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7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레코딩 챔버’는, 넓지 않았다. 끽해야 요안나 선생님이나 이브의 방 정도의 넓이였다. 한 명이 대충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의 방. 그 방의 양 벽에 넓은 3층짜리 선반이 있었고, 그 3층짜리 선반에는 두루마리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잠시 빛에서 시선을 돌려 정면, 선반 사이에 만들어진 짧은 복도의 끝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보기에도 어지러운 마법진이 있었다. 저런 마법 회로는 내 전공도 아니거니와... 설령 내 전공이라 한들, 저걸 연구하려면 평생을 보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저걸 궁금해 할 때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정보 확인.’
‘띠링!’
<물품 정보>
<레코딩 서킷 – 아티팩트. 랭크 : SSS>
<레코딩 챔버의 핵심. 대도서관에 모이는 모든 정보를 통합하고, 그 통합된 정보를 요약하거나, 또는 정보간의 연결에서 오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어 기록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하부의 마법진은 모인 정보를 종이로 기록해내는 역할을 한다.>
뭔가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떠오르려는 그 순간. 다시 ‘띠링!’ 소리가 들렸다.
<히든 퀘스트 – 안계(眼界) 클리어!>
<한 사람의 상상력의 한계는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에 제약을 받습니다. 당신같은 북부인에게 남부의 습하고 찌는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상상 이상의 물건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의 안계를 크게 틔워줄 수 있습니다.>
<당신은 SSS급의 아티팩트를 발견하여 그로 인해 안계가 크게 확장되게 됩니다.>
<보상으로 아티팩트 제작권이 지급됩니다.>
<자세한 것은 아티팩트 제작권 항목을 참조하세요.>
응? 내가 그 아티팩트 저작권 항목을 클릭하려고 하는 순간... 다시 방이 우르릉 울리며 말했다.
“거기까지다. 문을 연 자여. 그대에게 허용된 정보만을 보라. 그 이상은 방의 주인으로서 용납되지 않는다.”
“방의 주인이라고요?”
혼잣말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방이 대답을 했다!
“그럼 너는 저 바닥에 떨어진 두루마리들을 누가 정리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방은, 짧게 세 번 진동했다. 마치, 껄 껄 껄 웃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신이 주기적으로 와서 이 방에 있는 정보를 읽는 겁니까?”
“그렇다. 그를 위해 만든 방이다. 물론, 그대같은 자들을 위한 방이기도 하지.”
“저 같은 자라고요? 저 같은 자가 여럿 있었습니까?”
“허락되지 않은 정보이다.”
방을 상대로 협상을 할 수도 없고 이거 진짜...
“당신은 누구십니까?”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터. 그 이외의 것은 말해줄 수 없다.”
우르릉 우르릉. 하도 뱃속까지 울리다보니 속이 이상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그만 물어봐야지. 내일 에스를 만나니 에스에게 슬쩍 기회봐서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사를 잊었군요. 저는 인간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제국력 394년생이며 곧 스무살이 됩니다.”
우르릉.
“알고 있다. 인간 기리인 모스. 그대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대가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나는 모두 알고 있으며, 그대에게 몇 가지 정보를 허락해 줄 수 있다.”
“전부 대답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마치 사람이 곤란한 질문에 답변을 늦게 하듯, 방은 몇 초간 진동이 없었다. 잠시 내가 방을 화나게 했나 하고 쫄아있던 도중, 방은 우르릉거려 말했다.
“미안하다. 그대가 모든 것을 알면 그대의 행동은 크게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라는 존재를 있게 한 인과율이 변화하게 되겠지. 그런 결과는 이 방의 주인인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 너무 정중하게 나오다보니 뭐라고 하지도 못 하겠고. 애초에 방을 상대로 말싸움을 하다니, 그것도 이 자리에 없는 자를 상대로 말이다...
“지금 그대를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한 것도 나로서는 큰 호의를 베푼 것이다. 공감의 길을 택한 그대에게 주는 나 나름의 보상이라고 이해하면 좋겠군.”
