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0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하여 귀하신 분의 성함을 잘 모르는 결례를...”
“어머, 아니어요, 백작님. 제가 너무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죠. 오히려 결례는 제가 저지른 셈이니 마음 놓으셔요.”
뭐야, 이 여자. 어리게 생겼는데, 말투는 또 왜 저렇게 특이해. 아니... 어리지 않다. 오히려, 얼굴을 보니 좀 나이가 있다고 봐야 하나. 그녀는 파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어리지 않다고 생각이 든 이유는... 그녀의 표정이다. 파란 눈에 어린 흥미, 그리고 입가에 있는 자신만만한 미소. 대개 나 정도의 나이의 사람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다 해도, 거기에는 일정부분 치기가 어려 있다. 하지만 이 여자의 표정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거물이 지을법한 표정이었다. 너무 세게 나가면 안 되겠다.
“아닙니다.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좋은 법이지요. 레이디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으실지?
“에스타크 레펠 이라고 불러주셔요.”
말투는 차치하고, 여자 이름치고는 좀 무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정보 확인’.
‘띠링!’
<경고!>
<정보 확인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뭐?!
<대응에 극도로 주의하기 바랍니다. 당신이 쉬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전력을 다하기 바랍니다.>
시스템을 만난 이래로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나는 대륙에 내로라 하는 사람은 거의 만나본 사람인데 말이다!
“아...”
내가 자못 당황해하고 있자니, 에스타크 양은... 아니, 에스타크 ‘씨’는, 아까보다 더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셔요?”
“아, 아뇨... 그게...”
순간.
주변의 소리가 갑자기 확 줄었다. 갑자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한 3백 걸음은 멀어진 듯한, 저 멀리서 나는 소리처럼 말이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은 아까와 조금도 다름없이, 춤추고, 대화하고, 웃고 있었다.
나는 마법사였다. 신비한 현상을 존중하게끔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고 배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 앞에 앉은, 에스타크 레펠 이라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만 똑바로.
“호오.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르시군요.”
“누구...신지...”
여전히, 황제 폐하가 글월 좀 읽는 신동을 귀엽게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측해 보셔요. 단서는 이미 내 말에 다 들어 있어요.”
저런 강대한 존재가 나에게 호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적어도 악의를 가진 것 같지는 않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시스템은 어떤 인간이나 물건에 대해서도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시스템조차도, 내 주머니 속에 금화를 만들어 넣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그 시스템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할 강력한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즉. 인간이 아니라고 봐야 하겠지. 프그단 사건 이전에라면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겠지만, 프그단의 그레이 엘프 일족을 만나고 나서 나는 세상에는 아직도 이종족이 많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중에...
잠깐만.
에스타크 레펠.
레펠 에스타크(lepel estak).
레펠레스타크...?
...!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들었지만, 갑자기 내 어깨를 보이지 않는 손이 짓누르듯,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역시, 지혜로운 인간이군.”
말투가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 어울리고도 남는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인간 기리인 모스. 놀라지 마라. 나에게 그대를 해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그러시겠지요... 마음만 먹으신다면, 제 목숨을 취하시는 것은 당신께는 아무 일도 아닐 테니까요. 강대한 드래곤이시여.”
내 눈 앞에 있는 것은, 약간의 장난기마저 내비치듯 자신감있는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고 그 시스템조차 정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은... 신화 속의 존재, 치르낙 대왕과 협력하여 이 제국을 태어나게 한, 푸른 산맥을 마치 케이크를 잘라 떠내듯 절단해 황도를 뚫어준 존재. 그러나 그 이후 동면하고 있어, 백색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북부군을 주둔하게 만든 드래곤. 르플레스탁이었다.
르플레스탁은 빙긋이 웃었다.
“재미있군. 너는 400년 전의 치르낙을 떠오르게 하는구나.”
“대왕 말씀이십니까... 어떤 점이...”
“지금 너처럼, 치르낙도 나와 대화를 하려 들었지. 다른 이들이 엎드리기 바빴는데 말이다.”
