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2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잠시 대화가 멈추고, 아루탄 씨와 에아랍 씨가 남은 스테이크를 마저 먹는 동안, 나는 그들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삽입된 증오’라. 긴 수명을 자랑하는 이종족들이라 해도, 어느새 세계의 주류를 차지해버린 인간들 사이에서, 그 인간들의 밑도 끝도 없는 증오를 받으면서는 종족의 재생을 위한 단서를, 아니, 적어도 종족의 평안한 삶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50년 쯤 더 기다리면 되지요’라는 태평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다시 물잔을 집어들고 목을 축였다. 분명 제도 최고의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데, 왜 그다지 맛이 느껴지지 않을까.
“백작님.”
아루탄이 나를 불렀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는 내 표정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말했다.
“부담스러우십니까?”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당연히 그럴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부담스럽냐고? 당연하지. 이 파란만장한 한 해에 내가 겪는 사건들이 아직도 모자란 건지, 이제는 ‘이종족들의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까지 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기리인 모스.”
에스가 나를 불렀다. 내가 에스를 돌아보자, 에스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부담을 느낀다 하였느냐.”
“네, 에스. 그렇습니다.”
“아둔한 것아. 너는 지금 저들의 말 중에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무엇을...”
태어나서 멍청하다 소리를 들은 건 당신한테서만 두 번째에요. 그게 유일한 것 같구요. 문제는 지력이든 무력이든 나보다 월등할 상대이니 문제이지요.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저들 종족에 전해져 오는 금제에 대한 내용이 뭐라 하였더냐.”
“어, 분명... 애써 찾으면 더 미궁으로... 아.”
그제야 나는 눈치챘다. 그리고 에스는 내가 눈치챘다는 것을 안 듯, 빙긋 미소지었다.
“알겠느냐?”
“네. 저 분들이 왜 ‘구원자’라 하지 않고 ‘후보자’라 하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대는 그대의 운명에 충실하면 된다. 만약 그대가 저들이 바라는 ‘구원자’가 맞다면, 그대의 운명 가운데 저들의 운명을 마주칠 때가 올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을 바라보자, 두 사람은 같은 박자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땅딸막한 아루탄과 길쭉한 에아랍이 함께 그러는 모습이 꽤나 우스웠다.
“에스의 말이 맞습니다. 그 때까지 저희들은 백작님을 지켜보며, 도울 것이 있으면 도울 뿐입니다.”
“지금까지, 저희 종족들이 나름대로 찾았던 후보자들에게 그러했듯이 말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은 부담이 덜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 올 한해 만난 온갖 어려운 일들 앞에서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그렇게 마음먹으며, 나는 남은 고깃조각을 입에 털어넣었다. 나온 직후보다 식은 것 같았지만, 아까보다는 맛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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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아루탄과 에아랍의 표정은 아까보다는 분명 밝아 보였다.
“백작님. 감사합니다.”
“뭐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백작님은 저희가 몇십, 아니, 몇백 년만에 만나는 가장 강력한 후보자이십니다.”
에아랍이 거들고 나섰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백작님은 그 후보자들 중 저희를 증오하고 혐오하시지 않는 첫 인물이세요.”
두 사람은 나를, 초롱초롱하다 못해 숫제 반짝일 것 같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띠링!’
<공감의 길을 선택한 당신. 이종족들의 숙원과 그간의 고통에 당신은 공감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좋은 마법사가 될 수 없으니까.
<그 공감에 반응하여 메인 퀘스트가 업데이트됩니다.>
<메인 퀘스트 : 이티클레 대륙의 진실 - 업데이트!>
<(update!) 이티클레 대륙에서 살아가게 된 당신. 당신은 성장 과정에서 여러 신화와 전설들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당신이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마저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올 한해 운명의 대격변을 겪으면서 마주친 인간들과 이종족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며, 당신은 이 중 이미 상당수가 사실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의지력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의지력은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닌,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것에 가장 강하게 작용합니다. 진실을 찾으십시오. 진실을 마주하십시오.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선택할 기회가 오면, 선택하십시오.>
<충고합니다. 당신이 택한 공감의 길을 잊지 마십시오. 이종족이든 인간이든, 다른 이들의 감정과 고통에 공감하십시오. 냉정해지되 매정해지지 마십시오.>
<퀘스트 달성 조건 : ‘이티클레 대륙의 진실’을 안다
퀘스트 진행 힌트 :
1. 방의 주인은 당신의 몸에 주술력의 통로를 남겨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으며, 그 역시도 당신에게 유용하게 쓰일 가능성이 큽니다. 좀 더 알아내보세요.
