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0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대부분의 행정일을 보는 건물들이 그러하듯 1층은 외부인, 직급 낮은 사람, 대민부서 등등이 뒤죽박죽이 되어 시끄럽다가, 위로 갈수록 높은 사람들의 방이나 회의실 같은 것이 나오면서 조용해진다. 제국 수사기사단 본부라 해서 예외는 결코 아니었다. 한 층만 올라왔는데도 상당히 조용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증거로, 아드마 경의 부츠가 대리석 계단에 부딪히는 소리가 딱, 딱 울리고 있었다.
흐음.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분은 원래부터 이렇게 딱딱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음... ‘약점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긴장하고 있는 느낌인데. 새로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기도 하고 해서, 나는 오랜만에 속으로 외쳤다. ‘정보 확인’.
<이름 : 아드마 수르제므
나이 : 24
HP : 1990/1990
힘 : 77
민첩 : 94
지력 : 92
마나친화력 : 69
매력 : 77(-10)
지구력 : 84
특수 : 조직화 88, 이성에 대한 두려움 92
스킬 : 무기술 B, 질주 A, 수사 B+>
<해당 기수의 수석졸업자입니다. 현재는 수사기사단 정보부에서 근무중입니다.>
<스스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낮추는 노력을 하고 있어 매력에 디버프가 붙어 있습니다.>
으음... 아까의 첫 인상대로 아드마는 분명 꾸미면 예쁠 것 같은데, 그걸 넘어서 일부러 안 예쁘게 꾸미고 있다는 건가. 왜 그럴까? 기수의 수석 졸업자 정도라면 꽤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일텐데? 그런데 ‘이성에 대한 두려움’은 뭐야 대체.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앞서서 걸어가는 그녀는 일부러 과장되게 딱, 딱,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호기심이 앞선 나는 결국 소리내어 물었다.
“저...”
“네, 네?”
분명히, 극도로 통제했지만,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는 그녀. 아니, 화들짝 놀랐다기보다, 저건... 무서워서 뒤로 뛰는 거다. 대체 왜? 내가 무섭... 아.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게 저렇게 큰 건가? 나는 얼른 적당한 질문을 생각해 내 둘러댔다.
“몇 층이죠?”
“아... 4층입니다. 4층에, 부장실이 모여 있는 곳에 정보부장실도 있습니다. 부장님은 부장실에 계십니다.”
“네,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웃어보였다. 자랑이라기 뭐하지만, 가장 잘 먹히는 표정 중 하나이니까. 그러면서 그녀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보통의 사람들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건 안 느끼건, 적어도 예의바른 미소에는 미소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간신히 미소라고 봐 줄 수 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간신히 자신을 통제해서 웃고 있는 듯한.
으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머릿속에서 소설들이 동시에 몇 가지, 제 스스로 써내려가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렸다. 나중에 형한테 슬쩍 물어봐야겠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새 4층에 다다랐다. 앞장서 걸어간 그녀가 어느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부장님. 모스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어. 들어와.”
형의 목소리.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형이 일하는 방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을 방이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형의 사무실은 꽤 넓었지만, 온통 서류와 책, 지도, 메모들로 꽉 차 있어서 넓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창문의 반대쪽, 그러니까 우리가 열고 들어온 문의 옆을 보니 거대한 대륙 전도와, 제도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에도 메모가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서류들은 마치 스스로 번식하듯, 책상 위에서 흘러넘쳐 바닥과 회의용 테이블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저 쪽 벽면은 서류철과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그리고 형은 서류가 번식하고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나마 이 쪽으로 오는 길은 아무 것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기리인, 어서 와라.”
“...고생하시네요, 형.”
내 첫 감상은 그거였다. 저 정도로 일한다는 건 얼마나 일이 많고 힘들다는 걸 말해주는 걸까. 형은 피식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아드마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드마 경. 미안하지만 차 한잔씩만 가져다 주겠나.”
“네, 부장님.”
응? 생각보다 편하게 대하네? 내가 약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그녀는 휙 하고 뒤돌아 방을 나섰다. 밖에 차를 탈 수 있는 곳이라도 있는 걸까. 형을 바라보니, 형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말했다.
“왜, 뭐가 이상해?”
역시 눈치챘구만. 눈치 하나는 누구보다 뛰어난 에아임 형이니까. 실제로, 시스템이 띄워준 글을 읽고 있다는 걸 살짝이라도 눈치챘던 건 에아임 형이 유일했고 말이다.
“아뇨, 저 아드마 경 말이에요...”
“아드마가 뭐?”
‘남자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는데 형은 안 무서워하길래’라고는 물어볼 수 없으니...
“아까, 제가 말 걸었는데... 좀 뭐랄까...”
