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64화 (264/309)

00264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뻔뻔하게 말했다.

“어찌, 전쟁 따위에 참여하고 하지 않고로 고귀함을 가르겠는가. 고귀한 자는 스스로 고귀할 따름이다. 스스로 무엇을 하여 고귀함을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진정으로 고귀한 존재 아니겠는가.”

아. 역겹다. 하지만 이곳은 파티장이니, 소란을 만들지 말자. 나는 여전히 리미의 손을 꼭 잡은 채, 어디까지나 웃으며 말했다.

“그러하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그리고 나는 리미와 함께 뒤돌아 가려 했다. 그 때, 후작의 비아냥을 듬뿍 담은 목소리가 내 등뒤로 들려왔다.

“흥. 역시 천한 것들은 좋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 하긴 개돼지나 다름없는 것들에게서 어찌 고귀한 자가 나올까.”

우뚝. 나는 발을 멈추어섰다.

“기리인...”

리미가 나를 걱정스럽게 불렀지만,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냉철은 분노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분노하지 않는 자는 그저 손쉬운 먹잇감이 될 뿐. 분노할 때는 분노해야 한다. 분노하되, 지극히 냉정하게 분노해야 한다. 그것이 냉철이다.

‘띠링!’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보좌하겠습니다.>

내가 리미의 손을 잡고 돌아서자, 후작은 여전히 한 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그리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한 끝에 나는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정했다.

“궁금하군요.”

“무엇이 말인가.”

<유도가 발동됩니다.>

“제가 만난 고귀한 분들, 예를 들면 북대공님이나, 나스프 공작님, 로그푸스 변경백님 등은 모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던데요.”

차마, ‘그 분들이 전부 틀려먹었다’라고 면전에서 주장할 수는 없었던지,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고 있었다. 화날 때일수록 차갑게, 웃으면서.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고귀한 혈통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고귀하다. 그러므로 나의 고귀함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뭔가를 할 필요는 없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지요?”

“당연하다. 그것이 운이 좋아 신분이 오른 이와 진정한 귀족을 가르는 것이다.”

걸려들었군.

“그렇다는데요? 레이디 아르논.”

흠칫 하고 놀라는 두 뚱땡이 부녀의 뒤쪽에서 아르논 양이 나타났다.

“아, 이거, 오랜만입니다, 영애님...”

“반갑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후작님. 어찌 그런 소리를 대놓고 하실 수가 있어요? 고귀한 자는 고귀한 임무를 다함으로서 진정 고귀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약간씩 땀을 흘리기 시작하면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논지를 굽히지 않았다.

“영애님 같은 분들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자들이, 고귀한 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할까 저어하여...”

“먹칠은 후작님 당신이 스스로의 얼굴에 하고 있는 게 먹칠이죠.”

“뭐라고?”

신랄함을 가득 담은 내 말에 후작이 발끈했다.

“신분 낮은 자를 ‘개돼지’라는 말까지 쓰며 조롱한 것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 폭언에 의한 악행은 신의 천칭이 다스리실 일이겠죠. 나는 당신이 당신의 멍청함으로 그 ‘고귀하다는’ 신분을 더럽히고 있다는 걸 지적하는 겁니다.”

“이 놈이...”

상대를 말로 후벼팔 때도, 어디까지나 웃으면서.

“친구와 같이 있는 나를 보고서도, 자신의 딸을 끌고 와서, 적당히 위협하고 얼러서 친구를 쫓아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당신의 그 멍청함. 그리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나와 친구를 싸잡아 개돼지나 다름없다고 비난한 그 멍청함. 제가 만난 고귀한 분들은 모두 지혜롭고 언변이 출중하신 분들이었는데, 이거 참 신기하군요.”

“이노옴!”

차마 마지막 체면 때문이었는지 그 소리는 크지 않았다. 화를 억지로 참는지, 그 두툼한 턱살과 볼살에 얹힌 수염이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과일 한 상자가 있으면 그 속에는 썩은 과일도 있기 마련이지요. 그 썩은 과일 하나가, 하지만 다른 과일들까지 함께 썩게 만드는 법입니다. 그러니, 썩은 과일은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얼른 버려야죠. 더 슬픈 건... 썩은 과일이 자신이 썩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때가 아닐까요?”

머리가 있다면 내가 비유로 자신을 야유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겠지. 후작의 얼굴은 저러다가 뻥, 하고 터져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말조차 못하고 있는 후작을 보며 나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입으로만, 독설을 날렸다.

