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7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황태후 전하는 억울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저나, 오라버니는 선황제 폐하, 그리고 지금의 황제 폐하에게 단 한 번도 불충한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명을 어긴 적이 없어요. 우리가 했던 모든 행동은 모두 황제 폐하와 우리 제국을 위한 것이었다고, 트리클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음. 지적할 거리가 넘치는 말이지만, 지적은 나중에. 나는 여기서는 약간의 맞장구를 쳐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 네. 저도, 아까는 농담처럼 이야기했습니다만, 나스프 공작님이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시는 것이, 권력을 누리는 사람보다는 충성스러운 신하에 가까운 것 같아 놀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전쟁에 임하시는 공작님의 태도는 정말이지...”
“그렇죠? 백작도 그렇게 생각하죠?”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지며, 대뜸 말마저 잘라들어오며 동의하는 황태후 전하. 내 입발린 소리에 저렇게까지 기뻐할 정도로 평소에 억울함을 많이 느꼈던 건가... 황태후 전하는 환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백작님. 제가 집과 고용인까지 드리는 건, 백작님께 입은 은혜를 갚는 의미도 있지만... 백작님께 부탁를 드리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에요.”
“부탁이라 하심은...?”
“백작님은 황제 폐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신 것 같더군요.”
선을 넘으시는 것 같은데... 한 번쯤 견제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약간은 과감하게 말을 걸었다.
“황태후 전하, 혹 소신에게 황제 폐하의 신뢰를 저버리고 전하께 충성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인지요...?”
충분히 내 말 속에 담긴 메시지를 알아 들었겠지. 아니나다를까, 황태후 전하는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내 비록 지금 황제 폐하를 배아파 낳은 친어미이지만, 동시에 백작님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신민일 뿐입니다. 그런 내가 어찌, 폐하의 신뢰를 배신하라는 요구를 하겠습니까?”
...너무 부정이 세면 오히려 긍정에 가깝다는 걸 모르시나...? 나는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라며 고개를 숙여 보였고, 역시 내 예상대로, 황태후 전하는 웃으며 신민으로서 당연한 자세였다고 나를 두둔해 주었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전하가 말했다.
“내 부탁은 그것보다는 훨씬 온건한 것입니다, 모스 백작님. 오라버니에게 듣기로 이번 전쟁터에서 폐하가 오라버니에게 ‘외삼촌’이라고 불렀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폐하와, 나의 친정간에 존재해오던 알력이 약간이마나 누그러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에게 내가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이에요. 나는 폐하가 우리 가문에 가지고 있는 오해를 약간이라도 풀었으면 해요.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쓰는 약간의 금전 따위,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에요. 백작님이 황제 폐하와 우리 가문의 가교가 되어 주세요.”
‘띠링!’
<평가중... 서브 퀘스트 출현 조건에 미달합니다. 서브 퀘스트가 출현하지 않습니다.>
...이런 건 또 처음 보는데. 무슨 일이야, 시스템?
<이미 이 제안에 대해 당신도 생각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이미 결론을 내린 상황이니 선택지나 목표를 주는 방식인 ‘퀘스트’는 어울리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자, 그럼, 어떻게 확답을 주지 않으면서 상대가 만족할법한 대답을 하느냐인데... 믿을 건 ‘외교’ 뿐이다.
“소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겠습니다, 전하.”
두루뭉술한 대답. 어떻게 보면 전면적인 협력으로 보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달리 보면... ‘어찌 황제 폐하의 신뢰를 저버리고 그 쪽에 붙으라고 하십니까, 그건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우겨볼 여지도 있는 말이지. 황태후 전하가 그걸 모를리 없어,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어왔다.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무슨 말인가요?”
“소신의 능력 밖의 일은 할 수 없지 않겠사옵니까. 제 능력 밖의 일을 장담하는 것이야말로 상대에 대한 모욕이라고, 돌아가신 제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사옵니다.”
아버지, 죄송해요. 그래도 아버지가 하실 법한 말이니까 이해해 주실 거죠? 신의 곁에서 평온하시기를 기원할게요. 저거 보세요. 아버지의 이름을 넣으니까 황태후 마마가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잖아요.
“쉽지 않은 남자로군요, 그대는. 열아홉 살이라는 게 믿기지를 않는군요. 마치 노회한 관료들을 보는 것 같아요. 젊은이답게, 속시원히 대답해 줄 수는 없나요?”
그럴수록 나는 더 나 자신을 낮출 뿐이다.
