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7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백작님, 어떻게, 입맛에 맞으십니까?”
“맛있네요.”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남부 풍의, 향이 강한 요리라, 내 입맛에는 완전히 맞지는 않았다. 척박한 북부에서는 암염(巖鹽) 광산을 통해 얻어지는 소금을 제외하면 향신료가 귀했으니까. 어릴 적에는 모든 게 소금으로만 간이 된 요리가 정말 지겨웠는데, 어느새 내 입맛이 거기 길들여진 모양이다. 모든 물산이 풍부한 남부식 요리는, 내 입맛에는 좀 지나치게 화려한 감이 있었다.
그래도 테리아가 나를 위해 처음 해 준 기념비적인 요리라 나는 남김없이 바닥까지 슥슥 긁어서 먹고, 에스틴이 아침 일찍 나가 사 온 따뜻한 빵을 쪼개서 그릇까지 닦아서 먹었다. 과하게 화려하다 뿐이지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술을 마신 다음 날 매콤한 스프는 정말 잘 어울렸다. 아닌 척 하면서도 내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두 부부는 티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 빵조각을 입에 넣으며, 나는, 설령 이 사람들이 나스프 공작가의 사람이라 해도,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잘 먹었어요, 테리아. 술 마신 다음날 정말 어울리는 요리네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환하게 웃으며 테리아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테리아가 내가 사용한 식기를 가져가는 동안, 에스틴은 거실로 향하는 내 뒤를 따랐다.
“주인님, 차를 올릴까요?”
“아... 아뇨. 곧 나가봐야 합니다. 갈아입을 옷을 좀 부탁해도 될까요?”
“실례합니다만 어떤 자리인지 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물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지만, 막상 대답해야 하는 나로서는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상당히 고민이 되는 그런 것이었다.
“어... 누구라고 이야기하기는 좀 그런 사람이고...”
“혹, 어느 가문의 레이디이시기라도...?”
“그건 아닙니다. 여자이기는 합니다만... 어...”
번뜩, 사실을 얘기해도 어차피 믿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설 속의 드래곤이 나에게 제도 구경을 좀 시켜달라, 고 했다고 이해하면 어떨까요?”
에스틴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백작님께서는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귀하신 분과 좀 편한 분위기에서 만난다고 이해하면 될지?”
그래, 못 믿을 줄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에스틴은 저 안쪽의 옷방으로 사라졌다.
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황태후 전하의 ‘집’이란 개념에는 안의 가구와 부속품 일체가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나라는 사람의 몸 치수를 측정한 것을 기반으로 해서 속옷, 셔츠, 바지, 양말들이 옷장 가득 꽉꽉 들어차 있을 정도였다. 주방에도 식재료가 없을 뿐 조리도구나 화덕, 오븐이 최신식으로 완비되어 있었고, 2층의 침실에 이르러서는 하물며 침대의 시트까지 여벌로 완벽히 준비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참 나.
그래서, 에스틴이 준비해 온 내 옷은, 단출한 셔츠와 바지였지만, ‘단순이 최고의 멋’이라는 말을 온 몸으로 주장하는 옷이었다. ‘옷이 다 옷이지 뭐’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을 산산이 깨어버리는 그런 옷이었다. 고귀한, 그래서 부유한 분들은 다 이런 옷들만 입고 사는 걸까...? 잠깐 상념에 빠질 뻔 했던 나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에스틴이 내민, 반짝거릴 정도로 닦인 구두를 신고 나자, 에스틴이 입을 꾹 다물고 마치 오줌 마려운 것을 참는 사람 같은 표정을 잠시 지었다.
“백작님, 무례를 용서하시길. 예의가 아니게도 제가 휘파람을 불 뻔 했습니다. 너무 잘 어울리시는군요.”
“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현관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며 차림을 점검한 후 밖으로 나가려는데, 에스틴이 정원 한가운데까지 나를 쫓아와서는 불렀다.
“백작님, 저...”
“네, 말하세요.”
약간 하대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나를 보고 내가 약간 놀랐다. 사람이라는 게 이렇게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건가? 에스틴 부부를 안지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궁성에서 백작님의 급료가 나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황제 폐하의 무임소 비서관’이었다. 아직 적절한 직책이 없기도 하거니와, 폐하께서 나를 어디에 묶어놓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매 달 10드로그의 급여를 아직까지 꼬박꼬박 수령하고 있었다. 아직 쓸 데가 없어서 대부분을 집 안에 두고 있을 뿐이지만.
