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1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2층은 1층보다 더 어두침침한 것 같았다. 공기도 좀 더 습하고 차가운 듯한 느낌. 지하로 내려와서 그런가. 물론 1층처럼 공기를 정화하는 마법이라든가 이런 건 사용되고 있겠지만, 죄수들의 편의를 봐주는 데까지 마법이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려면 하기야 하겠지만... 어느 누가 죄수들에게, 그것도 이 지하층까지 끌려내려올 정도면 국사범 정도일 죄수들에게 건강까지 신경써 주겠는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놓겠지. 누군가가 쿨럭쿨럭 밭은 기침 소리를 내는 것이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실내용 창을 들고 지하 2층의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두 병사가 우리를 보고, 정확히는 아드마 경을 보고는 군례를 올렸다. 아드마 경은 절도있는 동작으로 그에 답했다. 하지만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내가 보기에도 그녀의 목과 어깨에는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기리인 모스 백작님을 모시고 왔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지하 3층이라는 말에 두 병사는 약간 긴장했다. 한 병사가 창을 벽에 기대 세운 후 뛰어가, 마력석 등을 하나 들고 왔다. 그 병사가 등을 조작해 파란 불빛이 나오게끔 켠 후 아드마 경에게 건네자, 아드마 경은 마치 아주 지저분한 것을 받아들듯 조심스럽게, 손이 닿지 않게끔 등을 받아들었다. 등을 건네준 병사는 명백히 기분 상한 표정을 잠시 짓고 있다가(하긴, 나같아도 사람의 성의를 저렇게 대하면 기분 더럽겠다), 옆의 책상으로 다가가 서류를 살폈다.
“모스 백작님. 명단을 확인하였습니다. 혹 간단한 안내가 필요하실지?”
“부탁드립니다.”
“일반 사건들의 범인들을 단독으로 또는 몇 명씩 수감하는 지하 1층과는 달리, 지하 2층부터는 연쇄살인, 공권력에 대한 도전, 이단 혐의자 등 중범죄자들이 주로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 3층에는 심문을 위해 아직 처형되지 않은 국사범들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지하 3층에 있는 사람들은...?”
등불을 든 아드마 경이 우리보다 한 발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나와 그 병사가 한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현재는 지난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 아직 효수(梟首)되지 않은 대략 100여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흑인들이 대략 1/3 정도입니다.”
“그렇게나 됩니까?”
내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걸까.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지하 3층에 도착했고, 그는 “특별 ‘면담실’은 저 쪽 복도 끝입니다. 그럼.” 하고 말하고는, 마치 아까 아드마 경이 등을 받아들 때처럼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곧바로 계단 위로 올라갔다.
왜 저럴까, 하는 의문은 잠시 후 풀렸다. 파란 빛의 등을 들고 우리가 복도를 들어서자, 좌우에 있던 흑인 병사들이 마구 휘파람을 불고 뭐라 알아들을 수 없지만 희롱과 욕설임이 틀림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난리를 쳤다. 가끔씩 침을 뱉는 놈들도 있었다. 진한 색깔의 피부를 지닌 그들은 이 빛이 없는 이 좁은 공간에서 몇 안되는 빛인 우리의 마력석 등을 받아, 눈동자만 희번덕거렸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희롱 소리에 적응 안 돼서 짜증나는데 이 놈들 얼굴은 정말 적응 안 된다.
일일이 대응하기 그렇기도 했지만, 우리가 황제 폐하의 황명에 의해 수감된 죄수들을 우리 마음대로 할 권리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그 복도를 벗어나기를 선택했다. 그들이 다행히, 휘파람과 야유 정도로만 그치는 동안, 우리는 빠르게 걸어 <특별 면담실>이라고 적힌 곳에 이르렀다. 그 앞에는 병사 한 명이 서 있었다.
“기리인 모스 백작님을 모시고 왔다.”
