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294화 (294/309)

00294 9.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

머리가 복잡해, 좀 걷고 싶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걸 가끔씩 모르는 체 지나치며 나는, 요 며칠간,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갑자기 나를 향해 물이 쏟아지듯 퍼부어지는 사건들과 단서들에 대해 생각했다.

지지리 궁상을 떨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누구에게나 운명은 독창적인 법이라고 알고 있다. 니아트 평원에서 농사를 짓는, 한 집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생을 마감하는 농부에게도, 그 변화 없을 것 같은 인생에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같은 순간은 오는 법이다, 라고 말이다. 누가 한 말이었더라. 아무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같은 말을 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는 게 요지다.

그리고 나는 그럴 작정이다. 아루탄 씨와 에아랍 씨가 그렇게 말했고, 좀 전에 에스도 그렇게 말했듯,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걸어갈 뿐이다. 내가 진짜 그들이 말하는 ‘운명의 인물’이라면... 뭔가 나타나겠지.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건 내 앞길의 어려움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운명의 인물’이라고 하자. 그러면 나는 어느 순간에든 갈림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내 앞에 놓이게 될 선택지들을 내 마음대로 선택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래도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어느 갈림길에서나, 내가 미틱 시에서 선택했던 대로, 제 3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후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뺨을 짝! 때렸다. 기리인 모스. 너답지 않다. 아직 아무 것도 확실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주치지도 않은 문제를 걱정하다니. 닥쳐서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많은 고민을 해 봐야겠지만... 그래도, 그 문제들 때문에 헤어나오지 못해서는, 치르낙 대왕에 나를 비교해서 말해준 에스의 안목에 폐를 끼치는 일이다.

어느새 나는 중앙 광장을 지나쳐, 고급 주택가 쪽을 한참 걸어가고 있었다. 아까 에스와 헤어질 때 넘어가고 있던 석양은 어느새 제도의 성벽과 궁성들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발은 이미 밤이지만, 나무의 머리나 집의 지붕들은 아직 오렌지색이 남아있는 묘한 시간. 조금씩, 부지런한 밤벌레들이 마지막 여름밤을 불태우는 그 시간. 내가 이정표로 삼는, 큰 나무의 꼭대기도 약간 남은 오렌지색을 서서히 지워내고 있었다.

아, 좋다. 이런 여유. 간만에 느껴보는 것 같다. 여행할 때는 좀이 쑤시는 순간이 많았고, 사건에 휘말렸을 때는 정신없이 그 해결을 위해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제도에 온 뒤로는 그저 사건의 연속인 듯한 느낌이어서... 나 혼자 이렇게 여유를 즐기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아니. 미틱 시에서 혼자 차 마시면서 도시의 분위기를 읽으러 다녔던 그 때 이후 처음인가.

바쁜 것도 좋지만, 이런 일상도 좋지 않을까? 물론 마법을 찾기 위해, 에스가 일러준 힌트를 궁구하며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며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때때로 행복해해도 되지 않을까?

부모님을 잃었고, 사랑도 잃은 줄 알았지만... 친형이라도 이렇게 못 해줄 것만 같은 에아임 형이 있고, 나를 우정으로 대해 주는 황제 폐하가 있고... 그리고, 나를 애정한다고 말해 주는 요안나 선생님이 있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레이디들도 있다. 내 영지도 생겼다. 세금 수입이 들어올 거고, 아루탄과 공동 출자하기로 한 사업체는 그 재산을 크게 불려줄 것이다. (설마, 드래곤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내 앞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잔뜩 남아있긴 하지만, 간만에, 정말 오랜만에, 나는, 충족감과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 항상 수반되는, 이티클레 대륙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지금 이렇게 누리는 행복만큼, 반대쪽 접시에 불행이 올라오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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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백작님. 마차를 부르시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스틴이, 먼 발치에서 나를 보자마자 성큼 달려와서는 말했다. 공작가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라서일까. 저렇게 체화된 예의는 대단하다, 라는 생각을 했다.

