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8 10. 흐려진 별 =========================
“차라도 한 잔... 같이 하고 싶지만, 아르논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했다간 원망받을 눈치군.”
“아버지는 별 말씀을 다...”
부정은 하지 않은 채 아르논이 얼굴을 붉혔다. 나는 약간 곤란한 듯 아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 모스 백작. 자네 재미있는 일을 추진중이던데?”
역시, 이웃 영지다보니 이야기가 바로 들어간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스프 공작이 이야기한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건 다름아닌, 아루탄 씨의 호의에 의해 만들어진 ‘모피르 상단’ 이야기였다. 내 성인 모스와 아루탄 씨의 성인 다피르를 합쳐 이름붙인 모피르 상단은, 내가 황제 폐하로부터 약속받은 영지의 세금 수입을 떼어 투자해 자본 비율을 7:3으로 맞추고, 대신 아루탄 씨의 상단에서 운영 인물들과 교역로를 떼주어 이윤 분배는 5:5로 하기로 했다.
얼마 전, 남부 지역에서 봄밀의 수확이 이루어지면서 첫 세수입이 들어왔고, 나는 첫 투자금으로 그 전액을 모피르 상단에 주었다. 그걸 자본금으로 모피르 상단은 첫 교역에 나섰다. 사실 모피르 상단이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루탄 상단 소속이었던 사람들이 이름만 바꿔단 것일 뿐이었다.
단 한 군데, 새로 개척하기 시작한 교역로만 빼고 말이다.
“이거 참. 자네, 그런 일을 할 때는 이웃의 의견도 들어보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자네가 그렇게 하는 통에 내 영지가 조금 더 쪼들리게 되었다는 건 아나?”
투덜대는 나스프 공작은, 그러나 그렇게 기분나빠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도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저희가 캐낸 광물을 억지로 사주시지 않아도 되어 나스프 영지에서도 당장은 돈이 생긴 걸로 아는데 말입니다.”
‘어쭈, 이것봐라?’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공작은, 곧 받아쳤다.
“대신 우리가 제도까지 운송하며 벌던 마진은 사라지지 않았는가.”
“대신 저희가 그간 공짜에 가깝게 지원받던 곡물을 정당한 가격을 드리고 구매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남대륙산 곡물이 들어온다 해도, 결국 밀을 먹어야만 하니까, 공작령에서 밀을 사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 그 말은 맞네.”
의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공작.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리 이런 질문이 있을 줄 알고 대책과 답변을 준비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공작은, 약간은 씁쓸하다는 태도로 말했다.
“백작. 자네의 영지가 추진하는 이번 일이 잘 된다면, 물론 그 부는 우리 공작령으로도 들어올테지. 하지만 나로서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네. 공작령 주변 영지들을 나는 마치 자식과 같은 영지로 생각해 왔거든. 그만큼, 그들과의 거래에서는 손익을 따지지 않아왔고 말일세. 그런데 그 중 한 자식이 장성해 독립해서 이제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며 오히려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는 그런 기분이 드는군.”
전에도 생각했지만, 나스프 공작은 일신상의 이익만 탐하는 단순한 권세가는 결코 아니었다. 물론 권력다툼을 하기도 했고, 선황 폐하의 비로 여동생을 밀어넣기도 했지만... 주변 귀족가들을 쥐어짜서 자신의 부나 무력을 강화해 영향력을 키우는 방법이 있었을텐데도, 공작은 그리 하지 않았다. 지금의 공작 뿐만 아니라 공작가 대대로 그러는 것 같았다.
아마, 그런 복합적인 면모가, 아르논에게 와서는, 불안정하게까지 보이는 매력으로 나타나는 것 아닐까?
“이런, 이야기가 길었군. 언제 한 번 차나 한 잔 하세. 나도 모피르 상단에게 부탁할 것이 많이 있거든.”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공작님.”
서로 도움이 되는 거래라면 못 할 이유가 없지. 황제 폐하께서는 약간 떨떠름해 하시겠지만 말야.
“그래, 어서 가게. 오늘은 오페라를 보러 간다고?”
“네, 아버지.”
“무슨 작품이냐?”
“‘왕비 리에나’에요. 오늘은 에아랍이 리에나 역이에요.”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오오. 에아랍이? 이거, 귀가 호강하겠구나. 아르논, 너도 에아랍의 공연은 본 적이 없지 않느냐?”
아르논이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는 구하기조차 쉽지 않은 표일텐데, 모스 백작의 수완이 대단하구나. 나조차도 5년 전에 간신히 한 번 본 게 다였는데...”
그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해소하려는 듯, 약간 과장된 손짓을 하며, 말했다.
“자, 자. 늙은이 말이 길었구나. 얼른 가거라. 늦겠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공작님.”
“다녀올게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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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아르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백작님.”
아르논이 정색을 하고 나를 불렀다. 화를 내지 않는데 화내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어 자세를 바로 하니, 약간은 서운해하는 눈치로 아르논이 말했다.
“언젠가는 눈치채시지 않을까 해서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그게 너무 길어지네요. 언제까지 그렇게 꼬박꼬박 경칭을 붙이실 작정이세요?”
아... 그거냐.
“죄송합니다. 혹 무례를 범할까 해서...”
이크. 실수했다. 이제 아르논은 본격적으로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 백작님은 저와 친구가 되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요...”
“그런데 왜 백작님은 저와 가까워지기를 싫어하시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제가 먼저 부탁드리기 전에는 저에게 뭔가 바라시는 것도 없고, 호칭도 딱딱하게 부르시고... 저 너무 서운해요.”
