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5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황제 폐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형님. 기리인이 많이 힘들거라는 걸요. 아직 스물도 안 된 그에게 한 영지의 영주를 맡기는 건 너무나 큰 짐이지요. 더더군다나 우정으로 대하는 친구에게는 할 짓은 아니지요. 그러니, 제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당신을 미워할 수가 없어, 황제 폐하. 그냥 ‘명이다’라고 하고 시켜도 될텐데 말이지. 부담이야 신하가 지건 말건. 그게 철혈의 군주이고, 당신에게도 그 철혈의 스탯이 85나 있잖아. 하지만 그렇게 하질 않지.
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폐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 포상은 기리인에게 전혀 포상이 아닐 겁니다. 그렇지, 기리인? 너는 지금 학술 연구 때문에 제도에 있어야 하잖아.”
기억해주시다니.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 그러니, 만약 너에게 영지를 주면, 지금 마땅한 대리인도 없는 너는 내려가서 그 영지를 다스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영지의 온갖 은원관계에 휘말려들어, 애초의 목적은 잊고, 하루하루 지내기에 바쁠 것이다. 그렇게 지방 영지의 백작으로 삶을 마치겠지.”
“신랄하시군요, 폐하.”
이 정도의 소리는 해도 괜찮은 사이가 됐다. 폐하는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 아니냐. 단지, 그게 몇 배로 커졌다는 것뿐이지. 아무튼, 그래서 말이다. 내가 친구에게 그런 보상을 줄 수는 없지 않겠냐.”
“그럼 폐하께서 생각하신 방안은 무엇인지?”
폐하는 잠시 턱을 긁으며 말을 정리하는 듯 하더니, 곧 말을 이었다.
“기리인. 나는 이 나라가 장기적으로는, 3대공의 힘이 다소 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은 나라는 황제 아래 세 왕이 있는 거나 다름없기에, 사실 제국은 그저 잘 맞지 않는 조각들을 억지로 맞춰놓은 거나 다름없지. 이번 반란도 그 약한 고리가 다시 드러난 것이고, 그럼에도 내가 융파트를 완전히 징치하지 못하는 것 역시, 황제의 지배력의 한계를 보여준 것 아니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폐하는 일어서서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래서, 기리인. 나는 나의 사람들로 영지를 채우려고 한다.”
“...저는 이름만 빌려주는 셈이군요.”
허수아비나 꼭두각시라고 하고 싶었다. 그게 더 본질에 정확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폐하가 마음상해 하겠지.
“당분간은 그렇지.”
“당분간은?”
“그래. 기리인. 나는 너에게 뫼르말 영지를 줄 것이다. 이것은 황제로서의 약속이다. 너는 나의 친구이고, 나의 뜻이 삿되지 않다는 것을 알아줄 테니까. 그렇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폐하.”
“그래. 그러니까, 너는 앞으로 당분간 제도에서 거주하는 거다. 나를 도우면서, 연구도 하면서 말이다. 연구 때문에 영지에는 대리인을 파견한다고 공표하고. 대리인의 인선은 내가 도와주마. 그렇게, 한 5년에서 10년 정도 지내다 보면... 여러 경우가 있지 않겠냐? 일이 잘 풀려서 니가 더 높은 작위를 얻을 수도 있겠고, 또는 너의 바람대로 마법을 회복해서 마법사가 되어 그 쪽으로 갈 수도 있겠고, 아니면... 뭐, 이도저도 안 되면 언제든 내려갈 영지가 생긴 것 아니냐.”
그 말은 맞는 것 같긴 하지만... 에아임 형이 끼어들었다.
“하오나 폐하. 송구하오나 폐하께서는 제가 처음 이야기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사옵니다.”
폐하는 약간은 허를 찔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리인은 그 모든 것에 현명히 대처하고, 그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심지어는 자신의 편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만, 아무리 해도 친구를 이용하려 든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겠지요. 대신에 뫼르말 영지에서 걷어지는 10년간의 세금을 고스란히 그에게 줄 작정입니다만...”
“진심이십니까, 폐하?”
형이 놀라서 소리를 쳤다. 나 역시도 입을 쩍 벌리고 폐하의 앞에서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시골 영지라 해도 백작령이다. 1년에 걷히는 세금은 못해도 금화 몇천 개의 단위가 될 것이다.
“진심입니다. 친구에게 상이랍시고 짐을 떠넘기는데, 보상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돈으로나마 보상하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엔 너무 큰 금액이 아닐까 합니다만...”
“어쨌든. 돈을 줄테니 내 말대로 해 달라, 이런 것은 아니다, 기리인. 그저...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그래서 너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 나를 도와다오. 황제로서 약속하겠다. 네가 나에게 주는 우정과 신뢰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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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가온 폐하의 손에는, 어제 아침에 폐하가 황태후 마마와 재상에게서 인계받은 것과 비슷한, 고색창연한 쇠사슬에 달린 보석 박힌 열쇠가 걸려 있었다. 뫼르말 백작령, 아니, 지금 순간부터 모스 백작령이라고 불릴 그 곳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도시의 열쇠>였다.