그래. 싸울 수도 없는 상대이지만, 싸울 일도 아니다. 애초에 대륙의 어떤 사람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기회가 왔다는 것을 즐거워할 일이지, 왜 그게 세 개 밖에 안 되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왜 안 되냐를 한탄할 일이 아니다. 나는, 첫 번째 빛을 향해 돌아서려다, 웬지 찜찜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해서,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방의 주인이시여.”
“문을 연 자가 예의를 잊지 않으니 이 또한 멋진 일이구나.”
다시, 방이 우웅 우웅 우웅 하고 울었다. 그걸 나는 껄껄껄 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첫 번째 빛덩어리를 바라보았다. 내 눈길이 닿자, 어느 선반 앞에 떠 있던 빛덩어리는 그 선반 위에 올려진 여남은 개의 두루마리 중 하나의 손잡이에 쿡 하고 닿듯이 올려졌다. 뭐라고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는 장면이라 나는 빛덩어리에 손을 얹었다.
찌릿!
“아얏!”
그 빛덩어리에 내 손이 닿자, 갑자기 찌르르한 느낌이, 팔이 저릴 때의 느낌보다 한 천 배는 강한 것 같은 찌릿한 느낌이 내 팔을 타고 올라와, 내 몸통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야야야... 이게 대체 뭐야...”
우르릉.
“예의바른 자에 대한 방 주인으로서의 보답이다.”
보답이 아픔이라고요...? 당신 그런 취향이었습니까? ...라고 나는 말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방을 상대로 말싸움을 하고 싶게 만들만큼 그 통증은 날카로웠다.
“그대에게 조만간 그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이니 맞겠지만, 설마 남은 두 번도 지금처럼 아픕니까?”
우웅 우웅 우웅. 우우우웅.
“원래 뭐든지 처음은 아픈 법이다.”
...하아. 방이 농담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어쨌든, 아픔도 다 가라앉았고 해서, 나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길고 긴 두루마리를 펼치자, 스르르륵 하고 내 손안에서 두루마리의 막대가 빙글빙글 돌며, 제멋대로 종이가 움직였다. 하아. 책이었으면 제멋대로 페이지가 넘어갔겠구만. 딱, 필요한 정보만 보여주겠다는 건가... 내 손 안에서 제멋대로 돌아가던 막대가 딱 멈추고, 두루마리가 펼쳐진 채로 고정되었다.
<세월의 힘이란 정말 강력한 것이다. 한없이 복잡했던 사건이 오랜 후의 역사에는 그저 단순한 한 마디로 정리되기도 하며, 농담거리에 불과했던 일이 세월이 흐른 후에는 어느 거대한 변화의 끄트머리인 일도 있는 법이다. 거짓말이나 둘러댄 말이 진실이 되고, 소수가 아는 진실이 다수에게는 거짓으로 남는 일 정도는 왕왕 있는 일이다.>
뭐야 이건. 수필인가.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다음 문장을 보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주 좋은 예가 바로 트리클 교이다. 트리클 신이 임시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반쯤은 억지로 떠맡은 책무와 임기응변으로 둘러댄 말이, 어느새 대륙의 모든 자가 믿는 진실이 되지 않았던가. 그의 성격이 지금처럼 공정함과 균형을 좋아하고, 선행과 악행 모두에 빠르든 늦든 대답을 하는 성격이기에, 지금과 같은 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작을 아는 자들에게 있어 지금의 트리클 교는 일정부분 기만을 품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친다. 읽어서는 안 되는 정보인 것 같다. 트리클 신이 왜 이 방에 내가 들어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는지 알 것만... 아니, 잠깐. 탐탁치 않게 여기는 정도가 아니고,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라도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지금 신에게 불경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지난 전장을 통해, 아니, 프그단과의 만남을 통해 약간은 갖게 되었던 트리클 신에 대한 의구심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의구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를 불경스럽게 여겨야겠지만... 아까 안계(眼界)라 했던가. 넓어져버린 내 눈 닿는 경계는 이미 그런 마음보다는 의구심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나머지 글을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흔히 인간들이 그렇게 말하듯 ‘하얀 거짓말’은 그저 기만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 공정하게 평가를 내리는 자라면 트리클이 홀로 남은 이후 결코 제멋대로였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니, 나는 지금까지 그러했듯, 더 지켜보고자 한다. 만약, 그가, 그의 기만이 깨어지는 경우에도 지금의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그를 선신(善神)으로 인정해도 좋으리라.>
