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56화 (256/309)

00256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형 방에서 차 한잔 얻어마시고 나는 궁내부로 가 행사가 끝난 드르연 경을 만나야 했다. 큰 일을 치렀으면 좀 늘어질 법도 한데, 드르연 경은 아까 폐하의 앞에서 식을 진행할 때나, 지금 내 앞에서나 같은 모습이었다. 스스로 조심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궁내부의 전임 장관이 거하게 사고를 쳤으니까... 어쨌건, 저런 한결같은 태도는 배울 점이 있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나 스스로도 몸가짐을 바로 했다.

“모스 백작님. 우선 여기 사인을 좀 해 주십시오.”

드르연 경은 서랍에서 세 장의 서류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물론 꼼꼼하게 읽어봐야겠지요?”

“하하, 아뇨. 이건 요식행위입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나를 보며 드르연 경은 미소지으며 설명했다.

“저희 궁내부가 귀족의 계승이나 결혼 등을 다룬다지만, 사실 그건 황제 폐하의 뜻이 가장 중요하지요. 폐하께서 이미 결정을 내리신 것을 저희 궁내부는 따를 뿐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만인 앞에서 모스 백작님에게 영지를 수여하셨으니, 다른 건 중요할 리 없지요. 이건 계승 확인서, 이건 반역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서, 이건 세입세출 정리표입니다.”

이름만으로는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 서류이지만, 드르연 경의 말이 그럴싸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시스템이 <보통의 공문서입니다. 악한 의도 등은 없어 보입니다.>라고 말해줘서 나는 그대로 사인했다. 그러고 보니, 시스템은 점점 내가 직접 명시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내가 ‘정보 확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미리 공문서의 정보를 확인해 준 거다. 정말 편리하지만 그렇기에 좀 무섭기도 하다.

‘띠링!’

<본 시스템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포를 누르는 건 이성이라던가. 이성적으로, 시스템이 나에게 해꼬지를 하려 들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 믿자, 라고 생각한 결론이었다.

<당신답군요.>

그렇게 이야기 할 줄 알았다, 라고 생각한 걸 보면 나도 시스템에 대해 꽤 익숙해진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각각의 서류에 사인을 마쳤고, 드르연 경은 마법적 효과가 있는 도장을 찍더니 서류를 잘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셔야 할 내용들을 말씀드리려고 백작님을 이곳에 모셨습니다. 직접 폐하께서 설명하실 수도 있겠지만, 폐하께서는 오늘 하루종일 일정이 있으십니다. 그나마 저를 보내서 백작님에게 직접 설명하게 하신 것도 폐하께서 큰 배려를 하신 거지요.”

“압니다.”

내 간단한 대답에 드르연 경은 미소를 지었다.

“우선, 모스 백작령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아. 갑자기. 몇 달 전으로 생각이 훌쩍 돌아갔다. 선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사교계에 나서 무도회에 참가해, 그 알리시아 뫼르말 양과 춤을 추고, 그녀에게 뫼르말 영지에 대해 들었던 그 순간이 말이다. 그 때는 그냥, 퀘스트를 깨기 위한 일환이었는데. 이렇게 되돌아올 줄이야.

“대륙 동쪽이라 척박하고, 땅은 넓고, 사람은 많지 않고... 그나마 항구가 있고, 배를 만드는 장인들이 있고, 대균열에서 광물을 캐는 광부들이 있고... 그런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정확하십니다. 하지만 전략적인 중요성도 있지요.”

“남대륙과 소통하기 쉬운 항구라는 점이죠. 실제로 이번에 남대륙과의 연결이 발견되기도 했고. 남대륙에서 수입하는 곡물이 하역되는 항구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백작님의 대리인을, 백작님이 알고 믿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군사적인 능력이나 첩보수집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반역의 주병력은 융파트였지만 핵심이 되는 전력은 뫼르말 가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남대륙인들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들어왔고, 왜 반역을 하게 되었는가. 이 연결고리를 낱낱이 밝히지 않으면 바짝 마른 검불더미 옆에서 불장난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아주 위험한 상황인 거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침 시간에 맞게 왔군요. 들어오시지요.”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 중에 두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고...

“어? 마스 경!”

“백작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앞으로 성큼 걸어와 내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한 달 남짓 거의 붙어다니다시피 했던 사람인지라, 며칠만에 다시 보니 새삼 반가웠다. 옆에서 드르연 경이 말했다.

“이번에 모스 백작령에 영주 대리인을 보좌할 행정관으로 부임할 이트로프 마스 경입니다. 소개는 안 해드려도 되겠지만요.”

“정말입니까?”

마스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미관말직의 기사가 황제 폐하를 지근거리에서 뵙고, 친히 당부까지 들었지요. 모스 백작님을 잘 보좌해 달라고 말입니다. 기꺼이 그리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뭐라 할지 몰라 그저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나보다 근력이 우월할 것이 틀림없는 그는 그저 내 손을 너무 아프지 않게 마주쥐어올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 분은...”

“압니다. 에닌 경. 오랜만입니다.”

“기억해주시는군요. 반갑습니다.”