“용서하소서, 전하. 지킬 수 없는 약속으로 황태후 전하를 농락하는 것보다 소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하겠다고 대답드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사옵니다.”
“그래요...”
한숨섞어 말한 전하는,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그나마의 약속이라도 얻어낼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정도로군요... 새삼, 그대와 같은 인재를 어느새 친구로 둔 황제 폐하의 인복에 감사할 일이라 여겨지는군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아까보다 한층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전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백작님도 오늘 아침부터 계속 피곤하겠군요. 그리고, 내가 준비해 둔 집과 선물들을 얼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아아,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다면, 가서 백작님이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은데, 아쉽군요.”
입을 가린 채, 어디까지나 에티켓에 맞게 쿡쿡 웃는 전하. 분위기가 바뀐 걸 보니, 회유 공작은 끝난 모양이다. 나는 약간은 긴장을 풀며, 계속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전하, 외람되오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내려주신 집이라는 게... 대체 어딥니까...?”
“아?”
잠시 눈을 말똥거리던 전하는, 곧 다시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오호호! 그렇군요! 내가 정작 그 집이 어디인지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호호호!”
한참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전하는, 어느새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웃어보는 것 같네요. 모스 백작,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그대에게는 행선지를 가르쳐주지 않겠어요. 내가 준비해 준 집으로 가서 하룻밤 지내세요.”
이미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전하.”
“경을 새 집으로 데려갈 마차가 밖에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도착한 집에는 집사 부부가 기다리고 있을 거구요.”
일어나라는 말인 것 같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후 전하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돌아와서는, 내 양손을 붙잡아 들어 모으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전하...”
“모스 백작님.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바램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이건 황태후로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것보다는... 혼기가 다가오는 조카를 바라보는 이모의 심정이라고 할까요.”
아악.
“저, 그 말씀은...”
“나는 백작님이 정말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백작님의 능력, 성취, 지능, 인품...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화, 황공합니다...”
“그러니, 조카를 둔 이모로서 부탁할게요. 우리 아르논과 친하게 지내 주세요. 내 바램은 그 이상의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거지만...”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전하는 내 손을 놓았다.
“살펴 가세요, 백작님.”
“감사합니다, 전하. 좋은 밤 되십시오.”
나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뒷걸음질쳐 응접실에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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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나는 망토의 죔쇠를 약간 풀어서 줄을 느슨하게 한 후, 맨 위의 셔츠 단추마저 풀고는, 의자에 널부러져 한숨을 쉬었다. 하루종일 시달리기만 한 느낌인데, 이제 가는 곳은 맘편한 내 방이 아닌 어딘지도 모르는 내 새로운 집이다.
마지막이 결정타였다. 당황스러운 선물에, 가시를 숨겨서 얹어주고는, 억지까지 쓰는 황태후 전하는, 그녀의 오라비인 공작과는 다른 의미로 대처하기 참 힘든 상대였다. 게다가 선물은 거절할 수조차 없고... 억지 논리도 그렇다. 여자에게 ‘당신 억지 쓰는거야’라고 말하는 건 ‘당신보다 저 여자가 더 예뻐’ 급의 심한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그걸 믿고 저렇게 억지를 쓰는 건가...
그나마 그 이후에 펼쳐진 노골적인 전향 요구에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은 게 내가 오늘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이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뻗대버릴 작정이었고, 아마 전하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겠지.
“하아...”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바깥의 궁내부원이 내 한숨소리를 듣고 괜찮냐고 물어봤다. 새삼, 나는 아직 나스프 공작가의 손길은 황궁에 강하게 남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차를 모는 궁내부원, 아마, 분명, 높은 확률로, 나스프 가의 입김이 닿는 인물이겠지. 내가 뻘소리를 하면 그 얘기가 어느새 그리로 들어가겠지... 도착할 때까지 말은 하지 말자.
그나저나, 그럼 앞으로 집에서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내가 무슨 얘기를 하거나 뭘 하거나 하면 그 정보가 고스란히 공작가로 넘어갈 텐데... 아... 걱정이다. 그럼 앞으로 집에 중요한 건 두지 말고, 에아임 형네의 방이나... 아니면 어디 창고를 하나 빌려야 하나...
“다 왔습니다, 백작님.”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도착한 줄도 몰랐다.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어?”
============================ 작품 후기 ============================
예상하시는 분들 많으시겠죠?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 추, 코, 쿠 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어이쿠, 과찬의 말씀입니다. 기리인은 솔직히 얼굴이 워낙 잘생겨서 무슨 말을 해도 다들 오오 해 주는 버프가 있... 부럽...ㅠㅠ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