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57화 (257/309)

00257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너무 많은 사람이 나에게 먼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와우와우와 하는 소리가 한참 지속되는데,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나마 마지막 선을 지키느라 나를 잡아당기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일 것만 같았다. 누가 나를 구원해 줄 사람도 없고 기미도 없어서 나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저, 여러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뚝. 모두가 나의 말에 집중한 나머지, 파티장의 거의 모든 말 소리가 뚝 하고 끊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악단이 연주하는 조용한 음악만이 잠시 흘렀다.

“죄송합니다. 저는 몸이 하나이고, 너무 많은 분들이 제게 말씀을 걸어주셔서 황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외람되지만, 저도 만나야 할 분들이 있고, 저라는 한 사람이 새로운 분들 모두와 친교를 맺기는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밤은 길고, 저 이외에도 주빈도 계시고 잠시 후에는 황제 폐하께서도 오실 테니까, 차근차근 이야기 나눠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의 떼고 수식어 빼고 말하면 : 나 니네 얘기 다 못 들어. 딴 놈들도 있는데 왜 이래. 나중에 내 용무 보고 차례차례 얘기해. 이렇게 매끄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건 물론...

<본 시스템의 도움 때문이지요.>

<고급 언변>, <유도>, <감정 동조> 등이 모두 발동했다는 메시지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곤란하다’는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내 약간은 당돌하고 무례한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남아있는 몇 사람 중에...

“허어, 언제 봐도 자네의 말솜씨는 대단하군.”

누군가 벌써 손에 잔을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어이쿠.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제국 3공작, 그나마 융파트가 현재 많이 쇠락하고, 무골인 북대공은 북부에서 내려오지 않고 큰아들만 보내다 보니, 이 자리에서 공작보다 높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공작이 말을 걸자 나에게 말을 거는 걸 포기하고 다들 흩어져갔다.

“나스프 공작님.”

“허허. 제국 역사상 자네처럼 빠르게 출세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전에 내 집에 와서 했던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지. 올해 시작할 때만 해도 평범한 평민이었던 사람이 어느새 영지까지 있는 계승 귀족이 되다니 말이야.”

저기에 무슨 말을 한들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나마 어렵지 않았던 것은 공작의 말이 결코 ‘벼락출세한 나를 비꼬는’ 의도가 없이 그저 순수한 감탄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네는 분명 무슨 일을 하든 능력을 발휘할 거라고 했던 말 기억나나?”

“기억합니다, 공작님.”

“어떤가. 내 사람 보는 눈도 이 정도면 꽤 쓸만하지 않나?”

껄껄거리며, 공작은 손에 든 샴페인 잔을 홀짝거렸다. 민망하기도 해서 나는 화제를 얼른 바꿔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작님.”

공작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고생은 무슨. 나야 따라다니면서 물주 노릇 한 것 뿐인데.”

내가 약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는 꽤 기분이 좋은 듯 계속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알지 않나. 폐하께서 나를 데려간 것은 자신의 옆에 묶어두고 감시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폐하의 영을 거부했다가는 의심이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는 셈이니 안 그럴 수도 없지.”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이라는 말은 삼켰다. 그리고 공작은 내가 삼킨 말을 이해하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나도 자네 덕분에 목숨을 건진 여러 사람 중 한 사람인 셈이지. 고맙네, 모스 백작.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하네.”

“무슨...”

“이 사람 보게. 모스 영지의 백작이라는 사람이 이웃이 누구인지도 몰라?”

아. 그렇지. 내... 영지는 특수 광물이나 농수산물을 공작령과 거래하지.

“제가 정신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리고 잘 부탁드린다는 말은 제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 잘 부탁드린다는 말 받아줄테니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게.”

“부탁이라 하심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따라간 내 시선의 끝에,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힐끔거리면서 내 쪽을 바라보던 아르논 양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르논 양은 최대한 화사하게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으윽. 나는 가지가지 한다, 는 마음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막둥이 딸 아빠는 딸의 애교에 약한 법이지. 게다가 딸이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생각이라면 더더욱 말이지.”

“네에?”

모르고 반문한 게 아니다! 진짜 그런 뜻으로 말한 거냐 하고 확인한 거다! 하지만 노회한 공작은 빙긋 웃으며, “그럼 들어주는 걸로 알겠네.” 하며 자리를 떴다. 아오. 저 아저씨. 진짜. 쉽지 않다, 쉽지 않아.

나는 지나가는 궁내부원에게서 샴페인 잔을 하나 받아들고 자리를 둘러보았다. 저번, 내가 처음 참석했던 무도회보다 두세 배는 큰 규모였다. 전승기념이라서 그런 걸까. 의미도 의미거니와, 그간 전쟁 관계로 잠시 중단되어 있던 사교계가 다시 시작한다는 신호 같은 장소라서 그런 걸까... 그리고 나처럼 예복 망토를 두른 군인들이 꽤 높은 비율로 보인다는 것도 저번과는 달랐다. 역시 전승 무도회라서 그렇구나.