“무서워하지?”
척하면 척인 대화상대와는 이래서 이야기하는 재미가 있다니까.
“네, 그랬어요. 좀 피하는 것 같더라구요.”
“기리인 너로도 소용없었나....”
“네?”
“아냐, 좀 있다가 얘기해 줄게.”
형의 판단은 탁월했다. 다섯도 세기 전에 아드마가 쟁반에 찻잔 두 개를 받쳐들고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형이 테이블 위의 서류를 대충 모아모아 자리를 만들자, 아드마는 우리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두 발을 딱 붙이며 군례를 올린 후, 정확한 제식으로 뒤로 돌아 방을 나섰다.
“하이고... 쟤가 저러지만 않았어도 완전 물건인데...”
찻잔을 들어 홀짝이는 것 같았지만, 실은 눈은 문 쪽을 주시하며 눈치를 보던 에아임 형이, 아드마가 멀어진 게 확실해진 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요?”
“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나봐. 제 나이 또래의 남자들을 되게 무서워해. 어, 그러니까 공포에 떤다기보다...”
“바퀴벌레?”
내가 툭 던진 한 마디에 형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이야기도 잘 안 하려고 해. 하이고, 그러니 수석 졸업자에 4급이나 됐는데 여기서 내 비서 같은 역할이나 하고 있는 거지... 기리인 너라면 통할 줄 알았는데... 쩝.”
“형, 제가 무슨 루오페 자작이에요?”
“차라리 그 사람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은 치마만 두르면 바윗덩어리도 꼬시려고 들었을테니, 아드마에게서 무슨 반응이라도 끌어냈겠지. 기리인 너도 안되면 대체 어쩐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형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갔던 일은 잘 됐니?”
“아...”
나는 형에게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아, 기록하지 않고 보고하지 않는다는 걸 조건으로 해서 말을 꺼냈다. 세 단체가 모였지만, 아카데미도, 대신전도 답을 찾지 못했던 일. 대도서관에서 마법진을 써 보자고 했던 일. 마법진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마법진이 변하며 아래의 비밀의 방이 드러났던 일.
“뭐라고?”
“저도 신기해요, 형.”
그래서 나는 그 뒤의 일까지 말해주었다. 방이 내가 다른 것을 읽는 것도 막았고, 내가 읽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도 막았다고. 단지 방의 존재만을 알렸을 뿐이라고.
“세상에...”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은 말했다.
“그럼 우리는 열심히 기록을 모으고 책을 모아서, 그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가 그걸 편하게 앉아서 모으게끔 해 주고 있네?”
아... 그런 쪽으로는 생각 못 해봤는데.
“뭐야, 그 놈은. 편하게 방 만들어서, 갖다주는 정보 받아서 자기만 아는 정보 만들어놓고, 보여주지도 않고. 말하면 방 없앤다고 협박이나 하고. 무슨, 인간이 학생이고, 자기는 교장 선생이라도 돼? 뒷짐만 지고?”
형은 약간 화가 난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음... 대도서관을 만든 인간 이상의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법사들과, 누군가 자신을 관찰한다고 생각해서 껄끄러워하는 일반인들의 차이인 걸까.
“암튼, 그래서 문이 닫혀버렸다고?”
“네. 그래서 나와서 제가 겪었던 일을 얘기해 줬고, 관장님과 부관장님, 그리고 이브 교수가 얘기해보더니 이 이야기는 비밀에 붙이기로 했어요.”
“비밀이라...”
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하긴, 지금 나같아도 그 사실을 듣고 나니 도서관 가기 싫어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겠지. 그럼 대도서관은 지금같은 번영을 결코 누릴 수 없을 거야. 게다가 관장은 비밀의 수호자였다며.”
그러던 형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고... 기리인, 기리인. 어째 너는 항상 일을 끌고 다니냐. 너 옆에서는 맨날 사건이 생기냐. 수사 기사단은 사건이 없을수록 좋단 말이다.”
“죄송해요, 형. 올해가 제게 좀 이상한 해인가 봐요.”
형은 나를 뚱한 눈길로 건너보다가, 예의 그,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남대륙 포로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그때 전장에서 봤지만, 남대륙이 사용하는 주술은 우리가 사용하는 마법과 많이 다르더군요. 그 주술을 쓰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게 어떤 건지 물어보고... 혹, 제가 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요.”
“흐음...”
형은 두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손을 깍지끼어 입에 가져다 댄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자세 그대로 나에게 말했다.
“기리인, 가능하다면 네 부탁을 온전히 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손을 풀어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손가락을 튕겨서 주술을 부리는 그들이 이 지하에서 주술을 부리기라도 하면, 이 지하감옥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그러면 제도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 거다.”
