렇게 활을 잘 쏴?”
“응, 삼촌도 잘 몰라. 뢰다야, 요안나 이모 알지?”
“응! 그 엄청 이쁘고 꽃향기 나는 이모!”
그래... 그 향기가 참 특징적인 사람이지...
“그 이모하고 같이 삼촌이 왜 그렇게 활을 잘 쏘는지 연구해 볼거야.”
“연구가 뭐야?”
“아... 알아볼 거라고.”
뢰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수박을 하나 더 포크로 집었다. 아이와 말하는 건 늘 신선한 자극을 준다. 어른이 당연하다고 쓰는 단어를 아이는 설명을 요구하니까 말이다. 물론... 늘 겪는 부모는 짜증이 나겠지만 말이다.
“오늘 그이 올 수 있대니?”
“글쎄요... 저한테는 가타부타 얘기는 안 했어요. 아까 보니까 황제 폐하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호위하느라고 정신이 없는 모양이더라구요...”
“잘난 남편 두면 그렇지. 에휴. 얼굴을 볼 수 있어야 말이지. 에노, 저녁이나 준비해 놓을까요?”
“네, 마님. 전쟁이 끝나서인지 신선한 것들이 많이 들어왔더라구요.”
“도련님, 저녁 식사 전까지 가서 쉬시겠습니까? 그리고 처리하셔야 할 일들도 제법 쌓여 있습니다요.”
“...편지 말인가요?”
오레즈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중에는 도련님 오시기 조금 전에 도착한 녀석들도 있습니다요. 아무래도 도련님이 이번에 큰 공을 세운 바람에 인기가 더 올라간 듯 합니다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궁에 드나들게 된 이후 내 삶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누나가 어깨 너머로 나를 불렀다.
“아, 기리인. 저녁때는 요안나랑 이브도 올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내 몸이 저절로 홰 하고 돌았다. 요안나 선생님이 온다는 건 참 기쁜 일이지만, 이브 씨는 왜...?
“이브 씨요...?”
“응. 요안나 친구라며? 알고 보니까 내 친정 쪽하고 인연이 있는 오르테 가문 출신이더라? 너하고도 안면이 있고, 앞으로 연구도 같이 할 거라면서? 사람이 또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그래서 친해졌지. 남편도 없고 너도 없으니까 심심하잖아.”
“아, 네...”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테밀 누나는 몰라도 요안나 선생님까지 말이다. 아니... 선생님은 구워삶아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렇게 성공적으로 내 영역 속에 비집고 들어오다니.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이브 씨에 대한 평가를 약간은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하고 협상할 때 삽질만 하는 바람에 내 안에서는 ‘일은 잘 못하고, 망상은 많은’이라고 짠 평가를 하고 있었는데.
석 달 만에 오는 내 방은, 하지만 깨끗했다. 전쟁터에 갖고 나갔다 온 내 옷가지들과 활, 갑옷 등이 오히려 지저분해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 오레즈 할아버지와 에노 할머니가 꼬박꼬박 청소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객식구에 불과한 나에게까지 정성을 다해주시고 말이다. 포상금 받으면 두 분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테이블을 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에 못지 않은 어마어마한 선물과 편지의 산이 쌓여 있었다. 나는 답장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팔이 쑤신다, 같은 생각을 하며, 일단 다른 일을 먼저 하자고 결심했다. 배낭을 열어, 빨래바구니에 빨래를 넣고,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2층의 침대로 올라가 활과 갑옷의 상자를 가져와, 깨끗하게 닦고, 화살도 간만에 촉을 분리해 정리해서 전통에 잘 넣어두고, 행사를 위해 지급받은 칼도 일부러 한 번 헝겊으로 닦아주고... 그리고 나서도, 밍기적대다가, “으얏!”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고 나서야 나는 탁자 앞에 앉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예전에야 내가 갓 사교계에 입문하는 사람이니까 밉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 일일이 답장을 했지만, 그 후로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그러진 않겠지. 저 사람들도 ‘걸리면 좋고!’라고 생각한 거겠지. 나는 내가 이름을 모르는 귀족들의 편지를 방바닥 한 쪽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편지의 8할이 줄어들었다.
나머지 2할 중에서 상당수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였다. 테밀 누나가 모아서 군사 우편에 보내주기 전에 전쟁이 끝나, 내 방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편지들 말이다. 나와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보낸 편지였다. 대부분이 여자였던 건 전과 같지만, 이번에는 놀랍게도 남자의 편지가 섞여 있었다.
리미는 어느새 제도에 내려와 있었다. 종전이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백작님이 리미를 내려보내서, 나와 같은 길을 따라 제도에 왔다고 한다. 가장 빠른 무도회를 골라서 데뷔할 거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가장 빠른 무도회면 내일, 전승 기념 무도회잖아... 안 그래도 내일 곤란할 것 같은데 리미까지 봐야 하나...
