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89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들어가기 전에 나는 에스에게 물었다. 아니, 묻는다기보다, 확인을 받는 것에 가까웠다. 나보다 월등한 지성을 가진 에스가 그걸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에스, 혹 제가 부탁드렸던 것을 기억하고 계시는지...?”
“물론이다. 걱정하지 마라.”
당신이 옆에 있으니 죽을 걱정은 안 하겠군요. 당신한테 미움 살까봐 걱정만 하면 되니까... 우르송은 그 명성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는 점심시간을 지나서 가서 줄을 안 섰었구나. 많은 사람들 앞에, 자그마한 종이를 나무 판에 끼워서 들고 다니는 종업원 한 명이 있었다. 나와 에스는 그리로 다가갔다. 우리를 본 그가 가볍게 인사했다.
“혹시, 기리인 모스 백작님이십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에아임 형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이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전쟁에서 ‘제일 영예로운 마차’에 앉으셨던 그 분 아니십니까. 그날 저희도 개선식을 보러 갔었습니다. 백작님이 꽃의 비 속에서 손을 흔들어주시던 모습을 보았지요.”
아, 이거...
“감사합니다.”
흘깃 에스를 보았지만, 에스는 별 흥미 없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있을 뿐이었다. 종업원은 종이를 뒤적거리더니 말했다.
“일행분께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네, 감사합니다.”
그는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는 안쪽 종업원에게 “3번으로 안내해 드려”라고 말했고, 내 나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나를 흘깃거리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북적거리고 어수선한 홀을 지나, 우리는 가게 안쪽에 있는 방들에 이르렀다. 흐음.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은 돈이 많은가보군.
“이 방입니다.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가 열어주는 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었다. 물잔을 제외하면 아직 아무 것도 날라져오지 않은 빈 테이블을 앞에 두고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까. 남자는 50대 정도 되어보이는, 땅딸막하고 둥글둥글한데다 볼은 붉은,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의 아저씨였다. 맥주 좋아하시게 생겼군. 수염도 길고, 머리카락도 길었다.
그 건너편의 여자는 오히려 키가 길쭉하고 눈꼬리가 위로 치솟아 사나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눈가에 진 주름이 약간은 그런 인상을 중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나이는... 아까 나를 알아봤던 종업원 정도? 그녀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뭐랄까. 자신이 인상 때문에 처음에 경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웃어버릇해서 자신에 대한 경계를 푸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는 표정은 웃는 표정을 짓는 것과 별개로, 안으로는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을, 그리고 에스를 함께 대동한 목적을 잊지 말자.
“호오.”
흥미롭다는 듯, 에스가 두 사람을 훑어보며 말했다. 두 사람의 눈이 나를 떠나 에스에게 이르렀다.
“재미있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게 말이다.”
두 사람은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약간 더 커지더니, 에스가 말했다.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구나?”
에스는 예의 그 어색한 존댓말투가 아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하대 말투를 쓰고 있었다. 이미 저들이 어느 정도 짐작했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돌아보더니, 다시 에스 쪽을 바라보았다.
“저, 혹시...”
“혹시?”
“...혹시 당신께서는 위대한...”
“수식어는 빼거라. 이미 3백년 전에 만나본 적이 있지 않느냐. 그 긴 세월이 지났건만 그대들은 그대로이구나.”
두 사람은 뭐라 이름붙이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에스를 건네다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에스. 긴 잠에 빠지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에스, 모든 나는 것들의 왕이시여.”
에스는 여전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 300년 만이구나. 그 때는 따로따로 보았었지. 그 때도 이미 새로 태어나는 구성원이 없어서 그대들은 실무자이자 중견이자 원로였는데, 이제는 더하겠구나. 아루탄, 에아랍. 오랜만이다.”
아루탄, 에아랍이라. ‘정보 확인’.
‘띠링!’
<이름 : 아루탄 크시스 다피르
나이 : 984
HP : 5600/5600
힘 : 91
민첩 : 78
지력 : 89
마나친화력 : 69
매력 : 81
지구력 : 96
특수 : 변신술 90
스킬 : 회피 A+, 제작 A+, 요리 A->
<노움 족의 현재 족장입니다. 종족의 재생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름 : 에아랍 아마이바
나이 : 1023
HP : 2800/2800
힘 : 84
민첩 : 99(+2)
지력 : 91
마나친화력 : 88
매력 : 83
지구력 : 78
특수 : 변신술 92
스킬 : 비행 S, 기초마법 A->
<하피들의 여왕입니다. 종족의 재생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잠시 의문이 들어 물었다. 이봐, 시스템. 프그단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종족이라고 얘기 안 해 줬었잖아.
<그때는 당신이 이종족인 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고, 지금은 르플레스탁의 말 덕분에 그들이 이종족인 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긴. 프그단 때도 프그단이 엘프인 줄 알고 나서 새로 정보확인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문간에 서서 이러는 것도 아니다 싶어서 나는 그들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에스가 얌전히 내 옆에 와서 앉자, 종업원이 우리 앞에 물잔을 날라다 준 후 주문을 받기 위한 자세로 섰다. 그러자 아루탄이 가볍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점심 스테이크 세트가 있는가?”
“아니, 아니, 아루탄. 세트로 시키면 자꾸 들락날락하게 된단 말야.”
옆에서 에아랍이, 왠지 몰라도 짜증을 자주 낼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종업원이 말했다.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으시다면, 요리를 한 번에 드릴까요?”
“그래주겠어요? 수프와 수플레를 먼저 주시고, 스테이크로 4인분. 가격은 상관없으니 제일 좋은 부위로 부탁해요.”
‘가격은 상관없다’라...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아루탄과 에아랍은 다시 약간은 긴장한 눈빛으로 에스를 바라보았다.