“하긴, 그렇죠... 여기는 중대 범죄자들을 모아둔 곳이니까요...”
“그래. 그래서 준비는 시켜 뒀지만, 아쉽게도 주술을 직접 시전하는 걸 볼 수는 없을 거다. 그자는 손을 묶고, 몸을 고정시키고, 입만 움직일 수 있게끔 할 거야. 그리고 그 자는 북대륙어를 못하니 통역을 통해서 이야기해야 할 거다. 당연히 비협조적일 거고.”
가만. 그러고 보니, 최악의 조건인데...
‘띠링!’
<서브 퀘스트 – 불가능한 설득?>
<통역을 통해, 극히 비협조적인 상대의,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는, 불가능에 가까운 설득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당신의 모든 언변과 기술을 동원해 상대의 협력을 이끌어내세요.>
<실패 시, 앞으로 주술을 배울 기회가 사라집니다.>
<설득에 성공 시 주술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뭐?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고? 아놔...
“그 조건에서도 괜찮다면 면담을 주선해주마.”
퀘스트도 받았고, 르플레스탁도, 그리고 ‘방의 주인’도 내가 주술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권했다. 조건이 빌어처먹게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걸 지금 안 하겠다고 하면 여기서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거다.
“네, 형. 부탁드릴게요.”
그러자 형은 고개를 끄덕인 후, 책상으로 돌아가 자그마한 종을 딸랑딸랑 흔들었다. 그러자 얼마 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밖에서 아드마의 말 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부장님.”
“아, 그래. 이 친구를 지하 3층, 특별 면담실로 데려다줘라. 거기 이미 죄수 한 명이 와 있을 거다.”
부지불식간에 나는 아드마의 표정을 살폈고, 아드마는 분명 아직 덜 익은 감을 먹는 떨떠름한 빛을 순간적으로 띄웠다가 사라지게 하며 말했다.
“네, 부장님. 백작님, 저를 따라오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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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미틱 시에서 시청 지하의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었던 것이 기억났다. 본질적으로는 이 곳의 지하 감옥도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단지, 훨씬 크고, 마법이나 마력석이 많이 투여된 듯, 공기가 생각보다 신선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와 지하 1층의 복도를 걸으며,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좌우를 둘러보았다.
철창살 안으로 죄수들이 발에 무거운 차꼬를 단 채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혹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간혹 나와 눈이 마주치는 죄수들의 눈빛은 분명 보통 사람들의 눈빛과는 달랐다. 살기? 글쎄. 그걸 살기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드문드문 걸려있는 파란 색의 마력석 등의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빛은 썩 기분좋은 눈빛은 아니었다. 아마 호위 병사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지 않았다면 욕설 깨나 들었을 것만 같다. 꼭 이 기분나쁜 복도를 지나가야 하나.
“아드마 경.”
나는 반쯤은 일부러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네, 네?”
또다시 깜짝 놀라듯 몸을 피하며 대답하는 그녀.
“아까의 계단은 똑같은 곳에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오르고 내릴 수 있게 만들었으면서, 왜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저리 멀리 만들어 둔 겁니까?”
그녀는 눈길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듯, 분명 예의바르게 서 있었지만 시선은 약간 피한 채, 마치 내 옆 뒤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말했다.
“만약 지하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계단을 막기 편하게 만든 겁니다.”
아. 하긴, 그렇겠구나. 그 말을 마친 아드마는 내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고 다시금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으아. 중증이다, 중증. 저 정도면.
============================ 작품 후기 ============================
덥고 습하네요.
이런 때 체력 깎아먹고 감기 같은거 걸리면 오래 갑니다. 여러분들 건강 조심하세요.
과분한 사랑을 주셔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이러다가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지는 게 또 사람인가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선/추/코/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중심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재미있는 글 쓸 수 있게끔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까만까미 님 // 연참을 해 드리고 싶지만 제 능력으로는 하루 이 정도가 고작...ㅠㅠ 감사합니다!
인페르니우스 님 //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사실 여기서 기리인과 관련된 여자를 더 늘리면 머리 터집...ㅋㅋㅋ;;; 그렇다고 그냥 일회성 캐릭터는 아닙니다.
강철의혼 님 // 추천 감사합니다!
스쳐지나간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저도요! ㅠㅠ 놀면서 그냥 책이나 읽고 싶어요ㅠㅠ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기와인 님 // 칭찬 감사합니다. 쿠폰 감사합니다!
체크필통 님 // 기리인이 꼬신 것도 아니니 한 번만 봐주시죠 ㅎㅎㅎ;
엘라임a 님 // 칭찬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돌자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별그리고나 님 //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하늘에서뚝딱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네, 끝까지 몸과 마음 모두 건강 유지하며 잘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