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1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종족을 증오하지 않는 자.”
뎅-.
머릿속에서 커다란 종이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묻어두었던 추측이, 이렇게 돌고 돌아 이 자리에서, 그것도 당사자들을 상대로 확인받을 줄이야.
나는 지난 구릉지의 전투 직후, 황제 폐하가 나를 보며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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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인. 나는 인류 이외의 종족이 인간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상상만 해도, 막 화가 치솟고 끔찍하다. 당장 궁내부 장관이었던 프그단이 이종족이지 않았냐. 그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숨어다니며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않냐. 나는 보기만 해도 막,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는데...”
“너는, 인간이지? 위장한 이종족이 아니지? 그렇다고 말해다오.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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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이성적인 폐하가 분노를 넘어 절박한 표정으로 나에게 애원하듯 말했던 저 장면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얼마나 내가 충격이었으면 그 눈치빠른 에아임 형을 다 떠보려 했을까. (결과도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그랬던 것이... 한 달도 넘게 지난 지금, 내 앞에,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이종족들임을 스스로 증명한 자들이 스스로 말이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반 정도 남아있던 물잔을 집어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타는 듯도 하고 꽉 막힌 듯도 해서였다. 후우, 하고 한숨을 쉬자, 에아랍 씨가 주문을 외워서는 내 물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머릿속이 도통 정리가 안 된다. 다시 한 번 나는 한숨을 쉬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부터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인간이 아닌 이종족 중 처음 만난 것이 그레이 엘프들이었습니다. 그를 본 것은 저만이 아니고 몇 명이 있었지요. 그 중에서, 평상시에는 가장 이성적이었던 사람이 이종족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혐오감과 분노를 보이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새 두 사람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칭에는 양쪽 접시만 있어서는 안 되고 가운데 저울대가 필요하다는 말처럼, 적어도 한두 사람의 경우를 더 확인해 보지 않고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그단의 일이 극비로 다뤄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지요.”
에스마저도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에스를 보며 말했다.
“에스, 죄송합니다만...”
“그대가 부탁할 것이 무엇인지 알 듯 하구나. 아루탄과 에아랍이 이야기하는 것들이 진실이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무례한 부탁인줄은 알지만...”
“아니, 괜찮다. 나는 그것을 무례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방식이 있는 법. 하물며 그대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간의 부탁이라면 그 정도는 기꺼이 들어줄 것이다. 그러니, 아루탄, 에아랍. 지금부터 그대들이 이야기할 것은 나의 이름에 걸고 진실임을 맹세할 수 있는가?”
두 사람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합니다.”
“좋다. 나는 그대들의 신의를 믿으며, 인간 기리인 모스에게 그대들의 진실성을 담보할 것이다.”
그리고 에스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공은 다시 나에게 넘어왔다.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제 의심은 그겁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즉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이종족에 대한 증오가 있다. 두 분이 하시는 말씀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지?”
“맞습니다, 모스 백작님.”
“하지만 제가 본 것은 한 명의 사례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신 일을 들려주실 수 있으실지. 에스가 보증하였으니, 저는 그것을 진실로 믿을 것입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대뜸 에아랍 씨가 말을 시작했다.
“모스 백작님은 하피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잘은 모릅니다. 산에 살았고, 여러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그리고 여자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 정도...”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마지막 부분이에요. 하피에게는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성만 존재하지요. 그럼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기시지 않나요.”
“어떻게 대를 잇는가 하는 것이겠군요.”
“그래요. 그리고 그 방식은... 어떨 것 같나요?”
“설마, 인간의...?”
“바로 그거에요. 인간의 남자의 ‘협력’을 받았지요.”
으음. 옛날에 지금처럼 국가가 제대로 되기 전에는 이웃마을에 사는 처녀를 밤에 몰래 납치해다 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포장 신부’라고 불렀는데. 그럼 그 남자는 ‘포장 신랑’이 되는 건가. 에아랍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예전에 마법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에는 산을 지나가는 남자를 잠시 납치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여왕 자리에 오르기 몇백 년 전부터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하피에게 마법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그렇게 인간들을 척지는 위험한 방식 말고, 인간 사회에 내려가서 인간의 남자들과 직접 사귀며 그 씨를 받는 방법들을 쓰게 되었거든요.”