“에스, 어떻게 이 자리에 함께 하시게 되었는지...”
아루탄이 긴장된 목소리로 묻자, 에스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리인 모스의 부탁이 있었다.”
“네에?”
두 사람은 크게 놀랐다. 그러더니,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에아랍이, 긴장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모든 나는 것들의 왕이시여, 그 말씀은 혹, 강대한 드래곤께서...”
“내가 그를 비호한다고 보일 수도 있다 이 말이냐.”
“...송구하오나...”
에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다. 나는 잠들기 전에도 그러했고, 3백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지금도, 대륙의 운명에 관여할 의지가 없다. 4백년 전 치르낙 하페르라는 인간의 부탁을 들어준 것으로 나의 역량과 역할은 다한 것이다. 그러니, 인간 기리인 모스의 선택에 관여할 의사도 없고, 그대들 종족의 운명에 간섭할 의사도 없다.”
“그러하십니까... 그럼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은...”
“말하지 않았느냐. 그의 신변을 지켜주기 위함이다.”
“신변...이라 하셨습니까.”
“반문하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내 저번에 그러지 않았더냐, 아루탄.”
입을 가볍게 막아버린 에스는 말했다.
“인간 기리인 모스를 많은 인간 이외의 종족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중 제일 먼저 행동에 나섰던 그레이 엘프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성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몰락하였지. 그 과정에서 인간 기리인 모스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한 인간에게는 가혹할 수도 있는 운명의 바뀜을 그는 당당히, 그리고 훌륭히 이겨내었다.”
그저 호기심 많은 드래곤인줄만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래서 나는, 만약 그대들이 기리인 모스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그를 제압하려 한다면, 그것을 막고자 하여 이 자리에 왔다. 그를 지키고 싶은 생각도 있거니와... 그런 그대들을 막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다른 이종족들에 대한 기회의 박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에아랍이 말했고, 아루탄이 말을 받아 이었다.
“우리같은 이종족 말고도 그를 궁금해하고 그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 그가 그걸 읽고, 마침 그와 이야기하고 있던 나에게 부탁을 했었다. 나는 그 부탁을 쾌히 들어주기로 했었고 말이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아루탄이 말했다.
“그럼 오늘 에스께서는 이 자리의 대화를 지켜보실 뿐, 우리가 그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 나서지 않으시겠다는 뜻이신지...?”
“물론이다. 내가 이 자리에 온 이유 중 나머지는, 이 집을 그가 강력히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이 집 요리는 내가 제도에 와서 굳이 먹어볼 만 한가?”
나에게는 다행히도 두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고, 에스는 웃으면서 “그래, 알았다. 지켜보고 있을테니 대화 나누거라.”라고 말하며 약간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두 사람... 아니지. 사람이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할까. 두 ‘존재’? 그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정적이 흐른 후 아루탄이 말을 꺼냈다.
“기리인 모스 백작님. 반갑습니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백작님께서 거부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예의바른 서두에는 나 역시 예의바르게 대답해 줘야지.
“아닙니다. 물론 프그단과의 만남은 좋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저는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다움이란 ‘공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감이라고요...”
탄식 같은, 에아랍의 말.
“네. 그래서 저는 비록 그와는 원수진 채 관계가 끝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기로,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외에도 다른 이종족들과도 그렇게 해 보고 싶습니다.”
아루탄과 에아랍의 표정이 밝아졌다.
“후보자가 선하면서도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 다행이군요.”
응?
“후보자, 라니요...?”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는 아직 나오기에 약간 이른 것 같군요.”
뭐야...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아루탄이 “들어오세요”라고 하자, 종업원이 문을 열고 스프와 수플레를 각각 사람 앞에 하나, 그리고 샐러드가 든 큰 보울 하나를 가운데 내려놓고는 인사하고 물러났다.
“드시죠. 이야기가 가볍지만은 않으니 식사를 하면 약간은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포크와 스푼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었다. 전에 형과 선생님과 와서 맛보았을 때처럼, 하다못해 수프 한 그릇에도 품격과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딱딱한 자리라서일까. 나는 긴장이 내 미각을 약간은 둔화시키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스템.
‘띠링!’
<냉철이 이미 발동중입니다.>
<위기상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의지력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고급 언변의 하부 기술들인 외교, 유도, 침묵 등이 발동합니다.>
고맙다. 어차피 냉철이 발동중이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지만 마음은 약간 더 편해지는 것 같아.
============================ 작품 후기 ============================
모르는 번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조아라 분이시네요.
며칠 후 금요일에 이 글이 반반무의 대상이 되었다는 안내 전화였습니다.
조아라에서 전화도 받아보고 참 신비한 경험 많이 하는구나 싶네요.
순위가 좀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ㅠㅠ 그건 어쩔수 없겠다 싶고...
우선은 하루에 예전의 열 배 넘는 분이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씁니다.
낙월희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jin-matient 님 // 여자 이전에 자기를 콧바람에 죽일 수 있는 존재라 얼른 맛있는 걸 먹여놔야...ㅋㅋ;;
스키테 님 // 데이트라기 보다는 회담장에 가는 거죠 ㅎㅎ
유한도전 님 // 예상하셨는지? ㅎㅎ;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MorPhjne 님 // 정주행 감사드리고 쿠폰 감사합니다! 열심히 쓸게요!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용을 침대로 끌어들이는 건... 둥지키움 당할까봐...ㅎㅎ;;
박성빈 님 // 그러게요. 디오틀라가 생각이 짧은거죠. 자기보다 위대한 존재인줄도 모르고!
♪..미르 님 //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쓰네요. 생각은 출퇴근할때 많이 하긴 합니다^^;
봉황의시대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할게요!
하늘바라기17 님 // 전작에서도, 이번 작품에서도 코멘트 감사합니다. 더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