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0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두 사람은 일단은 분위기를 유하게 하기로 작정한 듯, 지금까지 나왔던 주제와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에스가 요리 하나하나를, 샐러드의 채소 하나하나, 수프의 한 숟갈 한 숟갈을 음미하며 먹는 동안, 그들은 번갈아 자신들이 현재 제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자기 소개의 시간을 가졌다는 말이다.
“그럼 아루탄 씨는 지금 변신에 관련된 마법이나 주술 같은 건 일체 하고 있지 않은 거네요?”
약간 놀라 묻자 아루탄 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긴 것을 짧게 하기는 힘들고, 색깔을 바꾸기도 힘들지요. 하지만 우리 노움은 색깔은 인간과 거의 같으니, 그저 약간 짜리몽땅한 사람인 양 굴면 모두들 속아주지요. 하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루탄 씨는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자신과 같은 노움들은 아무래도 그레이 엘프들처럼 정계에 숨어들기가 어려워서 상계로 많이 진출했다고 말이다.
“상업이요?”
“그냥 뭐 조그만 가게 몇 개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런다. 다피르 무역회사 주인이 누구인데 그래.”
애석하게도 나는 다피르 무역회사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약간은 뿌듯한 표정을 짓는 아루탄 씨에게 호응해 줄 수가 없었다. 내친 걸음이라 나는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물어보기로 했다.
“다피르 무역회사는 무엇을 다룹니까?”
“뭐든지 다 다룹니다. 무역회사에는 니아트 강을 이용한 운송을 맡은 내륙수운부, 대륙 동부와 서부를 주로 오가는 해운부, 중간도매상이나 소매상을 상대하는 일반영업부가 있습니다.”
내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에아랍 씨가 거들고 나섰다.
“모스 백작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시겠지만, 아루탄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부일 거에요.”
“정말입니까?”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아루탄 씨는 그저 너털웃음만을 지을 뿐이었다. 동네 맥주집 주인 같은 외모인데, 엄청난 대상인일 줄이야. 에스마저도 “호오. 내가 잠든 3백년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대단하구나.”하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나는 새삼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내 영지’ 말이다.
“저, 혹시, 예전 뫼르말 영지에도 취항하십니까?”
아루탄 씨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이 약간은 빛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 뫼르말 영지의 주인이 새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우선 축하드립니다, 모스 백작님.”
“감사합니다. 사실 제 영지라고는 하지만 저는 그 영지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침 잘 됐군요. 예전 뫼르말 영지는 나스프 공작령과만 거래했었기에, 저희가 가 봐도 별로 얻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게 좀 변한다고 기대해 봐도 될 것 같군요.”
어어. 은근슬쩍,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인다. 내가 여기서 가타부타 정해버리면 나중에 절대 좋은 꼴 못 볼 것 같다.
“그거 괜찮군요. 그 쪽 관련해서는 제 대리인인 에닌 경이나, 행정관인 이트로프 마스 경에게 이야기하시면 어떨까요.”
그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좋지요. 백작님과 새로운 사업을 해도 좋을 것이고, 공동 출자해서 새로운 사업체를 만들어도 좋을 것이고요. 아시겠지만, 제 종족의 운명이 어쩌면 백작님께 걸려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는 결코 백작님께 불리한 거래를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진정한 상인들은 그럴 때조차 수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하, 제도에서는 눈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신 모양이군요.”
나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든 이 자리는 돈을 벌기 위해 나온 자리가 아니라, 이종족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모인 자리니까. 내가 에아랍 씨에게 고개를 돌리자, 에아랍 씨는 말했다.
“우리 종족은 깃털 때문에 아무래도 변신 마법을 쓰고 있어요. 물론 그레이 엘프들의 그것과는 방식이 다르지만, 혹시 모르니 저를 접촉하지 말아주세요, 백작님.”
“아... 네. 아까 하피(harpy)라고 하셨었죠.”
“네. 백작님은 혹 저희 하피에 대해 아시나요?”
“날개가 달려 있다는 정도만 압니다. 물론 본 적은 없구요.”