“한데?”
“죄송하오나, 살림살이를 위해 예산이 약간 필요한데...”
“...뭐 그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해요. 그 돈 안 주면서 살림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간혹 있다고 합니다.”
정말? 와. 그건 무슨 심보냐. ...하긴, 북부에 살 때 가끔, 술주정뱅이 남편이 받는 급료를 모두 술값으로 써 버리고 거의 남은 것 없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집안을 보긴 했었지. 귀족이라고 별 다를 게 없는 건가.
“내 배낭 알죠? 그 안에 내가 갖고 있던 돈하고, 지금까지 받은 급료가 다 들어 있어요. 합치면 200드로그가 약간 안 될 거에요.”
“200...드로그요...”
그도 그럴 게 4인 가족이 한 달을 나는데는 대략 5드로그가 든다. 의식주와 각종 문화비, 교육비 등을 모두 포함한 가격이다. 그 40배 정도 되는 막대한 돈을 그냥 배낭 안에 넣어두고 다녔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다.
“그 중에서 10드로그는 내가 오늘 뭐 살 게 있어서 가지고 나왔어요. 나머지 중에서 필요한 금액 먼저 가져가고, 나중에 얼마 가져갔다고 나한테 얘기만 해 주세요.”
에스틴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나를 배웅하는 가운데, 나는 집 앞에 와 있는 마차에 올랐다.
“중앙 광장으로 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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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중앙 광장을 보는 건 몇 번의 경험이 있었지만, 아무런 행사가 없을 때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아이들이 참 많았다. 마지막을 불태우는 늦여름의 햇살도 아이들에게는 또 다른 재밋거리인 것만 같았다. 광장 이곳저곳에 세워진 조형물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쪽에는 분수가 있었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을 보며 까르르 웃으며 뛰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보며 미소지으며 지나가는 어른들. 제도에는 빈민촌도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이 곳 중앙광장은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를 새기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한 쪽의, 대형 마력석으로 작동하는 시계가 들어있는 탑 아래. 이 곳 중앙광장에서 가장 여유있는 생명체가 서 있었다. 내가 뛰다시피 다가가자 그녀가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젊은 레이디가 지을법한 미소가 아닌, 권세를 쥔 권력자가 지을법한, 당당함과 자신감이 어린 미소였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구나.”
“일찍 나와계셨군요, 에스.”
“나를 그렇게 부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구나. 고맙다.”
에스, 풀 네임은 에스타크 레펠 – 아니, 르플레스탁. 제국의 건국설화에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화 속의 드래곤. 지금은 파란 머리에 파란 눈의, 그리 크지 않은 키의 여자 모습이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그녀를 알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래, 제도 구경을 어떻게 시켜 줄 셈이냐?”
재미있다는 듯 웃는 드래곤 앞에서 나는 약간 진땀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제도에 오셨던 것이...?”
“내가 직접 온 것이라면 200년 전이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에도 대륙 곳곳의 일들을 대략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제도에 대해서도 모르지는 않는다, 고 해야 겠구나.”
“어... 에스. 그럼 이렇게 하실까요. 먼저 제도에서 가장 신기한 것을 만들어내는 공방에 가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제도에서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혹, 인간의 옷을 선물해 드리면, 기분이 나빠하실지...?”
에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유희를 여러 번 즐겨봤지만, 이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그대가 이 모습에 어울리는 옷을 선물한다면 나는 꽤나 흡족할 것 같구나.”
다행이다...
“실은 에스가 그 때 제게 준 선물이 너무 과분하여 약간이라도 보답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대가 수행할 관광 안내 역에 대한 보수가 아니었더냐. 나를 부끄럽게 하는구나.”
“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에스. 우선, 가실까요?”
“그래. 앞장서거라. 어디로 갈 작정이냐?”
“제가 아는 장인에게 갈 작정입니다. 장인의 이름은 디오틀라라고 합니다.”
“아. 알지. 나도 긴 잠 동안 이름을 들어 봤을 정도로 실력있는 장인인 모양이더구나.”
“제가 쓰는 활을 만들어낸 자이기도 합니다.”
“호오, 그 활 말이냐. 안 그래도 그 활이 궁금했었다. 물론 그대가 쏘는 화살은 그대가 마나를 이용해 쏘기 때문에 그 힘을 내는 것이지만, 그 특이한 활도 정말 대단해 보이더구나. 대체 어찌 그렇게 생긴 활이 작동하는 것이냐?”
