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65화 (265/309)

00265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폐하의 권유에 따라 나는 파티장을 돌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간단히 소개를 하고, 그들에게서 소개를 받고, 가벼운 교분을 나누는, 지극히 피상적인 모임이었지만... 아까 나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던 것에서 보듯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에 대해 감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그 짧은 시간에 “백작님의 영지를 위한 최고의 사업 제안이 있습니다!”라고 나서는 사람도 있었고, “이 쪽은 제 여식입니다. 백작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렇게 수작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든 요구를 부드럽게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내 몸과 마음의 기력이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거절을 한 번 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이걸로 나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게끔 세 번 네 번의 고려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결코 싫은 빛을 내비쳐서는 안 되었다. 이런게 정치인가...

“백작님? 그러고 보니 아까 황태후 전하께서 수도에 저택을 하사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제도 주변의 자그마한 자작령의, 분명 혼기를 2~3년은 지나쳤을 자작의 여동생 한 명, 이름이... 레이디 루사츠였던가. 아무튼 그 여자가 애써 매력적으로 보이려 애쓰며 나에게 말을 붙여왔다. 잠시 내 머릿속에 레카 시의 연회가 떠올랐다. 남의 눈치고 뭐고 몸을 가까이 가져와 비비적대던 그 아줌마들.

다행히 제도의 사교계는 그 정도는 아니라, 나는 가벼운 몸짓만으로도 그녀들의 접촉 시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예를 들면 지금처럼, 내 팔에 가볍게 손을 올리려는 레이디 루사츠의 시도를 사전에 팔을 약간 옮김으로서 너무 과도하게 팔을 움직여야만 내 팔에 닿게끔 만들어 미연에 방지하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하며, 나는 하지만 얼굴은 어디까지나 웃는 얼굴로 레이디 루사츠를 포함한 예닐곱 명의 레이디에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아직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위치가 어디인지, 크기는 어느 정도 되는지... 아무 것도 몰라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들군요.”

“어쩜...! 제도에서 좋은 집 구하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던데, 황태후 전하가 내려주시는 집이라면 정말 좋은 집이겠죠...?”

레이디 이... 어... 그래, 이브나. 이브나라는, 루사츠와 비슷한 급의 레이디가 부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그 말을 받듯이 다른 레이디, 어, 이름은... 이에르스...였던가. 정보 확인을 하면 쉽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암튼 레이디 이에르스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백작님, 혹 고용인은 구하셨나요?”

고용인? 그러고보니... 저택이 생기면, 그리고 내가 자주 자리를 비우면...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니, 저택의 일을 책임져 줄 사람이 있어야겠구나... 형의 집에 있는 오레즈 할아버지와 에노 할머니처럼.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만약 그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면 돈은 또 얼마나 줘야 하고... 그 전에, 믿을만한 사람은 구할 수 있는 걸까...?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사람이 아니라도 열심히 일 해주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니오, 아직 집도 모르는데 고용인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을 하자마자 모든 레이디들의 눈빛이 홱 변했다. 그러더니, 앞다투어...

“백작님! 그럼 제가 한 분 추천드려도 될까요...?”

“저희 집안에 정말 일 잘하는...”

“믿음직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어요!”

하이톤의 다발 화살이 우다다다 쏟아지는 느낌은 전장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당황스러움이었다.

“아니, 저, 아직 집도 모르는데...”

“그래도 사람은 있어야죠! 걱정마시고...”

“저희 루사츠 가에서는...!”

“저희 이에르스 가가...!”

으아...! 도망가고 싶다...! 나는 손을 들어올리며 “진정하시죠.”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연히, 타오르는 불에 물 한 컵 부은 정도밖에 효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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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서 고생하듯, 여러 명에게 시달리며... 나는 최대한 아무런 약속을 해 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덜컥, ‘귀 댁에서 고용인을 추천받도록 하죠’라고 했다가는 순식간에 ‘우리는요!’ 하고 수십명이 달려들까봐서 무섭기도 했거니와... 그렇게 휩쓸려가다가 어느 이름모를 가문 좋은 일만 해주는 일만 생길까봐서였다. 시스템의 <냉철>과 <고급 언변>의 백업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럭저럭 큰 사고를 치지 않고 무난히 지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사업 제안은 내 대리인인 에닌 루오프 경이나 내 행정관인 이트로프 마스 경을 거치시라’는 이야기를 흘려 대리인들을 자연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들이 옥석을 걸러주리라 믿어야겠지.

하지만 결국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백작님.”

“기리인.”

정말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리미-아르논 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나라는 공통의 화제를 놓고 상당히 이야기가 잘 오가서였을까, 아니면 리미라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규방 아가씨 아르논의 호기심이 발동되어서였을까. 둘은 하룻밤사이에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리미, 그러고 보니 제도 구경은 많이 해 봤니?”

