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3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늦여름의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더운 날에는 차가운 것이 마시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 그런지, 중앙 광장 주변의 찻집들에서는 죄다 차가운 차를 팔았다. 그것도 그냥 차가운 게 아니고 무려 얼음이 띄워져 있는 차들이었다. 에스는 차가운 밀크티를, 나는 차가운 커피를 앞에 놓고, 쉬고 있었다.
아무리 본질이 중요하다 해도 외형 역시 본질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라 했던가? 그 말을 여성형 외형을 하고 있는 드래곤과 쇼핑하러 가서 다시 깨닫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르고, 고르고, 또 고르고, 입어보고, ‘이 정도면 된 거 아니냐’고 생각했을 때 “잠시 후에 다시 오겠사와요”... 누군가 우리 뒤에 소금을 뿌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에스는 꼼꼼했다. 결국 에스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블라우스나 스커트, 벨트 등을 산 것은 우리가 맨 처음 들어갔던 가게였다는 사실이 마지막 결정타였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산 옷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희희낙락하던 에스는 내 멘탈이 나가버린 표정을 발견하고는 멋쩍은 표정으로 “차라도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한참 말없이 우리는 오후의 상점가를 걸어, 중앙광장에 이르렀다. 그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신화 속의 드래곤이고 뭐고, 여성형을 하고 있으면 다른 여자들이랑 다를 게 없구나.
나는 냉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나 설탕을 넣지 않고 그냥 쓴 커피 그대로 마시자 잠시 가출했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밀크티를 홀짝이며 광장을 보고 있는 에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실 예정이신지?”
에스는 여전히 광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딱히 나를 무시한다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저, 광장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싶은 듯했다.
“글쎄다. 아직은 정하지 않았느니라. 다른 모습으로, 시골 마을들에 가서 잠시 정착할까 싶기도 하고... 말했듯이 나는 3백년만에 깨어났다 하지 않았느냐. 지금 사람들이 어떤지 많이 궁금한 참이다. 운명이 모여들고 있는 그대라는 사람이 궁금하여 이렇게 먼저 그대를 찾아왔고, 덕분에 제도의 일부분 구경을 잘 했다. 이제는 제도 말고 다른 곳의 인간들의 삶을 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시군요... 제가 잠시나마 에스를 즐겁게 해 드렸다면 다행입니다.”
에스는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더냐. 간만에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 즐겁게 대화하였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약속... 아.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대에게 지금 몰아닥치는 운명의 격류가 가라앉거든, 내가 그대에게 찾아갈 것이다. 안심하거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네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그럼 뒤집어서, 곧 끝이 다가온다는...?
“뭘 그리 놀라느냐. 급류는 원래 급한 법이다. 도도한 니아트강은 여유있게 바다를 향해 달려가지만, 폭포는 앗 하는 사이에 떨어지는 법 아니더냐.”
“하지만 강에 있는 물방울이든 폭포에 있는 물방울이든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 소심한 항변을 에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받아넘겼다.
“원래는 그대에게 이조차도 말해주어서는 안 되겠지만, 나는 그대와 관련된 사건에서 철저한 방관자이자 약한 조력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정도의 개입은 약간의 재미 정도가 아니겠느냐. 그들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라 하심은...?”
“그건 말해줄 수 없구나. 하지만 그대도 몇 개의 후보들을 떠올리고 있지 않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얼음 띄운 밀크티를 반 넘게 들이키고는 말했다.
“자, 인간 기리인 모스. 잠시 이별이다.”
“어, 저...”
“알고 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지 않느냐. 물어보거라.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대답해주마.”
옷 선물에 대한 답례다, 라고 말하며 에스는 다시 밀크티를 입으로 가져갔다. 무엇을 먼저 물어보는 것이 좋을까...
“주술에 관해서 묻고 싶습니다.”
“그래. 주술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다행히, 몇 번 연습해 둔 덕에, 나는 그 느낌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마나보다 훨씬 거친 느낌이, 하지만 우그나즈가 그때 내 몸으로 불어넣었던 것보다는 훨씬 약한 힘이, 내 등뼈를 긁고 올라갔다. 아무리 해도 그 힘을 머리로 끌어올릴 수는 없었고, 그래서 머리가 삽시간에 맑아지던 그 느낌을 재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 우그나즈가 내 몸을 토대로 보여줬던 것처럼, 끌어올린 기운을 팔로 인도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엄지와 검지 쪽으로 인도된 기운이 끄트머리에 꽉 차, 마치 추운 겨울날 곱아든 손가락처럼 빵빵한 느낌이 들 때,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빵!
