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9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강한 링크’와는 별개로, 오누트 부부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속마음까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나를 어디까지나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는 인상이었다. 시스템을 통해 확인한 정보도 뭐 ‘불만을 품고 있다’ 등의 정보는 없고. 그리고 그들은 나스프 가에서 일하던 고용인이고, 나스프 가의 고용인들이 얼마나 일사불란하고 예의바른지는 내가 직접 본 바 있으니 실력도 믿을만 할 것이다. 나스프 가나 황태후 전하에게 내 정보가 들어갈 수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백작님을 예전에 보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에스틴은 아주 약간 몸의 긴장을 풀며 말했다.
“나스프 저택에서 말입니까?”
“네, 공작님의 초청으로 저녁식사를 위해 오셨을 때 말입니다. 지나다 먼 발치에서, 정원을 구경하시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백작님과 아가씨의 모습을 뵈었던 적이 있었죠. 문자 그대로의 선남선녀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선남을 위해 일하게 되다니, 신의 안배는 참 신비하기 그지없군요.”
“그랬군요... 나스프 가에서 일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요?”
에스틴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희 집안은 공작가에서 계속 일했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께서는 이미 공작가의 고용인이셨죠. 저도 공작가에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면서부터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25년이 지났군요.”
“25년이요... 제가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길군요.”
두 부부는 담담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떠벌이며 자랑하는 성격도, 과묵해 말을 하지 않는 성격도 아닌 것 같다.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버프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오.
“자! 밤이 늦었으니, 얼른 자라, 기리인. 에스틴, 오늘 갑자기 온 터라 뭐 준비된 게 없죠?”
에아임 형이 묻자, 에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장을 보면 무엇이든 해 드릴 수 있겠지만, 우선 내일 아침에는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세 사람 모두 우리 집으로 넘어오세요. 기리인, 아침 같이 먹자. 알았지?”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점심이나 저녁과 달리, 아침은 아무나와 같이 먹지 않는 법이니까. 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옆집에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형은 나를 여전히 한 가족으로 생각해 주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안온함이 들었다.
“네, 형. 갈게요.”
“그래. 에스틴, 테리아. 우리 집 오레즈 할아범과 에노 할멈을 만나봤나요?”
“아까 만나 뵙고 인사만 드렸습니다. 좋은 분들 같더군요.”
“좋은 사람들입니다. 기리인은 내 동생이니까, 우리는 한 가족인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범 할멈과 함께 일하게 될 날이 많을 것 같으니,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 이것은 형의 가벼운 견제인가. 두 사람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할 따름이었다. 형이 “내일 봅시다.” 하면서 문을 나섰고, 나는 형을 따라갔다.
“뭘 배웅까지 나오냐. 얼마나 된다고.”
“형... 고마워요.”
“뭐가?”
“전부 다요.”
형은 잠시 나를 멋쩍은 듯 보더니, 늘 하던 것처럼, 손을 뻗어 머리를 헤집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뭐가요?”
“알다시피 나는 형님 누님들 밖에 없잖냐. 게다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그래서 형들이 늘 나를 가르치고 도와줬거든. 고맙다고 할 때마다 형들이 웃기만 하시길래, 어떤 기분인지 몰랐는데, 지금 내 기분이 형들 기분이었겠구나.”
나보다 약간 큰 형은, 내 어깨에 두 손을 짚고, 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기리인. 설령 니가 여기서 더 공을 세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가더라도, 혹은 작위를 빼앗기고 다시 평민이 되더라도, 너는 내 동생이니까. 형이 동생을 돌보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냐.”
전에도 생각했지만, 부모님을 잃은 후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행운은 에아임 형을 만난 게 아닐까.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형을 바라보았고, 형은 내 어깨를 툭툭 쳐 주더니, “밤이 늦었다. 피곤할텐데 그만 들어가 자라.” 하고는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언젠가, 형에게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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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
나는 승용 마차에서 기지개를 길게 켰다. 이것이 디버프의 힘인가. 꽤 푹 길게 잔 것 같은데, 영 찌뿌드드하다. 앞으로도 이럴 걸 생각하면 좀 갑갑하다.
그래도 오늘 아침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워낙 오레즈 할아버지와 에노 할머니가 사람이 좋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집 에스틴이나 테리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랄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기 페이스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고수들이 있지 않은가. 그 페이스에 에스틴 부부가 자연스럽게 말려드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다보니 있다가 장도 같이 보러 가기로 하고, 빵이나 고기 등을 대주는 가게들에게도 소개를 시켜주기로 하는 등, 같이 행동할 모양이었다. 나로서야, 형의 견제가 통하든 안통하든, 오레즈 할아버지나 에노 할머니 만큼 에스틴 부부가 해 줄 수만 있다면 대 환영이다.