그러자 에아랍 씨는 문이 닫혀 있는 걸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을 감고 뭐라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화악. 마치, 종이가 촛불에 불타듯, 손 끝에서부터 에아랍 씨의 몸이 불타듯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보통의 여성용 블라우스가 사라지고, 그 아래에서 억세고 튼튼한, 녹색의 깃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손 끝은 마치 새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억센 재질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팔꿈치부터는 여성의 몸으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었다. 블라우스는 사라졌지만 말이다.
키는 대략 내 기억 속의 프그단 만해진 그녀의 몸에는 인공적인 실오라기는 하나도 없었다. 가슴과 다리 사이에 절묘하게 난 깃털들이 그곳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깃털들은 하나하나, 마나를 품은 듯 밝은 녹색의 광택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마저도 그러했다. 녹색 빛깔의 광택을 품은 녹색 머리카락의 그녀는, 바로 서서, 나에게 두 손을 모으며 인사했다.
“이것이 저희 종족의 본 모습이랍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약간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왜 저럴까. 뭔가 말을 기다리는 건가.
“제 견문을 넓혀주시기 위해서 수고를 감수하여 주신 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에아랍 씨 뿐만 아니라 아루탄 씨 마저도 눈에 이채를 띠었다. 아니, 두 사람 뿐만이 아니었다. 에스 마저도 요리를 입으로 가져가던 손길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왜들 그러시는지...?”
“모스 백작님.”
“네, 말씀하세요.”
“저희가 밉지는 않습니까?”
엥?
“어... 저한테 해꼬지를 하실 작정이십니까?”
“에스의 눈 앞에서 설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희는 모스 백작님께 협력을 요청했으면 요청했지, 결코 강요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제가 두 분이나 두 분의 종족을 미워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요.”
지극히 논리적인 과정에서 나온 내 말을 그러나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거리며 받아들였다.
“역시. 지금까지 중 가장 강한 후보자로군요.”
“몇 가지만 더 여쭤봐야겠지만, 저는 모스 백작님에게 걸어보고 싶어요.”
아, 또 나왔다. 그 놈의 후보자.
“대체 무슨 후보자라는 겁니까?”
두 사람은 아차,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아랍 씨가 다시 주문을 외우자, 어느새 그녀는 처음의 블라우스를 입은 복장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옷마저 주문으로 만드는 건가.
“저희가 마음이 급해서 제대로 설명을 못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나온 자리니까요.”
그 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종업원들이 스테이크 접시를 날라왔다. 접시 위에는 몇 가지의 가니쉬(garnish)들과 함께, 내 손바닥 두 개를 붙인 것 만한 스테이크가 있었다. 스테이크의 한 가운데에는 T자 모양의 뼈가 있었다.
“오, 이것은. T본이 아니냐. 오랜만에 맛보는구나.”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련된 저희 주방장이 굽기를 환상적으로 조절해, 두 종류의 고기가 붙어있는 T본 부위를 절묘하게 구워내기로 이름높은, 저희 가게 최고의 메뉴입니다.”
에스는 대뜸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소스를 묻혀 입 안에 넣었다. 입 안 한 가득, 큼지막한 조각을 한참 우물거리던 에스는, 곧 환한 표정이 되어 우리를 돌아보았다.
“먹어 본 T본, 아니, 먹어 본 스테이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인간 기리인 모스. 그리고 아루탄, 에아랍. 그대들의 선택은 탁월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군. 종업원들이 인사하고 나가자, 우리는 암묵적으로 합의한 끝에 각자의 스테이크 공략에 들어갔다. 우리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제일 적게 먹은 아루탄 씨(아무래도 덩치가 작은 편이니까)가 스테이크를 반 넘게 입 안으로 집어넣은 뒤였다. 에스는 이미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고 말이다.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킨 에아랍 씨가 말했다.
“불쾌한 경험을 떠올리게 해서 죄송하지만, 백작님. 혹시 프그단이 뭐라고 말한 것이 없나요?”
“뭐에 대해서 말입니까?”
“‘금제’에 대해서 말이에요.”
아. 그거.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프그단과의 두 번의 긴 대화를 말이다.
“어... 그와는 두 차례에 걸쳐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들이 번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금제’가 내려져있기 때문이고, 그 금제의 내용조차도 말하지 못하는 금제가 걸려 있다고 했습니다. 대신 각 종족들에게 그 금제를 풀 수 있는 열쇠, 아니, 열쇠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겠군요. 그 단서에 대해 전승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프그단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제국에 전쟁을 일으켜 전쟁통에 나타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찾으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러면, 그레이 엘프에게는 어떤 전승이 내려졌는지 그가 말해주었습니까?”