잠시 궁금증이 생겨 나는 에아랍 씨에게 물었다.
“그럼 ‘금제’가 걸린 후에도 그 방법을 계속 사용하면 종족의 유지는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에아랍은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시도해 보았죠.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결정적인 문제요?”
“우리가 하피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남자와 관계하여 가진 아이는, 모두 인간이었어요.”
“네에?”
“저희로서도 놀랍고 당황스런 일이었지만, 그건 심지어 지금도 그래요. 만약 제가 이 모습으로 백작님과 관계하여 아이를 갖는다면, 저는 백작님의 인간 아이를 낳아드리게 되는 거에요.”
비유를 해도 참...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분명 예전에는 인간으로 변신하여 인간 남자와 아이를 가져도 하피를 출산하는 데 문제가 없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떠오른 의문을 물어보았다.
“그럼, 하피의 모습으로 관계를 가졌을 때는요?”
에아랍 씨가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바로 그거에요. 거기에서 이종족에 대한 증오가 작용하는 거에요.”
“네?”
“모스 백작님은 분명 이성과의 경험이 있으시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동정남 연기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남녀관계에서 증오하고 혐오하는 상대와 섹스가 가능하리라고 보시나요?”
“글쎄요. 직접 원해서 섹스할 수는 없을 것이고, 어... 억지로 덮친다면... 아.”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미틱 시의 약사 아르토 포니만 누나와, 지금 내 노예를 자청하며 가끔씩 복장을 긁는 이브 오르테 두 사람이었다.
아르토 누나는 ‘춘약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사람을 성적으로 흥분하게 해 스스로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를 맺게 하는 약은 없다는 말이겠지.
이브는 나에게 ‘매혹(charm)’ 마법을 걸었다. 그 마법은 시전자의 매력을, 특히 성적 매력을 증폭시켜, 상대로 하여금 자신에게 빠져들게 하는 마법이다. 하지만, 정신계 마법은, 쉬운 것이 아니다. 대상자의 강력한 의지력 여하에 따라 실패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마법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정신계 마법이 실패할 확률이 꽤 있다는 말에 대한 예시로 자주 드는 것이 ‘증오하는 상대에게 쓰면 오히려 더 증오하게 된다’는 말이다.
“약은 없었거나, 혹 있었어도 듣지 않았고, 매혹과 같은 마법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이런 말인가요.”
내가 묻자, 에아랍 씨는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보셨어요. 우리가 하피인 본모습으로 돌아가자마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들이 기생충을 보듯 혐오감과 분노를 쏟아내었어요. 목숨을 위협받은 적도 많았지요. 하피 족의 비전인, 남자들을 유혹하는 약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매혹 마법을 써보았지만, 그들에게 박힌 증오는 상상 이상으로 강했어요. 오히려 우리를 더욱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었지요.”
씁쓸한 표정으로 에아랍 씨가 덧붙였다.
“나중에 보니, 그 남자들은 우리를 증오하다 못해 새 고기마저 먹지 않을 정도가 되었더군요...”
“그런...”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내가 기막혀하자, 에아랍 씨는 덧붙였다.
“백작님. 저도 직접 경험한 일이고, 제 동족들도 숱하게 경험한 일이에요. 제 의견은 그러니 저희 종족의 의견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희는, 인간들이 저희에게 가지고 있는 증오에 대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더 나아가, 누군가가 인간들이 저희와 같은 이종족을 미워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래서 저는, 아까 백작님이 본모습을 드러낸 저를 보고 전혀 동요하지 않아 주셔서 너무 반갑고 감사해요.”
그러더니 황급히 덧붙였다.
“아! 백작님, 혹시나 해서 덧붙이지만, 백작님을 종마(種馬) 비슷한 것으로 다루고자 하는 의도는 없어요. 제가 원래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백작님과 관계를 가진다 한들... 그것은 불타는 집에 숟가락으로 물을 뿌리는 거나 다름 없을 테니까요. 또 백작님은 우리 한 종족에 얽히기에는 너무 큰 운명에 휘말려 계시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희가 억지로 백작님을 데려가거나 하면... 백작님마저도 저희를 증오하시게 될까 두렵기도 하고요.”