아르토 누나는 잘 지낸다고 적어보냈다. 그리고, 약재같은 걸 공급받는 상인의 젊은 아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낸다고도 적었다. 누나가 나 때문에 나를 잊지 못해서 그런 사람들을 거부했다면 치정극 한 편을 적을 수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누나는 그 경험들을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누나가 즐겁다면 나도 좋았다. 누나가 행복하기를.
지인 편지 중 유일한 남자는 다름아닌 크주크 형이었다. 형이 건강하다는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나는 형 같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프다는 이야기를 숨긴다는 걸 잘 안다.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잘 숨겼으니까), 그래도 형의 필체는 아픈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아서 안심이었다. 형은 곧 아버지가 되는 자신이 신기하고 믿기지가 않는다고 적었다. 그리고... 형은 특별한 부탁을 해 왔다. 자신의 아이에게 ‘기리인’이라는 미들네임을 줘도 되냐고. 그리고, 참석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아이가 출생신고할 때 증인 자격이 되어달라고 말이다. 나는 당장 종이를 끌어와, 형에게, 나는 잘 지낸다고, 근황을 간단히 적은 후, 형이 그 말씀을 해 주셔서 너무 고맙고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없는 영광일 거라고 적어서 편지봉투에 넣었다. 나중에, 테밀 누나한테 물어서, 괜찮은 선물 하나 덧붙여서 보내야지.
그리고... 아르논 양의 편지가 있었다.
‘...(중략) 경은 항상 친절하세요. 그간 몇 명의 사람들과 교분을 가져보기도 했고, 고향을 떠나올 때 친구들과 서신을 몇 차례 교환하기도 해 봤지만... 언제나 점점 성의없거나 답장이 짧아지기 일쑤였어요. 그러다가 끊어지는 게 대부분이었구요. 나는 그 사람들을 친구로 여겼는데, 그 사람들은 나를 불편해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경은 아니세요. 경의 편지는 언제나, 신선하고, 재미있었어요. 전쟁터에 나가 계셨을 때도 마찬가지셨어요. 경이 적어주신 얘기를 읽으면서 아버님과 황제 폐하, 그리고 경에 대한 걱정을 조금 덜고,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재미를 가져보기도 했어요. 경 덕분이에요.
그런데... 경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곁을 안 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경이 보내주신 편지를 다시 읽어봤어요. 경은 참 예의바르시고, 편지도 재미있게 쓰셨지만... 언제나 거기까지세요. 자신의 이야기를 더 한다거나, 저에 대해 좀 더 많이 궁금해한다거나 하는, 그런 모습이 없으셔요. 제 느낌에는 경이 예의가 바르다기보다는 저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저의 착각일까요? 착각이었으면 해요. 경의 편지를 너무 재미있게 많이 읽었기 때문인지 경이 저에게 무관심하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 한 편이 서늘해지기 때문인가봐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셨으니, 전승 무도회가 열리겠죠. 그리고 당연히 경도 거기 나오시겠죠? 경은 사교계에서 최근 가장 관심을 많이 불러일으키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공도 많이 세우셨을 테니까요. 저도 당연히 거기 참석할 거에요. 거기서 뵈어요.
아르논’
머리가 더 지끈거린다. 내가 관심이 없네 어쩌네 하는 건 쉽게 말해... ‘나 너한테 관심 있는데, 너도 나한테 관심 좀 가져주면 안 될까?’하는 이야기다... 게다가, 무도회에 나온다고... 적령기의 레이디들 중 가장 유력 상품인 아르논이 나온다고. 게다가 사교계에 데뷔한 사람이 항상 기억할 첫 춤, 내 첫 춤의 상대가 그녀였으니... 아. 뒷골이 땡기려고 한다. 게다가 내일은 리미도 있을 건데.
...어떻게 아프다고 하고 빠지는 수가 없을까... 하지만 황제 폐하와 아버님과 형님들을 실망시켜드릴 수도 없고. 어째 점점 한숨만 느는 것 같다. 에휴. 나는 그 편지들을 테이블 한 쪽에 잘 갈무리하고는, 마지막으로, 서명이 있긴 하지만 귀족이 아닌 편지 두 통을 집어들었다.
============================ 작품 후기 ============================
경고! 12등급 캣파이트가 감지되었습니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포장이사도 이사는 이사네요... ㅠㅠ
후원쿠폰 6장 주신 DJ스누피 님 정말 감사합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 핵 to the 폭 to the 발!!!
eastarea 님 // 아마 분명 뒷골잡는 순간이 나올듯요...ㅋㅋ
스키테 님 // 걱정해주신 덕에 무사히 생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