“아, 그냥 잠시 걷고 싶었어요. 별 일 없었나요?”

“네. 디오틀라 공방에서 물건이 배달되어 왔습니다.”

아. 디오틀라 씨가 명백히 삐진 듯 했기에, 확률은 반반이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디오틀라 씨는 약속을 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네모난 금속 상자인가요?”

“문도 달려 있습니다. 열쇠를 넣는 구멍만 있다면 금고처럼 생긴 것이더군요.”

굳이 그게 금고고 어떻게 작동한다는 건 말해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아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혹 다른 것은 필요하시지 않으신지...?”

“어... 에스틴. 솔직하게 하나 묻고 싶습니다.”

정원 한가운데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에스틴은 약간 긴장하며, 공손한 자세로, 내 말을 기다렸다.

“귀족가의 가십이라는 거 말입니다.”

“네. 저도 온갖 가십을 듣고 또 봐 왔습니다.”

“나 역시도 그런 가십의 대상이 되겠지요?”

약간은 의도적으로, ‘나는 잘 모른다’는 투로 말을 꺼냈는데, 에스틴은 쿡 하고 웃으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백작님, 백작님은 이미 제도의 가십 중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헐...

“그 중에는 제가 이전에 모셨던 나스프 공작님을 매우 화나게 할 만한 것들, 예를 들면...”

“...거기까지요.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떤 내용인지 알 만 하네요.”

“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와 백작님 사이에...”

“그것도 거기까지. 아무튼 그렇단 말이지요.”

그는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

“혹, 백작님이 하시는 행동이 가십으로 다른 귀족가에 퍼질까 두려우신 것이신지요?”

그는, 내가 왜 이 말을 꺼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걸 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 아무래도 그렇군요. 제가 혹 다른 분들의 명예에 먹칠을 할까봐...”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가벼운 추문은 오히려 사교계의 양념 같은 존재로 남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농담과 소문 속에 진실이 있다 해도, 너무나 그런 것들이 많다보니, 오히려 전반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게 되지요.”

“그저 소문이니까 아무도 안 믿을 거라는 겁니까.”

“흔히들 사교계에 새로 데뷔하는 사람이 많이 겪는 일이니까요. 아르논 아가씨도 그런 일을 겪으셨지요. 옆집의 에아임 님도 그러셨을 겁니다.”

아. 쉽지 않다. ‘내 집에서 소문이 퍼지면 니가 퍼트린 걸로 알 건데?’라고 가볍게 띄워 본 건데... 그는 내 의도를 처음부터 읽고 나서 ‘어차피 사람들이 잘 믿지도 않으니까 소문 같은거 크게 신경쓰지 마시죠’라고 받아친 거다. 머리를 짜내서 반격할 말을 찾아내기도 전에, 그는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말씀드리는 걸 잊었군요. 손님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을 먼저 했어야죠.”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내 뒤에서 걸어오는 에스틴이 웬지 얄밉게 느껴졌다. 두고 보자. 나중에 꼭, 한 방 먹여주마.

“기리인!”

요안나 선생님과 이브가, 자리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언제나처럼 그녀들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드러내는 복장이 아닌데도 온갖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몸매의 그녀들은 종종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다녀왔어? 일은 잘 됐고?”

“어, 네. 볼일 잘 봤어요.”

그녀들에게 이 일을 모두 말해줄 수는 없어서, 에스 이야기는 쏙 빼고, 나는 사람들을 몇 명 만난다고만 말했다. 디오틀라 공방에도 갔다 와야 한다고 말했고.

“백작님, 그리고 아가씨들. 저녁이 준비되었습니다. 식당으로 오시지요.”

테리아가 식당의 문간에 나와 말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배가 꽤나 고프다는 것을, 아까 에스의 쇼핑에 쓴 에너지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을, 그리고 식당에서는 매우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밤에 두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지금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 그리고 이브. 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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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내 집에서 처음 품는 여자가 한 번에 둘이라니,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나른한 만족감에 젖어, 세 사람이 동시에 드러누워도 전혀 좁은 기분이 들지 않는 넓은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테리아가 내가 나간 사이에 갈아준 새하얀 시트는, 우리 세 사람이 뿜어낸 애액과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우웅...”

