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0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모든 대륙의 마법사들의 본산, 드래곤 르플레스탁이 인간에게 준 마법을 소중히 지키고 발전시켜온, 모든 마법사들의 동경의 대상인 그랜드 아카데미. 마법사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보니 마법이 아낌없이 사용되는 곳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5시 첨탑’마저도 공간 확장 마법으로 떡칠이 된 듯, 겉에서 보기보다 안이 몇 배는 넓은 느낌이었다. 나스프 공작의 대저택 정도의 넓이가 그 첨탑 안에 접혀져 들어있었다. 그런 넓이가 몇 층에 걸쳐 쌓여있는 것이고, 이런 첨탑이 몇 개는 있는 것이다. 이러니 이 넓지 않은 면적에 있는 아카데미가 대륙 모든 아카데미와 모든 마법사의 본산이 될 수 있었겠지.
잠시 정신을 못 차리고 안을 둘러보는 사이, 우리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니... 누군가라고 할 수 있을까. 무릎 아래가 희미하고, 몸도 약간은 투명한, 환영이었다. 단정한 젊은 남자의 환영은 우리를 향해 머리숙여 인사하고 말했다.
“5시 마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목소리마저도 약간은 공기가 많이 섞인, 붕 뜬 듯한 느낌이었다.
“요안나 이스카 님, 반갑습니다. 3일만에 찾아주셨습니다.”
“반가워요, 알프레드.”
“알프레드...?”
우리 뿐만이 아니었다. 마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없지 않았다. 그 사람들 앞에 모두 환영이 나타나 인사하고 있었다.
“기리인, 이 환영은 5시 마탑 지하의 거대한 마법진에 의해 생성된, 지능이 있는 환영이야. 방문자를 맞이하고, 그들의 신원을 기록해둬. 아까 내가 3일만에 왔다고 얘기하는 거 봤지?”
“아하...”
그런 것도 가능한가. 마법이라는 것에 대한 한계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뭔가 상쾌하게 뒷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왜 알프레드에요?”
“몰라.”
이 사람이 농담하나 싶어 선생님을 바라봤지만 선생님은 ‘왜?’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우리를 기다려주던 알프레드는 (환영이 ‘기다려 준다’는 고도의 사회적인 행위를 수행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공손히 나에게 인사를 하고 말했다.
“5시 마탑에 처음 방문해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환영은, 곧 밝게 웃으며 말했다.
“등록된 방문자를 확인하였습니다. 환영합니다, 모스 백작님. 두 분은 15분 후에 제2회의실에서 시작되는 연구회 출석 대상자로 확인되었습니다.”
와... 환영에게 미리 정보를 입력할 수 있고, 그 정보와 내가 말한 정보를 비교해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건가. 대체 이 마법진은 얼마나 대단한 걸까. 환영은 자연스럽게 둥실 몸을 돌려 앞으로 떠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뒤로 따라붙었다.
음. 환영에게 말을 걸어도 될까. 잠시 선생님의 눈치를 보았지만, 선생님은 나를 재미있다는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약간의 장난기마저 느껴지는 눈빛에, 나는 왠지, 선생님이 내가 그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잇. ‘정보 확인’.
<물품 정보>
<5시 마탑의 환영>
<5시 마탑 지하의 대마법진에 의해 만들어진 지성이 있는 환영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내용 이외에 질문에 대해서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으음. 이름이 왜 ‘알프레드’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한다는 거군. 한 번 얘기나 해 볼까.
“알프레드.”
“네, 부르셨습니까.”
약간 속도를 늦추며 그가 우리 옆에 날아왔다. 약간만 어두침침했어도 유령같다는 소리가 나왔을 것 같은데.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물어봤을 때, 당신이 남들이 물어보지 않은 것을 대답하게 될까요?”
알프레드는 잠시 미소만 지은 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우리 곁에서 앞으로 날아갔다. 아마 사람이라면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했다. 선생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약간 놀란 표정이 자리한 것을 보며 내가 속으로 득의만면하고 있을 때, 알프레드가 대답했다.
“제가 자신을 인식하는지에 대해 물어보시면 어떨까요.”
“당신은 자신을 인식하십니까?”
곧바로 물어본 내 질문에 대해,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쉽게도 저를 만드신 분들은 저를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억하고 비교하고 분석하여 사람을 대할 수 있지만, 제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렇군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니, 자아도 생기지 않겠군요.”
“그렇지요. 자아가 없으니 욕망도 없을 것이다, 라고, 저를 만든 분들이 기록해 두었군요. 그 분들이 또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뭐라고 적으셨습니까?”
“알프레드는 ‘모두의 친구(al friend)’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거였나...
“축하드립니다. 알프레드라는 이름의 근원을 아시게 된, 지금 살아있는 첫 번째 사람이 되셨습니다. 마법사가 아니신 점이 정말 아쉽습니다.”