아드마 경이 그렇게 말하자, 그 병사는 아무 말 없이 문에서 한 칸 비켜서며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리고는 문을 안쪽으로 밀어 열었다. 후욱. 문을 열자마자 나에게 다가온 첫 인상은 피비린내였다. 그것도, 갓 흘린 피의 생비린내가 아닌, 오래 된 적갈색의 피가 굳으며 내는 텁텁한 비린내였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참으며 나는 아드마 경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두웠다. 방의 천장 한가운데 달려있을 마력석 등은 꺼진 채였고, 방 한 편 구석에 있는 탁자에만, 파란색의 마력석 등이 켜져 있었다. 왜 파란색일까, 뭔가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탁자에서 눈을 돌려 방 건너편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피비린내는 거기에서 나고 있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피를 비롯한 오물들이 덕지덕지 덮어씌워져, 청소를 하고 또 해도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바닥과 벽, 그리고 천장에 남기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 특별 면담실이 왜 ‘면담’실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방 이름을 붙인 사람의 악취미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을 포함해, 온갖 끔찍한 고문 도구들이 있는, 저곳은, 고문실이었다. 저 고문 도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마음 약한 범죄자는 겁에 질려 술술술 불겠지.
하지만... 나는 마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나에게는, 상대의 자발적인 협력이 필요했다. 그런 자발적인 협력이 없다면 나는 주술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상대를 이런 자리에 불러와서 말하라니.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 아닌가.
탁자 앞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고, 한 사람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벽에 기대 선 사람은 수사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아드마 경은 그를 보자 역시 절도있게 군례를 올렸다. 그 사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꼼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어이, 마음에도 없는 경례는 뭐 그리 절도있게 하나. 아드마, ‘경’.”
아드마 경은 이를 까득 깨물며, 잇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뭔 또 선배님이야. 좆같이 생각하면서 선배라고 붙이기만 하면 그게 선배 대접이냐?”
“죄송합니다.”
“하여튼, 유난을 떨어요, 유난을. 어이구...”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는, 어두워서인지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나를 모르고 있다가, 그제야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누구...신지?”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그는 언제 자신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냐는 듯 어느새 정자세로 서서 나에게 군례를 올려왔다. 정말 빠른 태세전환이로군요.
“반갑습니다, 모스 백작님! 저는 제국 3급 수사기사 위르노 에흐트라고 합니다. 백작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네...”
내 떨떠름한 표정을 보았는지 못보았는지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제국의 젊은 영웅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정말 큰 영광입니다. 경의 공훈은 경의 의형이신 에아임 부장님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내 짧은 대답에 그는 약간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표정을 풀며 웃으며 말했다.
“잠시 저희 조직의 부끄러운 면을 보여드리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애로운 부모라도 회초리를 대어야 할 때가 있듯, 아끼는 후배가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있게끔 지도하는 것은 선배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약간은 모욕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소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숙련된 대화술에서 나는 그가 귀족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각자의 집 사정은 집안 사람이 가장 잘 알고, 외부인이 모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상황을 모르기 전에 어설픈 정의감으로 나선 일들의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을 저는 많이 본 바 있습니다.”
이 새끼 보소? 지금 나에게 ‘사정 모르면 닥치고 있어라’라고 말한 거 맞지?
‘띠링!’
<냉철이 발동합니다.>
<고급 언변이 발동합니다.>
이 새끼를 어떻게 조져놓나... 솔직히 말해 나는 그가 아드마 경울 대하는 태도 자체에는 약간의 불만만이 있었다. 그가, 선배가 후배를 지도한다고 한 말 자체는 불만이 없었다. 단지 그가, 아드마 수르제므라는 사람을, 너무 매도한다 싶어서 그게 약간 떨떠름했고, 그런 주제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나에게 살랑살랑거리는 게 꼴보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새끼가 감히 나에게 사정 모르면 닥치라고 해? 후우. 넌 뒤졌다, 이 새끼야. 비열한 자에게는 비열한 짓으로 응수해주마.
“그렇군요. 위르노 경. 그런데... 혹, 제가 오늘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에아임 부장님에게 지시를 받았습니다. 흑인들 중, 손을 묶으라는 지시를 받은 자들 가운데 한 명을 이 방으로 데려오라고요.”
“제가 그 자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들으셨습니까?”
“네, 들었습니다.”
걸려들었어.
“그럼 이런 살풍경한 환경 하에서 그 자가 자발적인 협조를 하리라는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보십니까?”
“그쯤이야, 얼마든지 ‘심문 기술’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걸 못 하시는 거로군요.”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가기엔 내 냉철이 아깝지.