“일어서게, 백작.”
나는 얘기 들은 대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일어났다. 폐하는 그런 나에게 그 열쇠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폐하는 두 팔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셨다. 그 동안 드르연 경이 말했다.
“모스 백작은, 선황제 폐하의 명과 유언에 의해 제도에서 폐하를 도와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또한, 그는 대신전과 그랜드 아카데미, 그리고 제국 대학과 연합하여 마법적인 연구를 진행해야 할 책무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황제 폐하께서는 모스 백작에게 적절한 대리인을 임명하여 영지를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 자리로 돌아와 린베크 아버님 옆에 서서, 나는, 눈으로만, 폐하의 뒤쪽에 서 있는, 어전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되는 고귀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누가 봐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파라 융파트 공작. 썩 흥미 없어 보이는 황실 마법사 오클리프 엔데 경. 무덤덤한 표정인, 비쩍 마른 체형의 제국 재상.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나스프 공작. 공작님의 속내는 여전히 읽기 어려웠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길을 의식한 그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나는 아주 작은 동작으로 목례했다.
있다가 그의 딸을 만나야 할 텐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조치의 의미를 모르는 자가 저 뒤에 서 있을 리는 없을 것이고, 폐하의 의도는 명명백백히 전달되었는데. 그리고 그 의도에 가장 영향받을 사람이 바로 나스프 공작일 것인데.
“모스 백작님에게 또 하나의 포상이 있습니다. 그가 이미 백작위에 올랐음에도 제도에서 마땅한 숙소를 구하지 못하여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황태후 마마께서 그를 안쓰럽게 여겨, 제도의 적절한 주택을 구하여 그에게 포상하기로 하셨습니다.”
뭐라고?! 이건 들은 적 없는데. 집이라니? 대체 어디에 무슨 집을? 집이 생기면 고용인들도 둬야 할텐데, 어떻게... 아니. 그러면 이사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이어, 다음 포상을 실시하겠습니다. 기병사령관 다르임 로그푸스, 보병사령관 사르임 거프. 상공부 장관 렛지 카라. 세 사람은 폐하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아직 행사가 끝나려면 멀었다. 정신차리자. 이제는 행동에 더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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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형과 나는 사무실에 비치된 가죽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의 1급 수사기사 사무실은 꽤나 넓고 회의 겸 손님 접대를 위한 소파마저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 그 소파는 우리 둘이 널부러져 있기 좋은 공간이었지만.
“고생하셨어요, 형. 어제부터 잠도 못 주무시고...”
“그러게. 나 진짜 고생했다. 그치.”
큭큭거리던 형은, 비서 역할의 하급 수사기사가 찻잔을 들고 들어오자 자연스러운 태도로 “어, 여기 탁자에 놔 줘.”하고 말했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목례하고 나가자, 형은 찻잔에는 관심조차도 두지 않은 채, 말했다.
“기리인. 괜찮니?”
“뭐가요?”
“너는 눈치빠르니까 알겠지. 아까 웅성거리던 사람들 말이다.”
“형이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알겠어요.”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보다 보니, 이제는 모든 문장을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때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부르기 마련이라는 격언을 알지. 형은 네가 그렇게 될까봐 걱정이다. 귀족가는 지저분하고 무서운 곳이야. 가십과 헛소문, 악의어린 비난들이 오가고, 허구가 한 순간에 진실이 되지. 그 사이에서 사람들은 신참 주제에 찬란히 빛나는 너를 시샘할 거다. 시기하고, 깎아내리려 들 거야.”
언제나, 형은 나를 진짜로 걱정해 준다. 친형처럼 말이다. 아니, 진짜 친형이라도 지금 에아임 형만큼은 못하지 않을까. 나는 짐짓 웃어보였다.
“걱정마세요, 형. 생각보다 저를 지지해 줄 사람들이 많아요. 적어도 아버님과 형님들은 제 편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이럴 때는 화제를 얼른 돌려버리자.
“그보다, 강제로 이사하게 생겼어요. 형 집이 좋았는데. 형수님도, 뢰다도, 오레즈 할아버지와 에노 할머니도 정말 좋았는데.”
형은 그러게, 라고 말했다. 별로 슬프지 않은 것 같아 나는 약간 형의 눈치를 보았는데, 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조금 더 기다려봐.”
============================ 작품 후기 ============================
다음 편부터는 이제 무도회가 시작되겠군요.
꾸준히 댓글 달아주시던 분들이 안 보이셔서 걱정 반 상심 반입니다.
혹시나 떠나가신 건 아닌가 싶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건 좀 더 재밌는 글을 쓰려 노력하겠습니다. 그 뿐일 것 같네요.
스키테 님 // 기리인은 일단 잘 생겨서 정치 세계에서도 점수를 크게 먹고 들어갈 것 같습니다 ㅎㅎ;;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