으아. 지적이며 호기심이 많다는 건 결국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도 되는구나. 결국 나는 디오틀라 님의 공방까지 걸어가는 그 짧지만은 않은 시간 동안 드래곤이 쉴새없이 물어오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 주제라는 게 활에서, 마수에서, 남부의 가뭄에서, 이번 전쟁에까지... 휙휙 바뀌는 통에 나는 약간 식은땀마저 흘려야만 했다.
물론, 대화 자체는 정말 재미있었다. 합이 잘 맞는 상대와 대화하는 것은 언제 해도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했던 대화 중에서 가장 어려웠다. 분노한 선황제 폐하 앞에서 알리시아 양을 언급했던 때보다 더 말이다. 드래곤의 지적 흥미를 충족시켜 주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대는 참, 이것저것 잘 이야기하는구나. 치르낙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구나.”
“그렇습니까? 대왕은 어떠하셨기에...?”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가? 나라는 존재를 알고도 직접 이야기를 하려 들었던 것은 그대와 치르낙이 유이(唯二)하다고. 지금 그대가 그러한 것처럼, 치르낙도 나와 진심으로 대화를 하려 들었지. 내가 치르낙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던 것은 그 진심에 공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에스는, 과거를 떠올리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물론 그다지 지적인 상대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아, 오해 말거라. 인간의 기준에서는 치르낙은 충분히 지혜롭고 현명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둔해 보일 때가 많았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강대한 드래곤이시여. 당신 앞에서 어느 누가 지식과 지능을 자랑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면박을 당해도 웃으면서 대화를 붙이는 그 서글서글함과 끈기만은 정말이지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더구나. 그러면서도 결코 밉지 않고 말이다. 그가 나중에 대륙을 통일한 과정을 아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모를 리 없다. 기초 학교의 역사 시간에 중요하게 배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
“전투가 벌어지면 상대를 박살내었지만, 언제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가장 값진 승리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은 내가 그 녀석에게 일러준 말이다.”
아아. 내 머릿속의 위대한 대왕의 이미지가 약간은 흐려지려고 한다.
“하지만 참으로 치르낙 다운 말이기도 하지. 그렇게 사람들을 포섭하고 설득하고 협상해서 결국은 이런 거대한 제국의 토대를 세우지 않았더냐. 그의 아들 대에서 제국이 완성되었고 말이다.”
그렇다. 치르낙 대왕이 하페르 황가의 선조이면서도 ‘대왕’인 이유는, 그가 대륙 일통과 제국 건립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들들이 북부를 개척하고, 남부의 잔당을 소탕하며, 제도를 건립하고 나서야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대는 다르구나. 그대와의 대화는 간만에 말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구나.”
“다행이군요...”
“그대에게 오늘 제도의 안내를 맡긴 것은 바람직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대가 인간의 평균을 잘 대표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그대가 인간과 인간의 사회에 대해 나에게 가장 잘 알려줄 사람이라는 생각은 드는구나.”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나는 아하하, 웃으며 머리만 긁었다. 그 동안 우리는 어느새, 디오틀라 공방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 작품 후기 ============================
월요일은 피곤하네요.
약간 늦게 완성해서 이제야 올립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힘 내서 씁니다.
마렝고 님 // 1빠 축하!
유한도전 님 // 옆에서 멀쩡한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웃기면서도 답답하죠 ㅋㅋ
니코틴 님 // 그놈의 모기 정말... 어우... 감사합니다!
낙화vs목련 님 // 칭찬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1인칭인데다 사건을 만들어야 하는 주인공이다보니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 ㅎㅎ;;;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어우, 저 가능하다면 정말 102 찍고 싶...ㅎㅎ;;
잘되기를 님 //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보티스 님 // 어느 쪽 플래그일지는 조만간 드러날 거 같네요 ㅎㅎ; 제목 어그로는 인정합니다. 하도 지쳐서 어그로라도 끌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붙였던 제목이었거든요 ^^;;;
스키테 님 // 감사합니다!
인페르니우스 님 // 용용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ㅋㅋㅋ 감사합니다!
달빛고수 님 // 정주행과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힘내서 쓰겠습니다!
이솔렛스티나 님 // 그 떡밥은 언제 어떻게 풀겠다는 걸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ㅎㅎ;; 감사합니다!
SquareWorld 님 // 응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