“네. 그는 ‘마나의 갑옷을 입은 자’라고 했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에아랍 씨가 물었다.
“백작님은, 혹시 그런가요?”
“어... 글쎄요. 제가 마나의 갑옷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제가 갖고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는 익숙하게, 마나를 움직여, 내 앞에 놓여있는 물잔을 휘감아 쥐고는, 서서히 들어올렸다. 마불살을 쏠 때의 마나 움직이는 연장선상에 있지만... 마불살과는 달리, 이렇게 마나를 움직이면, 그 반동이 내 정신으로 온다.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이미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겪어본 바 있다. 나에게는 아무런 제한이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내가 물잔을 한 뼘 정도의 높이로 들어올렸다가, 서서히 내려놓는 것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보고 있었다.
“이 능력은... 백작님, 혹시 마법사이십니까?”
“아뇨. 과부하로 인해 마법을 잃었습니다. 어느 순간, 저는 마나 자체를 밀어내거나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와 병행해서 제 몸 주변의 마나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정신계 마법을 포함해, 물리력이 없는 마법은 제게 통하지 않습니다.”
“아아...”
두 사람은 탄성을 입 밖으로 냈다. 에아랍 씨는 아까 ‘정보 확인’에서 봤듯 본인도 실력있는 마법사라 그런지, 뭐라 막 물어보려 하다가, 지금 자리를 깨닫고 간신히 참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은 진실이다. 내가 보증한다.”
에스가, 고기를 우물거리느라 위엄이라고는 없는 자세인데도 묘하게 위엄있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그 말만 남기고는, 식사하던 손길도 멈춘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음. 고기가 식기도 하지만, 시간이 아깝기도 하다.
“죄송하지만...”
내가 그렇게 운을 떼자, 아루탄 씨와 에아랍 씨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두 분의 종족에는 어떤 전승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루탄 씨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 노움에게는,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가장 화려한 단검’이라는 단서가 있습니다. 백작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윽. 에아임 형이 한 번 썼던 그 주머니 속의 단검 비유구나. 에아랍 씨가 말을 받아 말했다.
“저희 하피에게는 ‘꽃을 울리지 않는 나비’라는, 다소 묘한 단서가 있어요.”
간신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프그단이 몰라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혹은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종족들에게는 각자 종족에 주어진 단서 외에도, 공통의 단서가 있어요.”
“그게 사실입니까?”
아루탄이 대답했다.
“사실입니다. 처음 이 친구와 알게 된 후, 우연한 계기에 그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지요. 각 종족들에게만 전해지는 단서는 인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게끔 하는 금제가 걸려 있지만, 공통되는 단서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그 단서라는 게 뭡니까?”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종족을 증오하지 않는 자.”
============================ 작품 후기 ============================
생각했던 부분들이라 쉽게쉽게는 쓰고 있는데...
최대한 내 안의 스피드왜건을 억제하느라 애쓰고도 있습니다...^^;;
바뀐 제목도 별로라는 의견이 종종 보이네요. 그건 인정하는 바이긴 합니다만...
이럴 거면 맨 처음 정했던 라는 제목 그대로 밀고 갈걸 그랬나봐요...ㅎㅎ;;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낙월희 님 // 반반무 볼때마다 치킨을 시켜먹고 싶...ㅎㅎ;
시바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어이쿠 칭찬 감사합니다. 멘탈관리 잘 하고 힘내겠습니다! 칭찬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멘탈은 아직 멀쩡합니다 ^^;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양아오리 님 // 그러게요. DEPTH라고 그냥 둘 걸 그랬나 싶네요 ㅎㅎ;
인페르니우스 님 // 연참을 하기 힘든 환경이니 그게 좀 아쉽네요 ㅎㅎ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Bearfoot 님 // 감사합니다!
니코틴 님 // 은근 기대중입니다. 감사합니다!
로인스 님 // 어이쿠, 쿠폰 감사합니다!
스키테 님 //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님 // 정주행과 칭찬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