딱딱딱.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내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나는 너무나 큰 사실에 덜덜덜 떨고 있었다.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희귀하고 긴박한 상황입니다. 의지력이 발동합니다.>
<냉철이 의지력에 의해 보정을 받습니다. 보정 계산 중... 보정 결과는 100을 초과할 수 없습니다. 연산 결과, 보정된 냉철은 100입니다.>
서서히 몸의 떨림이 멎는 것을 느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두루마리를 다시 말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루마리는 아까처럼 저절로 휘리릭 감겨들었다. 나는 감겨든 두루마리를 원래의 자리에 잘 올려놓고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고마워, 시스템.
<침착하십시오. 그러기 힘든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당신은 인간의 대표로 여기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스템의 너무나 큰 말. 의지력에 의해 버프된 냉철이 아니었다면 다시금 온 몸이 떨릴 것만 같은 중압감이었지만, 나는 대륙에서 뭔가를 참는 것이라면 손꼽을 정도로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다시금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두 번째 두루마리로 넘어갔다. 휘리리릭. 아까처럼 내 손 안에서 제멋대로 두루마리가 돌더니, 중간의 어느 부분이 펼쳐진 채로 고정되었다. 시험삼아 두루마리를 움직이려 해 봤지만 마치 풀로 바른 것처럼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대륙에는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도 많고, 그렇기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도 많다. 하지만 그런 신비들도 사람들의 입소문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모든 소문과 정보를 잘 모으다 보면 그러한 신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특히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곳 중 하나가 남부의 대수림이다. 알다시피 대수림에 치르낙 대왕이 뚫은 길은, 그때까지만 해도 숲에서 일정 수의 개체가 살아남아 있던 엘프들과의 협상을 통해 뚫은 길이었다. 지금은 길이 뚫어져 있다는 것 말고는 큰 의미는 없지만. 하지만, 치르낙도, 인간들도, 심지어 그 숲에 거주하던 엘프들마저도, 이 숲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리라.>
뭐라고... 나는 눈을 몇 번 껌벅껌벅해 봤지만 씌어진 글씨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건, 실제다. 실화다. 어떻게, 하나같이 충격적이지 않은 정보가 없구나...
<그럼 그 대수림은 왜 만들어진 걸까. 엘프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대수림 깊숙한 곳까지 탐험하고도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뚫는 인간들에게 우연히 그 정보가 전해지게 되었지만, 기록에 남긴 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나 그를 농담으로 치부했기에, 그 정보는 지금까지 묻혀진 채로 남았다.>
<그럼 그곳에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부터는 소문일 뿐이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어마어마한 높이의 산이었다고 한다. 백색 산맥의 최고봉에 견줄 법한 그런 높은 산이, 희한하게도, 넓은 호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엘프들 중 그 산에 가 보겠다고 배를 만들어 띄운 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분명 그 산에 닿는 모습을 멀리서 볼 수 있었음에도 어느 순간 그들은 배째로 실종되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이거, 정말 실화냐...?!
============================ 작품 후기 ============================
너무 많은 사랑을 주셔서 좀 얼떨떨합니다.
내려갈까봐 겁부터 덜컥 나고요.
최선을 다해,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龍帝 님 // 정말 제목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니코틴 님 //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달라붙어 있어 보겠습니다 ^^;
체크필통 님 // 응원 감사합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더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