르플레스탁은 곧바로 나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오해는 말도록. 나는 그것을 불쾌히 여긴 적이 없다. 지성을 지닌 존재라면 무릇 대화를 즐기는 법. 나에게 있어 마지막 대화가 2백년도 더 전의 일이라는 걸 아느냐? 기나긴 꿈의 끝에 깨어난 후, 나의 정체를 안 채로 대화를 하자고 하는 것이 그대이니라. 나는 그 점이 매우 기껍구나.”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콧김만으로도 나를 죽일 수 있을 존재가 나를 예쁘게 봐 주시는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나셨다면...”
그녀는 명백히 대화가 즐겁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얼마 전 잠에서 깨어났다.”
내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을까, 르플레스탁은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나는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생각이 없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이제 와서 세상에 개입하기도 싫거니와, 나는 지금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내가 깨어나 세상에 정체를 드러내게 되면 많은 것이 변화하지 않겠느냐.”
“그렇겠지요...”
“그래. 게다가, 지금 그런대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을 건드려 트리클의 천칭에 오르고 싶지는 않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모습을 바꾸며 인간 세상을 좀 더 살펴볼 요량이다.”
“그러시군요...”
르플레스탁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는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났는지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
“여쭤봤다가 기분나쁘실까봐 자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는 호탕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하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내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 온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과연 그대가 수많은 이들이 기다리는 인물이 맞는가가 궁금했다.”
“...네?”
저를 수많은 이들이 기다린다니요...?
“때가 되기 전에는 나조차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인간 기리인 모스. 그대라는 존재는, 그리고 그대가 겪는 수많은 일들은 어느 하나 우연의 산물인 것이 없다. 그대가 여기 있는 것은 수많은 인과의 결과인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살아온 세월이 길지는 않겠지만, 그대에게도 분명 그러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흘러가는 다른 순간과 다를바 없는 한 순간이지만, 나중에 그 순간이 과거로 흘러간 오랜 후에 돌이켜봤을 때 그 순간이 결정적이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순간 말이다.”
나는 요안나 선생님의 손수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대라는 존재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그 중 일부는 만나본 모양이더구나.”
“혹시, 그레이 엘프들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내 물음에 르플레스탁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외에도 한 종족이 접촉을 제의해 오긴 했습니다.”
“그래. 인간 기리인 모스. 나는 자네에게 무엇이든 강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드래곤의 권유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저,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강대한 존재께서는 권유라고 말씀하시지만...”
“자네에게는 그것이 명령이라는 말이지?”
“네, 송구하오나...”
다시 드래곤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 배짱까지. 정말 치르낙을 생각하게 하는구나. 걱정 말거라, 젊은 인간이여. 권유라는 말조차도 부담스럽거든 조언이라고 받아들이거라.”
“네,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대가 어떤 길을 택하든, 그것은 그대에게 보장된 권리이다. 허나 이종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하는 길을 택한다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그리 하겠습니다.”
“즉답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미 결심한 모양이구나. 예언에 대해 그대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예언이라 하셨습니까.”
“말했듯이,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드래곤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감히 내가 불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조금 전에 두 가지 이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아, 그래. 두 번째 이유는, 네가 마나를 직접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르플레스탁은 웃었다.
“알아채서 놀라운 게냐?”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이 한두 명 있는데, 그들도 마나를 이용해 레일을 만든다고만 알고 있을 뿐, 제 능력의 본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는데...”
============================ 작품 후기 ============================
??? : (드래곤인 내가 나타났는데) 지금, 캣파이트 할 땝니까?
예상하신 분이 있으실지 의문입니다. 하하.
아, 물론, 캣파이트는 캣파이트대로 진행될 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 추, 코, 쿠 주시는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전설의 출현! (두둥!)
유한도전 님 // 이렇게 또 갑자기 전개에 풀악셀 밟는 뜬금포를...! ㅎㅎ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