2. 은둔중인 고대 종족들에 대해 알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고대 종족들 사이에 조각조각 널리 퍼진 그들의 ‘금제’에 대해 단서를 모으세요.
- 그레이 엘프 종족들에게서 ‘마나의 갑옷을 입은 자’라는 단서를 수집하였습니다.
- (update!) 노움 종족들에게서 ‘주머니를 뚫고 나온 가장 화려한 단검’이라는 단서를 수집하였습니다.
- (update!) 하피 종족들에게서 ‘꽃을 울리지 않는 나비’라는 단서를 수집하였습니다.
- (update!) 이종족들 공통의 단서인, ‘이종족을 증오하지 않는 자’라는 단서를 수집하였습니다.
- (update!) 드래곤 르플레스탁의 협조와 인정을 얻었습니다. 당신을 적대하는 이들이 적어도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 단서를 수집하면 메인 퀘스트 진행에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주술의 기초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 주술을 좀 더 자세히 알아 보고, 가능하면 익히기도 해 보세요. 다음 힌트를 얻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4. (update!) 당신은 인간에게 이종족에 대한 ‘심어진 증오’가 있다는 것을 보거나 들었습니다. 이 ‘심어진 증오’는 진실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 근원은 어디인지 알아보세요.
5. (update!) 제국의 국교이며, 제국을 수호하는 트리클 교. 당신 역시 그것을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트리클 신의 모습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몇 번 보고 들은 바 있습니다.
- 다른 신들에 대해 알아보세요.
- 트리클 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세요.
6. ???>
갑자기 주루룩 떠오른 창들을 읽으며 나는 눈이 커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막혀 있던 것들이, 갑자기, 둑이 뚫리듯 뻥 하고 뚫리며, 갑자기 많은 새로운 내용들이 새로이 나타났다.
물론,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단서를 캐니 새로운 단서가 나올 뿐, 게다가 추리를 할 수 있는 소재도 없다.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해결이 가능한 것인지조차 모른다.
“백작님. 부담 갖지 마세요.”
“하지만, 당신들이 나를 바라보며 희망을 가질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는 그것 자체가 부담이란 말입니다.”
“나는 것들의 왕께서도 말씀하셨고, 저희도 말씀드렸지만, 이 금제를 푸는 단서는 다른 것이 없어요. 백작님은 백작님의 삶을 살아가세요.”
“백작님이 저희의 희망이 맞다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단서가 풀릴 것입니다. 백작님이 저희의 희망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백작님의 길과 저희의 길이 갈라질 것입니다.”
나는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요구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엇을 잊어라’는 말 만큼 잘 지켜지지 않는 명령도 드물다. 잊어라는 말 자체가 계속 그것을 생각나게 하니까 말이다. 나는 앞으로 한 번 공감한 바 있는 이종족들의 고통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까 다짐했듯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할 뿐이다.
“이거, 백작님께 너무 큰 짐을 지워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그럼... 보답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백작님께 한 가지씩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도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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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조만간 저희 직원들이 백작님을 찾아뵐 것입니다. 아마, 저와 같은 사람들일 겁니다.”
“저희도 정기적으로 표를 보내 드리겠어요. 아마 당분간 1등석 표가 모자라 공연을 못 보시는 일은 없으실 거에요.”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식당문을 나서서는, 정중히 나와 에스에게 인사하고,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던 화려한 마차에(그 나스프 공작가의 마차만큼이나 화려해 보였다!) 올라 떠났다.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부지불식간에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이냐. 그대는 짧은 시간에 약속된 부와 약속된 문화를 얻지 않았느냐.”