“저는 이 자에게 남부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마법에 대해 묻고, 가능하다면 그 마법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경의 부적절한 조치 덕분에, 저는 분명히 엉터리로 가르쳐줄 그 마법을 배우게 되어, 몸이나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게 되었군요.”
돌려서 지적했지만, 즉 : 니가 심문 기술을 동원하든 말든, 쟤가 엉터리로 가르쳐주면 그건 어쩔건데? 그걸 배울 나는 얼마나 위험하겠냐? 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귀족가 출신 답게, 내 말에 들어있는 신랄한 지적을 그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약간 사라졌다.
“아니, 저...”
그리고 여기에서 약간은 비열한 짓.
“어쩔 수 없군요. 저는 경의 조치로 인해, 황제 폐하의 무임소 비서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군요. 몸이나 마음을 다친 자가 황제 폐하의 옆에 설 수는 없겠지요... 폐하께 너무나 큰 죄를 짓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너 폐하를 만나면 다 꼰질러버릴 거다, 라는 말이다. 폐하, 죄송합니다. 그래도 폐하는 저를 우정으로 대한다고 하셨으니까, 이 정도는 봐 주실 거죠?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며 건너다보자 그는 파란 불빛 아래에서도 명백히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 새끼야, 그 정도로 간단히 받아들일 것 같으면, 비열한 짓은 시작도 안 했을 거야.
“이럴 게 아니고, 형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와야겠군요. 동생이 머리가 감자죽이 되어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된다면 형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먼저 형님께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철푸덕. 그가 무릎이 깨어질 기세로 바닥에 엎드렸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용서를!”
보낼 때는 확실하게 보내야지.
“용서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요. 제게 위르노 경이 가지고 있는 ‘심문 기술’이 없는 게 죄지요.”
심. 문. 기. 술. 이라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끊어 읽어주자, 그는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채로 온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는 숫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배, 백작님... 제가 잠시... 정신을... 부디 저를... 용서...”
너무 당기면, 끊어진다. 약간은 풀어줘야겠지.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했다.
“솔직히 경이 준 모욕을 아직 씻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다 큰 사내가 그렇게 찔찔 짜는 꼴도 보기 싫군요. 이 모욕을 참고 넘길지, 혹은 문제제기를 할지는 앞으로 경의 태도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그 순간 경은 패가망신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네, 넷!”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는 고개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가요. 당신 얼굴을 보고 있자면 자꾸 그 ‘심문 기술’ 이야기가 떠오르려고 하니까. 저기, 2층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병사들한테 가서, 경비나 서요. 그 중 한명을 이리로 보내고.”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여 나는 그가 농땡이를 피러 탈출하는 것마저 봉쇄해 버렸다. 그가 눈물 자국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떨구며 방을 나서자, 방 안에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이 한숨을 쉬었다. 내 옆에 있던 아드마 경이, 약간은 밝아진 얼굴로 나에게 “감사합니다. 백작님.”이라고 말했다. 인사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녀가 처음으로 공무 이외의 말을 걸어준 것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 목례로 답했다.
“‘괴물 활’은 생각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고 이야기하는군요.”
명백한 제국어로, 궁성의 경비대 제복을 입고 있는 흑인이, 말했다.
============================ 작품 후기 ============================
기리인이 운이 좋게 일석이조를 노릴 수 있게 되었네요. 아드마의 경계도 풀고, 흑인 주술사에게 접근도 하고. 역시 마성의 남자...(응?)
비가 억수같이 오다가 또 쪄죽을 정도로 덥네요. 모두들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씁니다.
하늘에서뚝딱 님 // 아뇨, 뭔가 딱딱한 언니도 매력적이지 않나요? ㅎㅎ 지금 떠오르는 이미지라면... 창세기전 외전 템페스트의 앤 밀레니엄? (너무 과거로 돌아갔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나유타인 님 // 먹이감이 아닐지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거 인정합니다;;)
유한도전 님 // 그거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요 ㅎㅎ 기대해주세요!
인페르니우스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맞아요. 서류는 세포분열하는 게 틀림없어요...
니코틴 님 // 그간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키테 님 // 어떨까요? ^^;
낙화vs목련 님 // 정주행과 칭찬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liz5611 님 // 정주행과 칭찬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