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9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석 달 전 일이다. 아무리 내가 기억력이 좋아도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날의 일을 기억하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그 날의 일을 죽 기억해내자, 이브 씨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기억을 정교하게 해서 다시 말했다. 그 덧붙이는 말에 내 기억은 더 자세해졌다. 요안나 선생님은 어느 새 옆에 있던 종이와 펜을 가져와 우리의 말을 들으며 몇 가지를 적고 있었다.
“정리하면...”
우리 둘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머리를 긁으며 한참 생각하던 요안나 선생님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브, 니가 매혹마법 쓴 건 맞지? 왜 그랬니?”
잠시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던 이브 씨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주인님이...”
선생님은 ‘주인님’이라는 말에 눈살을 약간 찌푸렸지만 이브 씨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요안나, 솔직히 자존심 상하지 않아? 막, 옷도 야하게 입고, ‘원한다면 다 주겠다’ 하고 암시도 하고 하는데, 요만큼도 반응이 없단 말야.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 이런 생각이 막 들었다니까. 그것도, 여자 손 끝만 닿아도 벌떡벌떡 서야 할 10대가 말야. 너무 자존심 상해서...”
아. 저거 뭔지 알아. ‘나한테 이렇게 대한 건 니가 처음이야’지.
“그래서... 혹시나 통하면, 주인님이랑 진하게 섹스 한 번 하고... 아니면 말려고 그랬지... 알잖아 요안나, 매혹은 섹스 하고 나면 반 이상 풀린다는 거.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해서라도 한 번쯤 같이 자 보고 싶은 남자 아냐?”
이제는 내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을 차례였다. 선생님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얼굴이 한층 더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랬는데... 기리인 너는 매혹 쓴 것에 화만 났고 말이지.”
“네. 이전까지 써 보거나 맞아 본 마법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매혹 마법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 때는 그냥 화만 났어요.”
“으음... 기리인,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에게 말해 줄 수는 없지만, 프그단이 이 방에 쳐들어왔을 때도 슬립 마법과 관련해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네. 제 체질과 관련한 사항이라고 생각돼요.”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실험을 해 볼 수가 없네... 이 튕겨내는 게 어떻게 작용하는 건지, 작용하면 얼마나 작용하는 건지 알려면 약한 마법들을 직접 시전해 봐야 하는데, 만에 하나 못 튕겨내면 기리인이 피해를 입고... 그리고 튕겨내면 시전한 사람에게 돌아오니까...”
그 점은 나도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했었다. 설령 안전하다 하더라도 나는 전격이나 불, 얼음덩어리 같은 걸 맞고 싶지 않다. 하물며, 내가 원하지 않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건 정말 싫다. 만약 그런 마법이 나에게 걸린다면 연구 성과를 못 얻는 한이 있어도 의지력으로 이겨내 버릴 거다.
“암튼 그건 그런 걸로 하고... 그럼 이브의 문제인데...”
“싫어.”
대뜸 이브 씨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뭐가 싫어?”
살짝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너 내 정신상태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을 찾으려는 거잖아. 그건 싫어.”
“...대체 왜요?”
“주인님. 그러지 마세요. 저 주인님의 곁에 있고 싶어요. 주인님에게 봉사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말아주세요. 불쌍한 노예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부탁드려요.”
...평소에 너무 도색 소설을 많이 읽기라도 한 건가. 이 여자 왜 이래...
“제국법에 노예가 금지된 건 알고 계세요?”
“안 들키면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들키지 않게 잘 행동할게요! 자신 있어요 주인님!”
하아...
“대체 왜 이러세요?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한참 어린 남자의 발 앞에 자신을 송두리째 들어다 갖다 바치고서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같은 것도 없으세요?”
그녀는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날, 주인님이 저를 안아주셨을 때, 주인님은 한없이 자상하고 다정하셨어요.”
내가 언제? 소리 내지 말라고 괴롭혔던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 요안나가 이야기해 주는 주인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인님은 결코 저를 함부로 대하실 분이 아니시라는 확신이 들어요.”
하아...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니... 나는 선생님을 건너다보았다. 선생님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하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어딘가 좀 이상했다. 내 적다고만은 할 수 없는 여자 경험에 비춰봐도, ‘남자친구에게 뭐든지 해 주겠다는 여자 노예가 생긴 여자’가 지을 법한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선생님...”
“왜?”
“어떻게 해요...?”
“알아서 해야지.”
...완전히 기분이 안 나쁜 건 아니었구나...