하이고. 그래, 아루탄 씨는 황제 폐하가 약속한 모스 영지의 세금 수입을 투자받아, 공동 사업체 하나를 꾸리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알짜 교역로 중 세 개에서 많게는 다섯 개를 그 사업체에 떼어주기로 했다. 자신은 이미 벌 만큼 벌기도 했지만, 자식을 낳을 것도 아니고, 부를 더 쌓아봐야 큰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땅짚고 헤엄치기로 돈을 긁어모을 수 있게 된 거나 다름없다, 고 에아랍 씨가 거들었다.
그리고 에아랍 씨는... 아까는 듣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하피들은 모두 변신해서도 노래나 연기력이 출중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남자를 홀려야만 종족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 노래나 연기, 그리고 매력은 태생적인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도의 공연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에아랍 씨는 앞으로 공연이란 공연이 생길 때마다 그 1등석 티켓을 두 장씩 구해다 주기로 했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래. 분명 아주 짧은 시간에 엄청난 이득을 얻어가는 것이기는 하지. 하지만 말이다.
“에스. 혹 치르낙 대왕의 아내를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리에나 말이냐? 만나보기야 했다. 하지만 치르낙과의 만남 자체도 길지 않았던 마당에 리에나와는 깊은 교분을 나누지 못했다. ...그대가 왜 리에나의 이야기를 꺼낸 줄 알겠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이익과 명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되새기고 있을 뿐입니다.”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작은 에스는 내 허리를 툭툭 쳤다. 위로하는 모양새를 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다. 모두가 악의와 혐오로 대하는 중에 그대만이 그들을 공정과 선의로 대하고 있지 않은가. 천칭의 비유를 사용하기에는 좀 부적절하겠지만, 그 보답을 받았다고 여기거라.”
여전히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자, 에스는 짐짓 웃으며 말했다.
“그리 돈이 많아져서 부담스럽거든, 나에게 옷을 몇 벌 더 사면 되지 않겠느냐.”
뜬금없는 에스의 말에 나는 픽 하고 실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륙에서 가장 강대할 존재인 그녀가 나를 위로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는 약간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스.”
에스는 웃으며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자, 그녀는 말했다.
“치르낙에게도 한 번은 했던 이야기이지만, 진리 중 상당수는 균형점에 존재하는 법이다. 가장 뛰어난 집중력은 긴장을 하나도 하지 않았을 때도, 잔뜩 긴장했을 때도 아닌, 적절한 긴장과 적절한 이완이 있을 때 나타나는 법이다.”
아. 그래. 이 얘기 들은 기억이 난다. 크주크 형네 사람들에게서였다.
“그리고, 이는 부담스럽거나 힘든 경험에도 마찬가지다. 그 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는 것도 도움되지 않는다. 그 일을 술이나 다른 즐거운 일들로 덮어버리는 것도 도망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 일의 부담에 짓눌려 버리는 것도 결국은 패배하는 것일 뿐이다. 그 부담을 받아들이되, 인정하고, 지고 나가거라. 그 길이 가장 바람직한 길이다.”
이번에는 나는 에아임 형과 전장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형은 전장의 참혹함과 괴로움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지고 나가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지휘관이 된다고 하였지.
“감사합니다, 에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가자꾸나. 이 쪽이냐?”
“...죄송하지만 그 쪽이 아니고 이 쪽입니다.”
“...그렇구나. 나는 날아다니는 데 익숙해서 말이다...”
...길치 드래곤이라니.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여러분. 좋은 주말 되세요.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주시는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제 힘입니다.
eastarea 님 // 르플레스탁한테는... 설령 혐오감이 들어도... 무서워서 표현을 못하...ㅋ;;;
살펴가세요 님 // 그것보다는 더 강한 증오로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MorPhjne 님 // 쿠폰 감사합니다. 그런데.. 깽값이면... 때리러 오...ㄷㄷㄷㄷㄷㄷㄷ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칭찬 감사합니다 ^^;;
hasj12 님 // 불쌍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기리인을 그리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