작은 폭음을 내며, 손에 생긴 불꽃과 얼음조각이, 서로 충돌해, 터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이 돌아보았다가, 별 일 아니다 싶었는지 고개를 다시 돌렸다.
“대단하구나. 그 사이에 정말로 주술의 기본을 깨우쳤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란 운명의 인도의 다른 이름이다. 이 역시 그대의 운명의 격류의 일부분일 터. 그대의 앞에 놓인 운명이 그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말 클 모양이구나.”
또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에스는 다시 한 모금 홀짝인 후, 비어버린 잔에 남은 얼음을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그대가 주술의 기초에 대해 알았으니, 두 가지 힌트를 주마.”
“감사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첫째는, 남대륙에 가서 제대로 된 주술사를 만나라는 것이다.”
이 사람, 아니, 이 드래곤이 진짜...
“에스... 혹시 모르시나 하여 말씀드립니다만, 150년 전 황명으로 인해 북대륙 사람들은 남대륙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이냐? 그럼 내가 제도에서 본 남대륙산 물산은 어찌 들어온 것이냐?”
그래서 나는 내가 미틱 시와 레카 시를 잇는 정기선에서 티르완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솟아오른 섬, 남대륙과의 충돌, 결국 가운데 섬에서만 교역하고 그 외에는 출입하지 않기로 한 일 등등.
“아... 그렇게 되었느냐. 인간들이 내릴 법한 해결책이구나.”
결국, 종업원을 불러, 밀크티를 한 잔 더 주문한 에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결국 기댈 것은 그대를 이끌어갈 운명의 격류밖에 없겠구나. 만약 그대가 주술을 제대로 배우게 될 예정이라면, 그 가운뎃섬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도 그대에게 그 운명이 다가올 것이다.”
티나지 않게,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웬, 길거리에서 점보는 할머니들 같은 소리야...
“그리고, 두 번째의 조언이다. 그대는 마나를 밀어내거나, 마나를 만지거나 움직이는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고 있었다. 이번에 그대는 마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그것도 인간들이 하던 마나 회로로 끌어당기는 제한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 근원적이고 거친 힘을 끌어당기는 것에 대해 터득했다.”
“네...”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완전히 터득하거라. 이것이 내가 해 주는 충고이다. 인간 기리인 모스. 밀어내는 것과 당기는 것, 우주의 운동은 이 두 가지가 기본인 터. 이것을 터득한다면 그대는 주변의 마나에 대한 완벽한 지배에 대한 단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다면...!”
에스는 빙긋이 웃었다.
“그래. 마법의 주인인 드래곤의, 진정한 마법을, 마나를 지배함으로서 할 수 있는 진짜 마법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올해 초에, 마법을 잃은 이후로, 처음으로, 엄청난 희망에 부풀어올랐다. ‘진짜 마법’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에스의, 공간을 접어넣은 마법이나, 내 어깨를 누르던 힘이나, 그 말고도 여러 가지.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오히려, 마법을 잃어버린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생각조차 드는, 좋은 일 아닌가...!
“아직 식사 약속도 받아내지 못했는데 디저트부터 생각하지 말거라, 기리인 모스.”
아차. 내가 내 실태(失態)를 깨닫고 얼굴을 붉히자 에스는 웃으며 말했다.
“말했지 않느냐. ‘완전’히 터득하라고 말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깊고 넓게 연구하고 공부하거라. 인간으로서는 그래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보통의 자질을 지닌 인간이라면 이 이야기는 꺼내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그대의 지능과 인내력을 믿기에 말한 것이다.”
에스는 마침 날라져 온 두 번째의 밀크티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차가운 커피를 꿀꺽 삼킨 후, 다른 질문을 꺼냈다.
“에스. 혹, ‘레코딩 챔버’라는 곳을 아십니까.”
에스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단어를 아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대륙의 인간들은 전혀 알 수조차 없을 것이고, 대도서관의 관장들조차도 신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뿐, 그곳에는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것인데...”
“저는 어제 그 곳에 다녀왔습니다.”
“정말이냐?”
내가 드래곤을 이렇게 놀라게 할 수 있었을까.