그나저나 이 찌뿌드드한 것 어떻게 좀 해결 안 될까... ‘시스템’, 방법이 없을까?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뭐? 무슨 트리클 교 교리문답하냐.
<디버프가 걸린 것은 결국 당신이 그것을 과도하게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당신이 하는 이야기 중 그들에게 가치있을 만한 이야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서류 같은 것은 금고를 구하면 될 일이고 말입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당신이 에스틴 부부를 신경쓰지 않을 만큼 되거나, 혹은 말조심을 완전히 내재화하면 해결될 일입니다. 당신이 편해지는 순간 디버프가 사라질 것입니다.>
단호하네. 내가 입맛을 다시고 있노라니, 마차가 어느새 광장 옆 대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었다. 잠시 달려간 마차가 멈춰섰고, “손님, 다 왔습니다.”라는 마부의 말에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우와...!”
어쩔 수 없이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주변 건물들과 다른, 왠지는 몰라도 무지갯빛 광택이 도는 것 같은 큼지막한 벽돌들로 이루어진 담장 너머로 여러 색깔의 높은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아치형으로 된 널따란 입구 너머로,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여럿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두루마리나, 양장본 책이나, 시약병들이나, 혹은 뭔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들려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내 운명이 이렇게 확 바뀌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들 사이에 섞여 있었겠지. 몸은 여전히 약했겠지만, 기쁘게 마법을 연구하며, 더 훌륭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학생이 아닌 연구 의뢰자이자 연구 대상으로 이 자리에 왔다.
[제국 그랜드 아카데미]
“기리인!”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입구 안쪽에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선생님도 계시고, 여러 뛰어난 분들이 내 몸에 일어난 이상을 연구하기 위해 모여 있다. 잘 풀리면, 내 상태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을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지. 그러니 아직 희망을 버리기에는 이르다.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르플레스탁, 아니 ‘에스’가 이야기해준 대로, 다른 방식의 마법도 얼마든지 가능할테니까. 나는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잤어? 안 늦었네?”
“아, 네. 선생님은 잘 쉬었어요?”
선생님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어제 너 보내고 이브랑 같이 푹 잤어 계속. 땡땡이쳤지 뭐. 너는 밤새 쉬지도 않고, 피곤해서 어쩌니?”
“아, 어제요... 그러고 보니 어제 좀 황당한 일이 생겼어요.”
“황당한 일?”
“저 집이 생겼거든요.”
“뭐?”
다행이다. 선생님까지 알면서 모르는 체 했었던 거라면 나 진짜 모든 아는이를 의심할 뻔 했다. 나는 어제 새벽, 선생님과 이브와 헤어진 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선생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세상에... 모스 영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고, 사실 제 땅도 아니에요. 황제 폐하께서 하시는 일에 이름만 걸어둔 거니까요.”
“그래도 세금은 너한테 준다며. 그게 얼만데... 와아... 기리인, 부자 되겠네? 게다가 집도 생기고 말야.”
“그 집 말인데요. 위치가 어딘지 아세요? 에아임 형 집 바로 옆집이에요.”
“아...! 그래서 그 담장 공사를 했구나...! 테밀 언니가 어쩐지 몇 번 물어봐도 빙글빙글 웃으면서 절대 얘기 안 해 주더라...”
테밀 누나. 그렇게 나오깁니까?
“다 왔어. 여기가 5시 첨탑이야.”
“...5시 첨탑이라고요?”
“응. 아까 우리가 들어온 곳이 6시야.”
“아, 시계요. 첨탑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대요?”
“5개라서 동서남북으로 할 수도 없고, 색깔이 비슷한 게 있어서 붉은 첨탑 푸른 첨탑 이럴 수도 없고 그랬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붙이기 귀찮았던 것 같아.”
첨탑 앞을 지키던 경비가, 그에게 다가선 우리를 보고 물었다.
“요안나 씨. 이 분은?”
“오늘 연구 모임 참석 대상자에요. 기리인 모스 백작님이십니다.”
“아, 이 분이... 들어가시죠.”
경비가 열어주는, 두 사람 정도가 출입할 만한 쪽문으로 우리는 첨탑 안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꽁냥꽁냥도 좋고 쓰리썸도 좋고 캣파이트도 좋지만 이제 본스토리로 돌아가야겠죠.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쿠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유한도전 님, jin-matient 님, 박성빈 님, GoodYear 님, eastarea 님, 체크필통 님 등 여섯 분이나 디버프에 대해 의견 주셨네요 ㅎㅎ 결국 이것도 기리인이 극복할 시련이죠. 두 고용인을 감화시키거나, 포섭하거나, 성공적이고 무리없이 배제해내거나, 혹은 본인이 숙달되거나. 감사합니다!
계룡산도인 님, cacao99 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