“너는 어쩌고 싶은데?”
“어쩌긴 어째요... 원래대로 돌려놔야죠. 제가 무슨 도색 소설 속의 주인공도 아니고, 무슨 자격으로 노예를 두겠어요. 게다가 저건 이브 씨의 의지가 아니잖아요. 이브 씨는 불행한 사고로 지금 자신 주변의 현실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약간은 풀린 표정으로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표정을 좀 봐봐.”
나는 이브 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갈색의 눈동자와 긴 속눈썹, 크지는 않지만 분명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그 눈매에, 눈물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아아. 무거워진 눈물 방울이 또르르, 얼굴의 곡선을 따라 흘러내린다.
“주인님...”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이브 씨.
“대체 왜...”
“일단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몰라. 왜 이렇게 된 건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그리고 이 효과가 얼마나 가는지. 혹은 영구적인지도. 여자 친구로서가 아니라, 마법에 대해 탐구하는 마법사로서도 이 상황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야.”
길게 한숨을 내쉰 선생님의 표정은 어두웠다.
“설마... 선생님, 지금 혹시 말하시려는 게...”
“하아... 그래, 이대로 두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벌떡.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서슬에 의자가 뒤로 우당탕 튕겨나갈 정도로 벌떡.
“선생님, 제 정신이세요?”
“말 조심하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요.”
“왜 말이 안 되는데?”
선생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그래, 화를 내고 있었다.
“나는 뭐, 지금 상황이 맘에 드는 줄 아니? 응? 너한테 다른 여자가 접근 정도도 아니고, 스스로를 ‘노예’라고 부르면서 니 발 아래 엎드리겠다고 하는데, 그걸 가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내 기분은 얼마나 처참한지 생각이나 해 봤어?”
선생님의 눈에도 약간 눈물이 어렸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화가 나서 북받치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배의 닻처럼 내 가슴에 매달려 가슴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한없이 무겁게.
“물론 신전 같은 데 가서 기원하거나 하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럼 그 전에 저는 도망가 버릴 거에요. 아니, 끝끝내 주인님이 저를 신전에 가라고 하시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겠어요.”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외쳤다. ‘정보 확인.’
<이름 : 이브 오르테
나이 : 27
HP : 1395/1395
힘 : 66
민첩 : 72
지력 : 96
마나친화력 : 80
매력 : 91
지구력 : 73
특수 : 언변 90
스킬 : 매혹 Lv. 2, 정통마법 B0(4서클)>
<디버프 : 중심 이동>
<삶의 중심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이동해 있습니다.>
<디버프 효과로 인해, ‘기리인 모스’를 자신 가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버프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충성심’이라는 스탯이 부가적으로 생성됩니다. 현재 이브 오르테의 충성심의 대상은 기리인 모스이며 충성심 수치는 96입니다.>
<디버프의 원인이나 작용 기전, 진행 과정, 지속 기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걸 느꼈다.
“기리인. 내 기분도 그렇지만, 너도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잘 알아. 니가 원하지 않는 바라는 것도 잘 알고. 하지만, 지금 이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을뿐더러, 그걸 억지로 되돌리려고 하면, 이브가 싫어하는 것과는 관계 없이, 우리는 너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잃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이브가 어떻게 저런 상태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끔 할 수도 있지. 막말로 니가 여자 노예 스무 명 정도 거느리고 살게 되면, 난 그 꼴 못 본다.”
약간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완전히 화를 떨쳐내지는 못했는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아직은 어두운 빛이 있었다.
“그럼, 제 의사는요? 제가 원하지 않는데도? 연구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해요? 저 때문에 슬퍼하는 선생님을 그냥 보기만 하라고요?”
“어... 그 점에 관해서는 제가 주인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 작품 후기 ============================
솔직히 기리인이 원하면 어떤 상대든 함락이 가능한 수준이긴 해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뒷감당만 하다가 소설 스토리 진행도 못하고 끝나버릴 거에요...;;;
원하지 않아도 저렇게 얽혀드는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말이죠.
아, 그리고 여러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음 날 저녁에도 캣파이트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독자님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도마뱀DX 님 // 두 사람의 이유는 각자 다르죠. 전개 중에 풀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화이트프레페 님, 스카테 님 // 역시 페르세우스 이래로 반사는 최고의 역관광 기술이죠 (뭐래니)
eastarea 님 // 기리인이 제일 안 된 점은 지가 하고 싶지 않은데 끌려가는 점이죠 ㅎㅎ;;;;;
cacao99 님 // 매 편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