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0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이브 씨는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바르게 했다. 그러더니, 폭이 넓지 않은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틀어올린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왜 이러세요.”
“주인님, 제 말씀을 좀 들어주세요. 화내거나 거부만 하지 마시고 한 번만 들어봐 주실 수 없을까요.”
너무나도 간곡하고 공손한 그녀의 어투에 나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이 생각하시기에 요안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하시죠.”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대체 왜?
<냉철하게 생각해 보라는 시스템의 배려로 생각해 주십시오.>
뭐 임마...?
<당신의 욕망을 위해 냉철하게 생각해 보라는 게 아닙니다.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생각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사실, 좀 기분이 나빴다. 누군가 나에게 ‘냉정해라’고 하는 상황이 말이다. 나 스스로 그래야 하는데. 시스템의 말대로라면 대륙 최고의 지능과 의지력, 그리고 수준급의 냉정함을 지닌 게 나인데. 그만큼 황당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나는 차분히 현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내 몸에 일어난 특이한 현상은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을 정도라 단서가 하나라도 더 필요하다. 그런 걸 감안하면 약간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브 씨에게 일어난 현상을 좀 더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브 씨는, 그 상황에 대해 불만이 없다. 그러니, 잠시 그대로 두고, 이브 씨에게 일어난 현상에 대해 연구해 보는 것도 나를 위해 좋을 것이다.
그걸 눈감아두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에 잠시 눈을 감는다면 말이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지금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시는 건 두 가지 이유일 거에요. 주인님께서 가지신 도덕관에 이 상황이 용납되지 않는 면이 있으실 거구요, 그리고... 요안나가 슬퍼하기 때문이죠. 그렇죠?”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내 고개가 스스로 주억거리고 있었다.
“제가 감히 주인님의 도덕관에 대해 뭐라고 할 자격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하지만 요안나가 슬퍼하는 건 저도 원치 않아요. 주인님이 슬퍼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슬픔을 주고 있잖아요, 라고... 말할 뻔 했지만 간신히 말을 삼켰다. 나에게 그녀를 슬프게 할 권리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아.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그럼, 이러면 어떨까요?”
나와 요안나 선생님이 묻는 눈으로 바라보자 이브 씨는 우리 두 사람을 각각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요안나가 저를 인정만 한다면, 제가 요안나를 요안나가 아니고 요안나 님으로 부르는 거 말이에요.”
?!
“그 말은...”
요안나 선생님마저도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녀에게 물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심지어 ‘내가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당당함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얘기하는 그런 자세였다.
“주인님. 제가 요안나 님을 여주인님(mistress)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말에 복종할게요. 그리고 요안나 님 앞에서는 허락 없이 주인님을 탐하지 않고, 주인님의 명령과 상충되지 않는 한 여주인님의 명령을 잘 들을게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요안나 선생님도, 멍한 눈으로 이브 씨를 바라보다가, 서로를 돌아보다가 할 뿐이었다.
‘띠링!’
<감정 동조(S)의 근원 스킬인 공감이 발동합니다.>
아. 이런 게 공감인가. 분명 나는 내 자신으로 있었다. 내 마음은, 상황에 당혹하고, 선생님의 반응이 두려운, 내 마음 그대로였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나는 내 감정이 아니지만 내 감정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이브 씨의 감정인가.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감정에 이름을 붙이려고 들지 마십시오.>
왜?
<어떤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알기는 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다는 것은 뭔가를 익숙한 것으로 잘라서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이라면 왜 그것이 위험한 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마법사들만이 알 수 있는 거다. 하나의 감정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 우리가 ‘미움’이라고 이름붙이는 감정이 순도 10할의 미움인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증오라고 불러야겠지...) 아. 그래서.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감정이 단순한 딱지붙은 것들로 구분되어버린다는 말이구나.
이브 씨의 마음은 복잡했다. 나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이름붙여야 할 감정은, 그녀의 욕구 – 애정과 존경심과 성욕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에 크게 영향받고 있었다. 그리고, 꽤 큰 비율로 두려움이 있었다. 두려움... 아. 아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나를 버리려 들면 죽어버리겠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와 반대로, 아까 ‘시스템’이 ‘중심 이동’이라는 ‘디버프’가 걸렸다고 설명했던 것처럼, 그녀에겐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자존감’이 없었다.