“다시 마법사가 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럼 행운을 기원합니다. 다 왔습니다. 제가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알프레드는 처음 나타날 때처럼 훅 하고 꺼졌다.
“기리인.”
놀란 눈으로 나와 알프레드를 바라보던 선생님이 말했다.
“네?”
“처음으로 너한테 약간 질투나려고 해.”
선생님의 얼굴 표정은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을 대신 말해주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간의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뭐라 말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자, 선생님은 피식 웃으며,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들어갈까?”
“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요안나! 기리인!”
먼저 우리를 반겨준 것은 역시나 이브였다. 평소처럼, 단정하게 흰 블라우스와 넓지 않은 진한 빨간색의 롱 스커트를 입은 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브. 잘 쉬었어?”
“그럼. 준비 만만이지. 기리인, 잘 지냈니?”
그리고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주. 인. 님.’이라고 입모양으로 말해왔다. 나는 갑자기 약간 뒷골이 당기는 느낌을 받으며 – 이 여자를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려놔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며 –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모스 백작님이 오셨군?”
이브 이외에도 방 안에 있던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안나 선생님은 이미 그들과 안면이 있는 듯, 나서서 나를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신분은 몰라도, 그 분들은 이미 나이도 나보다 훨씬 많아 보였고, 각자의 영역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분들이었으니, 나는 내가 먼저 소개되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기리인, 이 분은...”
“아, 반갑습니다. 모스 백작님.”
나는 무릎을 꿇고 그 분의 반지에 입을 맞춘 후 일어났다.
“대사제님을 뵙습니다. 그 동안 건강하셨는지요.”
“신의 보살핌 덕에 잘 지냈습니다. 신께서 백작님을 잘 돌봐주셔서 이렇게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오시고, 신께 감사드릴 일입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인 사제, 그것도 대사제님 앞에서 그 말을 부정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마지막 만남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백작님을 다시 만나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다행입니다.”
“아닙니다. 교단에서 저를 도와주시기로 한 점에 그저, 신과 교단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대사제님은 담담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리고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자, 로브를 입은 두 분, 단정히 정장을 차려입은 한 분, 셔츠와 바지 차림인데 셔츠의 팔을 걷어붙인 한 분이 있었다.
“기리인, 이 쪽은 뢰큐 교수님, 그리고 데비로스 교장님. 그랜드 아카데미에서 나를 지도해 주시는 교수님과, 아카데미의 교육을 관장하시는 교장님이셔. 교장님, 교수님. 제 제자였고, 지금은 제국의 젊은 영웅인 기리인 모스 백작님이십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청해 왔다.
“반갑습니다, 백작님. 그랜드 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다 나는, 데비로스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교장님이 요안나 선생님에게 보내주신 편지를 읽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그 때 제 불행을 걱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데비로스 교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억해 주셨군요. 그 때 그 청년이 어느새 전쟁에서 압도적인 공훈을 세운 제국의 영웅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역경을 당당히 떨쳐낸 백작님의 의지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군요. 특히, 마법사에게 마법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낙담인지 아는 같은 마법사로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선택할 수만 있다면 그런 일 없이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신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 심정을 아는 사람은 같은 마법사들 뿐이지요. 그래서 더욱 백작님이 존경스러운 것이겠고요. 아무튼, 환영합니다. 저희 그랜드 아카데미는 백작님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전폭적으로 협력할 것입니다. 각 첨탑주님들 역시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가 대충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되자, 선생님은 다음 분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 분은 대도서관 부관장이시자 제국 대학 마학부 부장교수이신, 마블라드 교수님. 이브의 상급자이기도 하셔.”
“반갑소, 백작.”
약간 하대하는 마블라드 교수는, 그러나 그런 말투가 어울릴 만큼 나이가 든, 70대 정도는 되어 보이는 노학자였다. 단정히 빗어넘긴 머리도, 긴 턱수염도 모두 새하얀 그의 손은, 하지만 맞잡으니 생각보다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쪽은,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분이셔.”
“폐하께서요?”
내가 놀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직접 보내신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황실 마법사 엔데 경 아래에서 일하는 키오이그 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엔데 경은 잘 지내시는지요?”
“심려 덕분에 과부하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건강히 지내고 계십니다. 혹 연구에 어려움은 없을까 엔데 경께서 걱정하여 저를 이 자리에 가보게끔 하셨습니다.”
음... 아무래도 황제 폐하의 입김이 들어간 것 같은데. 어쨌든 나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얼른 소개를 마무리지어야겠다 싶어 평소보다 길게 썼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추/코/쿠 주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astarea 님 // 정말 길었죠...
계룡산도인 님, 박성빈 님, cacao99 님 // 늘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 늘 긴장하면 기리인이 불쌍하잖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