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6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위업을 달성했다는 메시지보다, 대도서관에 있는, 즉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정보들이 모이고 정리된다는 방 속의 내용보다, 나는, ‘나 이외의 사람이 들어가면 방이 망가진다’ ‘안의 기록을 들고 나올 수도 필사할 수도 없다’는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먼저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스템이 알려준 내용은 직접 말할 수는 없다. 아니, 그걸 떠나서... ‘누군가 내 눈 앞에 나만 보이는 글자를 띄워줬는데, 거기에 이러이러하게 써 있었다, 그러니 아무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 잘도 믿어주겠다. 어쩌지...
“관장님, 들어가지 못한다고요?”
“전해지는 이야기는 그렇소. 자격이 없는 자가 들어갈 수도 없고, 가지고 나올 수도 없고, 내용을 일러줄 수도 없다고. 관장 된 자는 자격 없는 자를 반드시 막아야 할 것이라고.”
“자격이 없는 자라니...”
마블라드 교수가 말했다.
“그럼, 자격이 있는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일을 일어나게 한, 모스 백작님이 아닐까요?”
이브가 대답했고, 마블라드 교수는 별 말 없이 휑하게 뚫린 문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자격’이라는 게 참 애매한 말이다. 학술적으로도, 마법으로도,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이 분들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 분들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내 몸에 대한 실마리는 발견해서 채 펴 보기도 전에 날아가 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아니, 나만 알고 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한참 말없이 가만히 있던 데비로스 교장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자, 교장은 여전히 열린 입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카데미에 몸을 담으면서 나는 마법적 신비에 대해서도 몇 번의 조사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시설을 조사하며 허둥대다가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고 나서...”
“죽는다고요?!”
요안나 선생님이 크게 소리치자, 데비로스 교장은 잠시 놀라더니 손을 내밀어 선생님을 안정시키며 말했다.
“진정하게, 요안나 양. 그 이후 우리 아카데미는 이런 마법적 신비에 대해 조사 절차를 마련했다네. 최대한 신중하게, 인명이 다치지 않게 만들어진 절차라네.”
“그래도...”
나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봐주는 요안나 선생님의 눈길을 받으니 나는 묘하게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데비로스 교장은 별다른 낌새를 채지 못한 듯, 대사제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마침 이곳에 대사제님도 계시니... 저 공간이 사악한 공간이 아닌지, 위험한 공간이 아닌지 먼저 확인해 주시면 어떨까요?”
대사제님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기도에 들어갔다. 갑자기, 대사제님의 온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 톨라츠 아저씨가 에아임 형과 나를 축복했을 때, 그리고 대사제님이 식사 시간에 우리를 축복할 때, 대규모의 신성력을 쓸 때 신과 연결되는 빛이다. 평소보다 강한 빛을 뿜어내던 대사제님은 길게 한숨을 쉬며 몸의 빛을 거두었다. 한참 침묵하던 대사제님을 모두가 바라보았지만, 차마 채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참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트리클이시여...”
나직하게 두 손을 펼치며 탄식한 대사제님은 다행히 모두를 길게 기다리게 하지 않고 말했다.
“우선 신께서는 이 공간이 사악한 의도를 가졌거나, 혹은 들어간 이를 다치게 할 것이라고는 하지 않으셨소.”
요안나 선생님과 이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운데 대사제님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신께서는 우리가 저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시오.”
“네에?”
사제님의 표정은 침중했다. 애초에 흰소리 같은 걸 하실 리도 없고, 신께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사제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겠지만, 그런 표정을 지으니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신께서는 저 공간이 열린 것에 대해... 어... 음... 그렇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듯하오. 그러니 저 안의 내용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도 썩 탐탁찮게 여기시는 듯하오.”
“그럼...”
키오이그의 말에 대사제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소. 열린 공간에 안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러나 신께서 내용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이 두 가지를, 아니, 오나스 관장이 말한 것까지 세 가지를 조합하면 길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소.”
잘 하면, 저 공간의 정보를 망가트리지 않고도 들어가 볼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물체 창조(create object).”
뢰큐 교수가 갑자기 주문을 외워 만들어낸 것은, 튼튼해 보이는 긴 밧줄이었다. 대략 열 걸음 정도 되어 보였다.
“이리 주십시오.”
키오이그가 그 밧줄을 뢰큐 교수에게서 건네받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백작님, 놀라지 마십시오.”
그러더니 그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밧줄이 스르르륵 움직이더니, 내 몸통을 몇 차례 이런저런 방향으로 감기 시작했다. 너무 아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헐렁하지도 않게. 튼튼하게 내 몸을 묶은 밧줄은, 내 등에서 그 꼬리를 길게 뒤로 드리우고 있었다.
“물체 창조.”
“물체 창조.”
요안나 선생님과 이브가 차례로 주문을 외워, 역시 똑같은 길이의 밧줄을 만들어냈다. 키오이그가 다가가 주문을 외우자, 내 등에서 이어진 꼬리 밧줄에 차례대로 선생님의 밧줄과 이브의 밧줄이 이어져, 꼬리의 길이가 대략 스물다섯 걸음 정도 되었다. 키오이그가 마지막으로 밧줄의 반대쪽 끝을 향해 주문을 외우자, 내 몸에 밧줄을 걸었던 것처럼 그의 양 어깨에 밧줄을 걸어 매듭을 지었다.
“고맙소, 키오이그 경.”