나는 들키지 않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피에게 납치되어 ‘포장된 신랑’ 신세가 될까 엄청 두려웠었는데.
에아랍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아루탄이 말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작님. 지난 몇백년간 상업에 종사하며 저는 온갖 불합리한 일들을 다 겪었습니다. 저희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보다 큰 규모의 무역, 해운과 수운, 도매 같은 사람을 좀 덜 상대해도 되는 일에 종사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불합리한 경우라 하시면...”
아루탄 역시도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전에 겪은 수많은 일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상인들의 두 배나 되는 뇌물을 쓰고도, 다른 이들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그 뿐입니까. 분명 넉넉히 기한을 잡아주기로 약속한 어음이 갑자기 상환요청이 들어와, 가게나 사업체가 부도날 뻔한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이가 좋았던 거래처에서 푸대접을 받는 일도 부지기수고요.”
“음...”
“저희가 소매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동족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하면, 이상하게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깁니다. 그렇다고 저희 동족들이 인간을 고용하면, 고용한 인간들이 저희에게 항명합니다. 이런 수많은 일들을 겪은 끝에, 저희는 인간을 덜 만나도 되는 종류의 사업을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군요...”
“제가 노움인 줄은 그들 중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까닭모를 불이익과 증오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니, 만약 정체가 밝혀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순식간에 누군가에게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 정도인가...
“그래서, 백작님께서 아까 저와 사업 이야기를 했을 때, 저는 기뻤습니다. 물론 에아랍 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백작님은 나와 같은 이종족에 대해서도 사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유 모를 증오가 없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두 분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소화하는 동안 그들은 잠시 기다려주었다. 에스마저도 말이다. 이윽고,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럼 그 ‘금제’의 해제에 대해서는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분명 ‘당황’을 나타내는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나를 보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종족에는 ‘금제’가 어떤 것인지조차 불분명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지, ‘금제를 풀려고 노력하면 더 꼬일 뿐이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히 단계를 밟아가면 금제를 직접 대면하게 되리라, 라는 교리문답 같은 경구가 있었습니다.”
“저희 종족도 마찬가지에요. 금제를 풀거나 찾으려고 하지 말라, 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가 후보자를 찾는 것이기도 해요.”
“후보자요?”
“저희가 기다려온 자들의 조건에 부합하는 후보들을 추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다가, 만나는 사건들에 대해 정보를 모으고 있어요.”
“우리의 전승은, 그가 살아가는 길에서 금제가 풀리게 될 것이다, 는 것이니까요. 그의 인생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 언젠가는 – 우리 이종족들에게 내려진 금제와 마주할 날도 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다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당신들이 찾는 인물이 아니라면?”
에아랍 씨는 나에게 미소지어 보였고, 아루탄 씨는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또 50년 쯤 더 기다리면 되지요. 몇백 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50년쯤 더 못 기다리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으아. 피곤하네요. 막판은 무지 졸려하며 썼습니다.
모뉴먼트 밸리 2가 나왔다는 걸 이제야 알아서 희희낙락하며 다운받았습니다.
오늘은 그걸 하다가 잠들듯...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선작과 추천 해 주시고 코멘트와 쿠폰 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이십니다.
eastarea 님 // 죄많기로는 대륙 최고수준... (으응?)
인페르니우스 님 // 네, 아직 바꿀 생각은 없어요^^;
스키테 님 // 오죽 제목을 못지으면...ㅠㅠ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MorPhjne 님 // 팩트로 후드려패시다니 ㅠㅠ 얼른 열심히 쓰겠습니다.
유한도전 님 // 빼박캔트 기리인이죠 조건을 보면 ㅎㅎ
아빠의웃음 님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ㅠㅠ
살펴가세요 님 // 감사합니다!
낙화vs목련 님 // 제목추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전개에 따라 좀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TR07 님 // 감사합니다!
龍帝 님 // 챕터 끝나면 이번에는 현실 편을 넣으려고 생각중입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잘되기를 님 // 감사합니다!
petajini 님 // 암요 빼박캔트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