그의 손은 경력을 말해주듯 마스 경보다 조금 더 투박하고 두툼했다. 악수를 나누는 옆에서 드르연 경이 설명했다.

“에닌 루오프 경이 백작님의 영주 대리인이 되실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닌 경과는 함께 습격대에서 싸운 적도 있고, 게다가 다르임 형님과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삿된 마음을 먹거나 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낮겠지.

“믿어주십시오, 백작님. 백작님은 이번 전투에서 여러 번 저희들의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신뢰에는 신뢰를. 치르낙 대왕의 제1원칙이었다. 신뢰가 깨지면 그때 응징하더라도 일단은 믿어야 한다.

“믿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닌 경.”

그는 그 두툼한 손으로 내 손을 한 번 더 꼭 쥔 후 놓았다.

“마지막으로, 이 분은, 수사기사단에서 나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모스 백작님. 치메 에퀴즈 제국 2급 수사기사입니다.”

“2급이요? 2급이면 꽤나 높은 분 아닙니까? 그런 분이...”

“하하. 네. 백작님이 의문을 가지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실은 에아임 선배님의 명을 받고 내려갑니다.”

“형의 명령이요?”

“네. 수사기사단은 지금까지 제도에 치우쳐 있어, 각 영지의 정보를 얻는데 애로가 있었고, 그래서 대응이 늦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융파트 지부가 변심한 지부장 및 일부 간부들에 의해 농락당하면서, 수사기사단에서는 제대로 된 독립적인 거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게... 그 영지라는 거군요.”

‘내 영지’라고 말할 뻔 했던 나는 마지막 순간에 말을 바꿀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를 비롯해 여러 명이 수사기사단 모스 백작령 지부를 꾸리고, 사실상 수사기사단 제국 남부 지부로 활동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야 원. 이름만 모스 백작령이지 실은 황제 폐하의 직할령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군.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 중에서 이렇게나 잘도 쥐어짜내다니. 반발하는 마음이 들려 했지만, 그럴 이유가 없다. 게다가 세금 수입을 나에게 준다 했으니.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제가 세 분께 잘 부탁드려야 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새파랗게 어리고 아직 경험도 모자란 저를 아무쪼록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이 당황해하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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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형과 함께 이 문 앞에 섰었지. 하지만 형은 오늘 없다. 일이 너무 많아서 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거대한 문 앞에 혼자 서 있다. 챙겨온 황실 기사단의 예복을 입고 검은 망토까지 두르고 있지만 영 어색하기만 하다. 그때와 달리 문은 열려 있었다. 아무래도 할버드까지 든 경비병들이 있는 약간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장소이다 보니 사람들은 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백작님, 입장하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하자, 그들은 한 걸음 뒤로 비켜섰다. 내가 걸어들어가자 궁내부원이 크게 외쳤다.

“이번 전승 무도회의 주빈 중 한 명이시자, 최고 공훈의 주인공, 그 공훈으로 영지를 하사받으신, 모스 백작령의 기리인 모스 백작님이십니다!”

홀 안의 대화가 일시에 멎었다. 그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머리라도 긁고 싶다. 어색해보일테니 참자, 하고 생각하며 나는 짧게 심호흡한 후 홀 안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모스 백작!”

“백작님!”

“백작님! 이 쪽이요!”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이 우르르 내 쪽으로, 차마 마지막 체면 때문에 뛰지는 못하고, 빠른 속도로 우르르 걸어왔다. 뭐, 뭐야. 나는 그 기세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백작님! 꼭 뵙고 싶었습니다! 저는...”

“백작님, 이쪽은 제 여식인 에모라고...”

“백작님, 영지의 발전을 위해...”

수십명이 한 번에 먼저 이야기하려고 소란을 피웠다. 아아악!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 작품 후기 ============================

훌륭한 공직자는 공익을 어그러트리지 않으면서 사익도 충족시킨다고 하던가요? 요즘같이 정의와 공정이 필요한 세상에서야 그럴 수 없겠지만, 기리인에게 주어진 특혜는 동시에 중앙집권으로 가는 길이기도 한 게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 추, 코, 쿠 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대왕물개 님 // 암요.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지만 바람이 가만히 놔두질 않는 법이죠.

하이렌느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현실 파트는 몰입을 해친다는 지적이 있어서 비중을 많이 낮추려고 합니다. 나중에 왜 비중이 낮아졌는지에 대한 내용도 나오긴 할 겁니다 ㅎㅎ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전에는 저도 선작수 조회수 높이려고 안달했었는데... 이제는 쓰는 재미와 읽어주시는 분들이 달아주시는 코멘트를 보며 얻는 보람에 씁니다.

스키테 님 // 아, 이용권... 그렇겠군요. 그래도 어디 안 가니 이용권이 끝나더라도 나중에라도 꼭 돌아와주세요!

cacao99 님 // 늘 감사드립니다!

체크필통 님 // 이제 곧 캣파이트가 시작됩니다! (두둥!)

니코틴 님 // 오랜만입니다!

eastarea 님 // 늘 감사합니다! 이거 예전에 해축 볼 때 'ㅇㅇㅇ선수 출전 대기중' 이런 자막 보는 느낌인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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