아직도 황홀경에서 반쯤은 빠져나오지 못한 요안나 선생님이 내 왼쪽 팔 안으로 안겨들어와 내 젖꼭지를 입으로 지분대는 동안, (이럴 때만) 충직한 이브는 방 한쪽 구석의 세면대에서 수건을 적셔와서는, 나와 요안나 선생님의 몸을 꼼꼼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닦았다. 내가 이브의 봉사를 받으며 요안나 선생님의 머리와 땀에 젖어 마치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나는 등을 쓰다듬고 있는 동안, 닦기를 마친 이브는 침대 시트에 정화 마법을 펼친 후,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이리 올라와, 이브. 아까까지 같이 잤던 사람이 그렇게 떨어져 있는 거 싫어.”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자, 이브는 나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바라본 후,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오른쪽 팔 안으로 안겨들어왔다.

“주인님... 너무 멋졌어요. 이 노예는 몇 번이나 가벼렸는지 세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가슴 위에 장난스럽게 몇 번이나 키스했다.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나는 손을 움직여, 요안나 선생님의 크지만 팽팽한 그 이율배반적인 가슴과, 그보다는 한 컵 정도 작지만 충분히 멋진 가슴인 이브의 가슴을 양 손에 쥐었다. 가볍게 주물거리자 그녀들은 아직 열기가 남은 한숨을 쉬었다.

“아, 맞다, 기리인.”

선생님이 불쑥 말했다. 내가 그녀의 가슴을 계속 주물거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제 니가 물어봤던 거 기억나?”

“어떤 거요?”

“내가 대도서관에서 어떤 자료를 발견했는지.”

아. 맞다. 그 이후 너무 어마어마하고 황당한 일들이 많이 생겨 잊고 있었지만, 선생님도 내가 어제 밟았던 그 돌 위에 서셨었지. 그리고 자료를 발견했었겠지.

이브가 아직 제 정신이었을 때, 이브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대도서관에 내가 못 들어오게 할 거라는 이브의 말에, ‘만약 선생님이 선다면, 어떻게 될 것 같냐’라고 되물었었지.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선생님이라면, 내가 필요한 자료를 발견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무엇을 발견했느냐’고 물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서였을까, 아니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때 선생님은 답변을 피하셨었잖아요.”

“어, 그게... 나조차도 확실하지 않았거든. 아니... 확실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믿고 싶지 않았달까...”

“뭐가요?”

“내가 대도서관에서 찾은 자료는, 책이 아니었어. 아니... 뜬구름잡는 소문들과 이야기들을 모은, 그저 종이쪼가리들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거기에서 나는 너처럼, 마법을 과하게 써서 과부하에 걸린 후 회복되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어.”

“그래요?”

이건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잠시만.

“그 정도의 이야기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지 않았어요?”

“그건 그런데... 그 내용이, 나조차도 믿을 수가 없어서...”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세요.”

============================ 작품 후기 ============================

조회수가 점점 떨어지네요.

아무래도 최근 연재분의 스피드왜건 분량의 영항이 아닌가 싶네요 ^^;;

얼른 템포 올려서 다시 재미를 되찾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이 많든 적든 성실하겠다는 초심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제 힘입니다.

잉여로사는법 님 //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늘 감사드립니다1

잘되기를 님 // 감사합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님 // 의도하지 않았지만, 르플레스탁도 아무르타트처럼 석양을 향해 떠나갔네요. 날아가진 않았지만. 그리고보니 르플레스탁도 다섯 글자네요.

스키테 님 // 사실 그 장면을 적었다가 지웠습니다. 너무 개그캐가 되는 것 같아서 ㅋㅋㅋ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다카메이 님 //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인페르니우스 님 // 감사합니다!

건필하십쇼! 님 // 정주행과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밀당의 마스터! 하지만 우리 기리인은 이미 터득하고 있겠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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