‘냉철’의 도움으로 나는 그 감정들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내 마음의 일부로 감각한 이브 씨의 감정들을 살펴보는 동안, 요안나 선생님은 잠시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물었다.
“그럼, 기리인의 말을 잘 들을 거야? 하지 말라는 행동 하지 않고,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야?”
“응. 아, 아니, 네... 여주인님.”
“자세가 의심스럽잖아. 지금 순간을 잠시 모면하기 위해 그저 복종하는 척만 한다면 난 반대할 거야. 네가 원해서 하는 거잖아. 난, 이브 니가 진심으로 그 길을 택하길 바래.”
이브 씨는, 잠시 입술을 이빨로 깨물었다가... 곧,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황제 폐하 앞에서나 할 자세였다.
“주인님, 그리고 여주인님. 앞으로 두 분의 명령에 복종하며 두 분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기리인을 나에게서 뺏아가지 않을 거야?”
“제가 어찌 감히...”
“다음. 이 상태가 영원한 것이 아니고, 니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게 되면 되돌리겠다는 데, 즉 한시적인 주종관계라는데 동의해.”
“주인님, 그건...”
“기리인, 너도 동의하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제 의사와는 관계 없이 제가 이브 씨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확정적인 건가요...?”
“기리인.”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아까처럼 어두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너를 알아. 그만큼 너와 오래 지냈잖아. 멍청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짜증을 내지만, 너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야. 남을 이용하지 못하고, 공정하게 대하려고, 도우려고 하지. 그런 너니까, 지금 너는 이브 씨를 받아들여야겠다고 어느 정도는 생각하고 있을 거야.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서 앞으로는 일어나지 않게끔 조심해야겠다는 마음도 있을 거고.”
부정해봐야 소용없다. 날카로울 때의 선생님의 관찰력은 어설픈 부정 따위가 먹힐 게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한숨을 내쉬고, 요안나 선생님과, 이브 씨 모두에게 말했다.
“지금은 이브 씨가 지금의 상태를 더 행복하게 느낀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브 씨를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이브 씨를 지금의 상태에 두고 연구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피해자가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런 현상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나는지 알아야 할 필요도 있다는 데 동의하고요.”
두 사람은 내 말을 재촉하려는 태도 없이, 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그리고 한 사람은 무릎꿇은 채, 일어선 채인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제 자신입니다.”
“주인님 자신이요?”
“제가 이 관계를 유지하기로, 이브 씨가 요안나 선생님 역시 주인님으로 모시는 것에 동의하는 조건 하에 유지하기로 하는 게... 실은 내 마음 속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가 눈감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불리한 처지에 처한 이브 씨를 이용하려 드는 게 아닌가? 설령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저는 항상 그런 의심을 하게 될 거에요. 그게 겁나고, 그래서 제 자신을 온전히 믿지 못하겠어요.”
‘띠링!’
<감정 동조(S)가 성공적으로 발동하였습니다.>
뭐?! 두 사람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브. 어때? 이게 우리가 반한 남자야.”
“이런 일이 없었어도 주인님은 언젠가 제게서 ‘주인님’이라는 말을 끌어내셨을 것만 같아요.”
“어쨌든, 이브. 동의하는 거지?”
이브 씨는 다시금 요안나 선생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여주인님. 앞으로 주인님과 여주인님의 말에 복종하겠습니다.”
대체 왜... 이봐, ‘시스템’.
<방금 막 말이 당신의 진심 아니었습니까? 요안나와 이브를 아끼는.>
아니, 그건 그렇지만...
<진심은 통합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감정이, 두 사람을 아끼는 당신의 진심에 감응해서 변화한 겁니다. 어쨌든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낸 것 같군요.>
“자, 그럼, 기리인. 본채에 저녁 먹으러 가자.”
“그래요, 주인님. 아, 오늘 밤은 저희 집에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여주인님도 함께요.”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능 101이고 매력 100이고 무슨 소용이랴. 저 여자분들 앞에서는 이길 수가 없는데 말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밤에는 씬이 나옵니다.
정말 간만에 씬이네요.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cacao99 님,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어... 다음 장면이 싫으신 건가요...?;;
스키테 님 // 어쩌면 이게 기리인에게 주어지는 진짜 보상일지도요? ㅎㅎ
JuSbSk 님 // 좋은 관점이세요. 일단 요안나에 대해서는 아직 풀어낼 내용이 더 있으니 계속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