“그렇게 자신이 썩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느니,” 리미의 손을 들어보이며, “저는 차라리 친구와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을 택하겠습니다. 같이 있다가는 썩는 것 뿐만이 아니라 멍청함이 옮을까봐 두렵군요.”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작자가... 감히 후작을 모독해...?”

그리고 그게 결정타지, 이 멍청한 작자야.

“고귀함에 먹칠을 하여 모독한 것은 그대인 것 같습니다만.”

방금까지 아르논과 춤을 춘 게 누구였을까? 당연히 근처에 있었겠지. 이런 소란이 있는데 우리 쪽을 보는 사람이 없을 리 없고, 그 중에 안 계셨을 리 없지. 황제 폐하께서 굳은 얼굴로 이 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폐, 폐하...”

순식간에 시뻘갰던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이런 작자들의 특징이 대부분 그러하지. 더 높은 권위 앞에서 한없이 낮아지는. 병신같은 작자. 자신의 고귀함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귀한 거라고? 그것 자체가, 당신은 자신의 신분 외에는 자신을 내세울 게 없다는 빈곤함을 드러내는 거야.

“실망입니다, 후작. 어찌 대왕님 이래 이어져 온, ‘고귀한 의무’에 먹칠을 하려 하십니까. 스스로를 희생하여 모두를 인도하는 것이 고귀한 자의 의무이거늘.”

“폐하, 하오나...”

뭐라 말하려 하는 후작의 말을 폐하는 명검으로 과일 자르듯 자르고 들어갔다.

“아니, 조용히 하세요. 후작은 나를 매우 화나게 했습니다.”

“폐하! 하오나, 고귀한 자에게는...”

“후작이 그런 썩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화를 내어야 할 일이지만, 내가 화가 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폐하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내 어깨에 친밀하게 팔을 둘렀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작의 원래 단추구멍만했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뜨여 있었다.

“모스 백작은 내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당신은 내 친구와 친구의 친구를 모욕했습니다. 후작. 나는 친우의 모욕에 대해 어찌 대해야 할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후작은, “아, 하하, 죄, 죄송합니다, 폐하, 소신은 이만...!” 이런 말인 것 같은 말을 더듬거리며 남기고는 딸의 손목을 낚아챈 채 뒷걸음질쳐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우리는 모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기리인, 미안하다.”

“폐하, 폐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폐하를 달랬지만 폐하는 여전히 뭐 씹은 듯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리인. 네가 아까 얘기했던 썩은 과일 비유가 진짜 잘 어울린다. 귀족 사회가 그래. 적어도, 내가 어전회의에서 만나는 분들은 자신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는 훌륭한 분들이다. 하지만, 간혹 저런 자들도 있는 법이지. 자신들이 뿜어내는 독기가 주변 사람들을 상처입히는 줄조차 모르고 말이야... 레이디 리미, 대신 사과드립니다.”

지금껏 내 손에 손을 붙잡힌 채 계속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리미는 황급히 약간 무릎을 숙이며 치마를 펼치며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말씀 거두어주소서.”

“리미 양은, 모스 백작님의 친구라고 하셨던가요?”

이번에는 아르논 양이 리미에게 말을 걸었다. 리미는 아까는 뾰족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언급한 주제에, 아주 공손하기 그지없게 대답했다.

“네, 영애님. 모스 백작님과 4년간 아카데미에서 함께 공부했답니다.”

“어머나... 모스 백작님은 예전에 어떤 학생이었나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아르논. 리미는 살짝 당황했지만, 아까 내가 얘기했던 것처럼,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영애님께서는 모스 백작이 예전에는 병약했다는 걸 아시나요? 성적은 단 한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고, 모든 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졸업 후 그랜드 아카데미에 들어갈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셨지만, 몸은 약하기 짝이 없었답니다.”

“어머나...”

곧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붙어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황당한 전개에 나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었다.

“아쉽군.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 불꽃을 튀기며 치열하게 싸울 거라고 생각했건만.”

“폐하... 제발...”

왜 형이고 폐하고 나를 못 놀려서 안달인 걸까.

============================ 작품 후기 ============================

뭐 이렇게 됐습니다 ㅋㅋㅋㅋ

하지만 아직 캣파이트가 끝난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날 저녁 기리인과 왈츠를 춘 두 사람이 저 둘이니까요 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 추, 코, 쿠 주시는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GoodYear 님 // 아, 안돼... 내 안의 흑염룡이 깨어날 것만 같...! ㅋㅋㅋㅋㅋㅋㅋㅋ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그 평가가 틀리지 않았네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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