“방 안에는 두루마리가 가득한 선반이 양 옆에 있었고, 건너편에는 두루마리를 만들어내는 마법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레코딩 챔버 안의 모양과, 내가 그 안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 챔버 안에서 생긴 빛이 만들어준 길이 주술의 길이었다는 것에 이르자, 에스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였나...”
“그래서 묻습니다. 에스. 혹 ‘방의 주인’에 대해 아시는지?”
에스는 잠시, 얼음만을 달그락거리다가, 가볍게 한숨을 쉰 후 말했다.
“미안하다. 기리인 모스.”
“아... 말해주시기 곤란한 내용이십니까.”
“나는 방의 주인을 안다. 방의 주인도 나를 알 것이다. 나는 그 방이 왜 생겼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기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방의 주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내가 그대의 운명에 깊이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리하면 나는 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인과율을 모두 소모하게 된다. 더 이상, 아무와도 얽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에스는 약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제 세상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그러니,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에게 그것들을 말해줄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이 세상을 금방 떠나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에스. 그런 조건이라면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에스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에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에스의 약한 미소가 환해졌다.
“그래. 그대라면 그리 이야기할 줄 알았다. 고맙다, 기리인 모스.”
그리고, 에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이 정도라면 이야기해 줘도 괜찮겠지. 그대가 짐작하고 있겠지만, 방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또한 이종족도 아니다.”
“그럼...”
“거기까지다. 그 이상을 이야기하면, 진실에 접근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되니까 말이다.”
에스는 남은 밀크티를 쭉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인과율을 꽤 소모하였구나. 이제 이별이다, 기리인 모스.”
더 묻고 싶은 것이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지만... 드래곤이 가겠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감사합니다, 에스. 미력한 한 명의 인간인 저에게 당신께서 주신 도움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무얼. 선의에는 선의로, 도움에는 도움으로 답하는 것일 뿐이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 포옹은 대단히 이질적인 느낌이 났다. 애정도, 친밀함도, 혹은 성적인 의미도 아니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체구의 파란 머리의 여자가 나를 안아주고 있는데, 나는 그녀가 나를 ‘안쓰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이나마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
“아까 우리는 강물과 폭포에 대해 말하지 않았더냐. 그대는 이미 더 이상, 폭포나 강물에 있는 물방울이 아니다. 다른 이들과는 구분되는, 그래. 물에 떠 있는 통나무 같은 존재이다. 북부 출신이라면 잘 알겠지.”
그 수많은 뗏목들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기리인 모스. 폭포를 향해 달려가는 통나무 같은 존재여. 그대는 앞으로 마주칠 운명들에 여러번 부딪히게 될 것이다. 어떤 운명은 그대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어떤 운명은 그대에게 멍을 들게 하겠지. 그 뿐일까. 그대가 둘로 꺾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강한 충격이 올 지도 모르는 운명도 있겠지.”
나는 목이 꽉 메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거라. 이를 꽉 깨물고, 모든 아픔을 견뎌내다 보면... 어느새 그대는 폭포 아래의 잔잔한 강물에 다다라있을 것이다. 그 때, 내가 다시 찾아와, 그대를 다시 위로해주마.”
그녀는 말없이, 내 두 손을 꼭 쥐어주고는, 등을 돌려 떠나갔다. 광장을 가로질러 멀어지는 그 자그마한 등을 나는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머릿속 아주 작은 한 구석에서는, 저러다가 길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하긴 했지만.
============================ 작품 후기 ============================
길었던 이번 챕터도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가네요.
주인공이 메인 퀘스트 진도를 나가게 하기 위해 아무래도 설명하는 내용이 많다보니, 이번 챕터는 제 의도만큼 잘 뽑히지도 않았고, 크게 재미도 없었던 느낌입니다. 아쉽습니다.
다음 챕터부터는 다시 주인공을 열심히 굴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 추, 코, 쿠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씁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jin-matient 님 // 아직 떡밥을 풀기에는 이릅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그래도 엉성한 부분도 하나는 있어야죠 ㅎㅎ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님 // 사실 300년만에 오는 데니까 길 잘 알면 이상하겠죠 ㅎㅎ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인페르니우스 님 // 나중에 다시 만날 거니까 ㅎㅎ
니코틴 님 // 감사합니다!
스키테 님 // 나중에 다시 만날때도 막 길 헤매다 늦으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