공작이 떠나간 게 확실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나에게 다가오려고 시도했다. 아. 싫다. 형이라도 있었으면 형이 좀 도와줬을텐데. 아니면, 누구 아는 사람 없나. 이럴 때는 저번처럼 이브같은 황당한 소리 하는 사람이라도 한 사람 있으면 좋을...

눈이 딱 마주치고, 약간 어두운 색의 금발머리 그녀가, 그런대로 봐줄만한 드레스를 입긴 했지만 아무래도 수도의 고위 귀족들의 드레스보다는 약간은 빛이 바래보이는 차림의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기리인!”

이 자리에서 다른 경칭 없이 내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그녀가 나에게 다가온다. 수많은 악연이 있었지만, 그래도 끝이 좋은 추억이었던 그녀.

“리미.”

어느새 원진(圓陣)을 만들 기세이던 사람들을 솜씨좋게 뚫고 들어오며 리미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예의에 맞게 가볍게 무릎을 꿇으며 리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오랜만이야, 리미.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네. 편지는 자주 주고받았는데 얼굴 보는건 말야.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걸 축하해. 아, 최고 공훈을 세운 것도.”

“고마워.”

우리 둘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 그것도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본 사람들이 실망한 기색으로 원진을 스스로 풀었다.

“저기, 기리인. 좀 더 조용한 자리에 가서 이야기하지 않을래? 오랜만에 보는데.”

여전히 수가 얕은 리미였다. 나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기분나쁘지 않게 거절하고 싶어서였다.

“곧 황제 폐하께서 오셔. 그 근처에 있어야 할 것 같아.”

“히잉...”

걸맞지 않게 귀여운 소리를 내는 리미. 나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샴페인을 한 번 홀짝인 후, 리미에게 말했다.

“어떻게 지냈니?”

“어... 예상가능한 뻔한 일상이지 뭐. 왈츠 강습, 수예 강습, 화술, 에티켓, 자세... 이런 거 배우고, 사교계의 작은 모임들에 나가서 얼굴 알리고.”

리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힘들었겠구나.”

“나야 뭐... 나보다 울 아빠가 힘들지...”

아. 그렇겠구나. 아무리 백작이고 북대공의 제일가는 가신이라 해도 저 모든 비용을 대려면 힘들겠지. 그러고 보니, 새삼 리미가 예전보다는 작아 보였다. 내가 컸다는 게 아니라... 아카데미 시절의, ‘아카데미의 여왕’ 리미는, 언제나 어떤 오오라 같은 것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그 자신감이 근거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그녀가 항상 ‘나는 대단한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그 자신감이 뿜어내는 오오라는 그녀를 더 크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내가 전쟁터에서 리미의 편지를 받았을 때 잠시 들었던 생각대로, 리미는 자신보다 훨씬 대단한 가문, 재산, 학력을 뽐내는 레이디들이 넘치는 제도에서 그 자신감을 상당부분 잃은 상태였다. 몸에 밴 단련 덕택에 기품있는 레이디로서의 자세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나는, 지난 무도회에서 봤던, 알리시아 뫼르말 양을 떠올렸다. 그녀도 그럭저럭 하는 마법사였지. 그것도 제도 아카데미 출신의. 그런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제도 아카데미도 아니고 북부 아카데미 출신인 리미가 마법사라고 해서 사교계에서 도움이 될 리도 없을 테고.

약간 처진듯해 보이기도 하는 그 어깨가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때, 악단의 음악이 순간적으로 멎고, 나팔수가 짧게 나팔을 불었다. 이크. 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고, 리미도 눈치빠르게 치맛자락을 맵시있게 펼치며 무릎을 꿇었다.

“제국 모든 영토의 정당한 지배자이시며, 대륙 모든 인간과 생물들의 주재자이시며, 신앙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 작품 후기 ============================

아르논 : 가랏, 아빠몬!

리미 : 어딜! [친분 공격]이다!

기리인 : 작작들 좀 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추/코/쿠 주시는 여러분들께 무한감사 드립니다.

니코틴 님 // 앞으로도 가끔씩이라도 생존신고 부탁드려요. 간만에 뵈니 너무 반갑네요.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스키테 님 // 사실 굴리자면 얼마든지 굴릴 수 있죠. 아줌마 부대를 출동시킨다면... 귀족가 아줌마들이 제일 무서우니까...ㅋㅋ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정신나간 덧글'이 무엇이었을지 엄청 궁금해지는데요 ㅎㅎ;;;

유한도전 님 // 이 정도면 캣파이트의 서막 정도는 되겠지요? ㅎㅎ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