“아니요, 언니... 교습소와 학원들만 다녔죠. 다른 귀족가에 아주 가끔 차 마시러 갈 때 마차타고 가면서 둘러본 게 다에요.”

우리보다 두 살 많은 아르논은 리미에게 말을 놓고, 리미는 아르논을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둘의 대화의 흐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그렇구나... 언니같은 공작가에서도 그런 곳을 이용하는 줄은 몰랐어요.”

“얘는. 우리라고 드로그를 땅에서 파내는 건 아니란다. 그리고 모름지기 레이디라면 가격과 성능의 비율을 언제나 따져야 하는 것이지.”

“맞는 말씀이에요, 언니. 언제 한 번 저를 데려가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 언니가 돼서 그 정도의 도움은 줘야겠지? 아니, 이럴 게 아니구, 아예 시간을 잡자. 내일 뭐 하니?”

“아무 것도 안 해요. 뭐 있었어도 비우겠지만요.”

리미의 즉답에 아르논 양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언니가 마차 보낼 테니까, 우리 집에서 같이 점심 먹을까?”

리미의 표정이 오늘 본 중에 가장 환해졌다.

“정말이세요? 갈게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더니... 두 사람은 옆에 멀뚱히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를 돌아보았다.

“모스 백작님, 백작님도 같이 와 주실 거죠?”

“기리인, 같이 가자. 너는 한 번 가 봤다며.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매너남이 되어야지.”

미리 언질을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르논 양, 리미. 아쉽게도 내일은 연구 모임이 처음 열리는 날이라 거기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연구 모임이 끝난 후에도 제 의형이신 에아임 로그푸스 경에게 용무가 있어 내일은 시간을 내기 어려울 것 같군요.”

“그럼 모레는 어떠세요?”

“아쉽게도 모레는 선약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날, ‘에스’를 만나는 날이지.

“아...”

두 번이나 거절당해서였을까, 아르논은 영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리미는 ‘너 어쩜 그럴 수 있니’라는 무언의 압박을 마구마구 나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아아. 왜 니들 둘이 서로 연합했니. 나는 적어도 서로 견제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잠시 리미가 아르논 양에게 감화되어 좀 더 레이디다워지는 걸 상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저... 그럼 그 다음 날 제가 점심식사라도 사겠...”

“좋아요!”

말도 다 마무리짓기 전에 어느새 아르논 양이 표정을 활짝 펴며 웃으며 말했다.

“약속한 거야, 기리인?”

내가 언제... 말도 다 안 꺼냈는데...

“언니, 내일 어디서 기리인을 뜯어먹으면 좋을지 얘기해 볼까요?”

“그래. 언니가 또 제도의 맛있고 비싼 음식점들은 잘 알거든?”

하아... 까닭모를 진한 배신감을 느끼는 가운데, 황제 폐하가 홀의 무대로 올라왔다.

“모두들 재미있게 즐기셨습니까?”

“네, 폐하.”

내 쪽을 일별한 폐하는, 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웃으며 넘어갔다. 아마 내 옆에 서 있는 아르논과 리미 두 여자 때문일까. 궁내부원들이 맨 처음처럼 잔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대략 사람들이 잔을 다 받아들자 황제 폐하가 말했다.

“오늘 나에게, 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히끅, 하고 딸꾹질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친구가 받은 모욕에 대해 화를 내고, 그 친구에게 한없이 미안했는데, 오히려 그 친구는 내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나를 위로하더군요. 새삼 우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이번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간신히 주변을 둘러보는 추태를 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옳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어도 전쟁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신의 곁으로 가는 사람들을 만듭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전승의 기쁨 속에 솔직하게 슬퍼하지조차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와, 그리고 짐이 펼쳐갈 정책들이 그 슬픔에 대한 우정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정을 위하여!”

“우정을 위하여!”

히끅. 한 번 더 딸꾹질 소리가 그 사이에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가운데, 우리는 잔을 비웠다. 그것으로 웬지 모르게 파란만장했던 전승기념 무도회가 끝이 났다. 나에게 약속 몇 개를 강제로 남기고 말이다.

============================ 작품 후기 ============================

이 정도에서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대륙 최고의 드래곤과 점심약속을 한 걸 '이 정도'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추/코/쿠 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1빠 축하!

니코틴 님 // 감사합니다! 덕분에 푹 잤습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GoodYear 님 // 가끔씩 오마케로 흑화를 대신하고 있습니닼ㅋㅋ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ㅎㅎ

카드보험 님 // 아마 후작은 앞으로 삶이 좀 팍팍해질 겁니다 ㅎㅎ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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