“뭘요. 교장님과 함께 조사도 몇 차례 하지 않았었습니까.”
데비로스 교장이 밧줄을 몇 차례 당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는 나를 보며 말했다.
“백작님도 마법사 교육을 받았었으니, 마법적 신비를 존중해야 하는 것을 잘 아실 것이오.”
물론이다. 지금도 <시스템>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숨겨진 종족인 그레이 엘프를 직접 보기도 했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은 말했다.
“그간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던 대도서관의 마법진이 이런 현상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오나스 관장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저 안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정보가 들어있을 것이고, 당연히 막대한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하지만...”
데비로스 교장은 대사제님을 잠시 보았다. 대사제님은 아까 그렇게 말한 이후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계실 뿐이었다. 마치,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듣지 않겠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의 뜻은 우리가 저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듯하오. 그러니...”
“알겠습니다. 저 혼자 다녀오도록 하죠.”
“물체 창조.”
교장은 주문을 외워 내 허벅지만한 네모난 나무토막 두 개를 만들어내어 내 손에 안겼다.
“잠시 반응을 지켜보며 결정하겠지만, 일단은 백작이 먼저 접근해 보시오. 만약 계단 앞까지 갔을 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무토막을 괴어서 만약 저 문이 닫히더라도 완전히 닫히지 않게끔 해 두시오.”
그리고 마블라드 교수가 다가와 물통 하나를 건넸다.
“얼마나 오래 있을지 모르니 이걸 가져가시오, 백작.”
마치 탐험을 나서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챙겨주셔서.”
“백작에게 신의 가호가 있길.”
눈을 죽 감고 있다가 눈을 뜨고 나를 향해 말한 대사제님을 보고, 그리고 죽도록 걱정스럽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역력한 요안나와 이브를 보며 한 번 웃어주고,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통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희고 검은 바닥을 향해 한 발을 내딛자, 갑자기...
우우우웅.
다시 마법진이 울리며, 돌의 틈새로 빛이 휙 하고 가로세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빛이, 내가 밟은 돌의 테두리를 빛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끝나지 않는 달리기 경주를 하듯 빙글빙글 돌고 있던 빛덩어리들이 갑자기 멈추더니, 덩어리 하나가 나를 향해 둥둥 떠 날아오기 시작했다.
“아...”
탄성을 내고 있는 내 앞, 한 걸음 정도에 그 빛은 떠 있었다. 표정도 없고 얼굴도 없었지만, 그 빛은 나를 향해 마치 웃어주듯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신중을 기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긴장한 내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지는 것만 같았다.
후우. 심호흡을 한 나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자, 내가 새로이 내딛은 타일 역시 빛나기 시작했다. 빛덩어리는 마치 나를 앞에서 인도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둥둥 떠 있었다. 다시 한 걸음. 똑같다. 마법진은 약하게 진동하고 있지만,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다.
‘띠링!’
<본 시스템이 보증한 공간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거겠지? 나는 자신있게 몇 걸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가 밟은 타일들이 차례대로 빛났다. 어느새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나를 인도해 온 빛덩어리 뿐만 아니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개의 빛덩어리 역시 마치 나를 환영하듯 내 앞에 와서, 춤추듯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가겠습니다!”
그렇게 외친 후, 나는 첫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 우우우웅. 마법진이 다시 한 번 길게 울었다. 그러더니,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오!”
누군지 모를 사람이 탄성을 내는 것을 들으며, 나는 첫 계단에 나무토막을 괴어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게 한 다음, 아래로 두세 걸음 걸어내려갔다. 그 순간.
“문을 연 자가 문에 들어섰다.”
마치 공간 자체에서 소리가 나듯, 바닥 전체에서 울리듯, 그 울림이 마치 내 몸에 직접 소리로 들어오듯 소리가 들렸다. 들리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누군가가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소리는 귀로 들린 소리가 아니다. 몸으로 들린 소리다.
“문을 열지 못한 자가 있으나 접근하지 않으니, ‘기록의 방’은 문을 연 자를 환영할 것이다. 문을 연 자여. 다만 안의 내용을 문을 열지 못한 자들과 나누지 말라. 언젠가 그 정보가 이 방으로 다시 흘러들어올 것이니, 그대가 그리 하는 순간 이 기록의 방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아. 하긴, 대륙 모든 정보가 이리로 흘러들어오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공간은 웅웅거렸다.
“대신 이 방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괜찮다. 이제 방 안으로 들어가라.”
나는 군침을 꿀꺽 삼킨 후,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손잡이 하나 없는 문이었지만, 내가 손을 가져다대자 마치 사라지듯 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와아.
방 안은 아주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다. 장식 하나 없지만 단아하고 단정한 나무 선반 위에, 고풍스러운 두루마리가 가득가득 올려져 있었다. 먼지 하나 없고, 비뚤어진 두루마리 하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나를 둘러싸고 춤추고 있던 빛덩어리들은, 공간으로 들어오자마자, 마치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듯, 멀리 날아갔다.
다시 공간이 웅웅거렸다.
“문을 연 자여. 그러나 그대는 이 공간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용되지 않은 두루마리에 대해 욕심을 내지 말지어다. 허용되지 않은 두루마리에게 그대 역시 저 밖에 있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격이 없음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빛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 작품 후기 ============================
세상에.
투베 첫 페이지라니.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게 실화냐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한 건지...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영생부유령 님 // 그러게요. 정말 덥네요.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니코틴 님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늘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龍帝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