최대한 미루고 싶었던 순간이었는데 결국은 와 버렸나. 쩝.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려본 후, 손을 뻗어, 마음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르논의 왼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흠칫. 춤 출 때 여러번 잡아봤던 손이었지만, 그 때와 지금 이렇게 대화중에 손을 잡는 것은 의미가 다르니까. 아르논은 그걸 모르지 않는 듯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서도 손은 뺴지 않는군.
“죄송합니다. 아니, 미안, 미안해. 아르논.”
“......”
얼굴을 보기 약간은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아르논.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로서도 숨길 수 없는 홍조가 귀까지 뻗어 있었다. 아이고... 진짜, 백색 산맥의 만년설 같은, 한 번도 경험이 없는 것 같은 여자구나. 손 한번 잡았다고 저러냐.
어쨌든, 나는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른 후, 말했다. 이 정도야, 시스템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도 쉽게 넘길 수 있지.
“너무 갑자기 스스럼없이 굴면, 버릇없다고, 너를 막 본다고 생각할까봐 그랬어. 너를 생각한다고 한 행동인데 오히려 너한테 상처를 줬네. 미안해, 아르논.”
“...치.”
명백히 누그러졌지만, 아직은 풀고 싶지 않다는 티를 내는 아르논. 그걸 모르지 않는 나는 그저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잠시 기다릴 뿐이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 그만 기분 풀어줘. 좋은 공연 보러 가는데 기분 나쁘면 안 되잖아.”
“...앞으로는 안 그럴거야?”
“응. 앞으로는 안 그럴게.”
말로야 무슨 말을 못해. 아르논은, 여전히 약간은 빨개진 얼굴로, 비로소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웃었다. 여전히 손을 놓지는 않은 채로, 우리는 잠시 달리는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대화를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르논, 그런데... 우연히 친하게 돼서 티켓을 받기는 했는데, 에아랍 씨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아르논은 눈을 크게 뜨더니, 약간은 빨라진 말투로 말했다.
“그렇겠구나, 기리인은 모르겠구나. 제도의 오페라계에서 10년째 부동의 프리마 돈나(prima donna)인, 최고의 소프라노야. 리릭(lyric)이면 리릭, 드라마티코(dramatico)면 드라마티코... 작품에 따라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것도 그렇지만, 특히 인간 같지 않은 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진짜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평가가 나올만도 하지...
“너무 인기 있어서, 그녀가 주연하는 공연의 표는 몇 달 전에 미리 사 두지 않으면 살 수조차 없대. 게다가 살 때 마법적인 표식을 하기 때문에, 산 사람 말고는 그 표를 쓸 수도 없어서 암표조차 없고 말야.”
“그래...?”
“응. 그러니까,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우리 아버지 같은 분도 직접 표를 사시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와...”
그런 줄은 몰랐지... 쩝. 그런 줄 알았으면 요안나가 떠나기 전에 같이 먼저 올 걸 그랬네.
“새삼 대단해, 기리인. 어떻게 에아랍 씨를 알게 됐니? 에아랍 씨 같은 분이 표를 보내 줄 정도로 친하게 된 계기가 뭐야?”
“아하하... 그건 좀 대답하기 곤란해.”
“그럴 거야?”
“아, 다 왔다.”
아르논이 또 삐진 척 하기 전에, 다행히 마차는 국립극장 앞에 도착했다. 평일 공연인데도, 게다가 오후 공연도 아니고 정오 공연인데도,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말해주듯 극장 앞은 매우 혼잡했다. 간신히 마차가 극장 앞에 멈추고, 나는 먼저 내려 아르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논은 생긋 웃으며 인사하고는 내 손을 잡고 내렸다.
“오오...”
아르논도 기본적인 미모가 되는데다 꽤나 공들여 화장을 했고, 그리고 (이런 말 하면 좀 민망하지만)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나 되다 보니, 올라가던 사람들 중 호화스러운 마차가 멈추자 돌아본 사람들이 탄성을 냈다. 그리고 그 탄성이 계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모스 백작이다...”
“그 왜, 이번 전쟁에서...”
“그 옆에는 누구지?”
이런 말들이 마구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아.
“아르논, 가자.”
“으, 응.”
극장도 대도서관이나 대신전 못지않게 멋진 건물이었는데, 제대로 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다음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아르논의 손을 붙잡고 최대한 빨리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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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나누는 것은 이익과 명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좇지.
그러니 그대여,
그대의 이상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나?
그대의 이상은 그대만을 위한 것일 뿐.
나의 명예도 나의 이익도 되지 못하는 것.
그대가 말하는 희망찬 미래의 모습은,
그저 구름으로 짓는 성일 뿐.
꿈에서 깨어라, 치르낙!
나는 그대의 종속물이 아니니!
그대의 이상을 펼치고 싶거든,
먼저 현실을 바라보라!]
“후아...”
제도 최고의 프리마 돈나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쩌렁쩌렁하고 쭉쭉 뻗어나오는 에아랍 씨의 목소리. 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치르낙의 구애를 차갑게 거절하던 리에나 왕비, 아니 당시는 그저 상인의 딸 평민 리에나 역할의 그녀는, 수수한 복장임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의 어느 누구도 범접조차 못할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와... 오페라라는게 이런 거였나. 화려한 무대와 의상, 그리고 아래로 쑥 파인 공간 안에 밀집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그리고 목소리 하나로 무대를 사로잡는 배우들의 호연. 그 중에서도 에아랍 씨는 ‘왕비 리에나’라는 극 제목에 부합하듯, 극을 혼자서 끌고 가는 리에나 역에 아주 잘 어울렸다.
“대단하지?”
내 옆에서 속삭이는 아르논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오페라인데,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띠링!’
<당신은 세련되기 그지없는 예술의 편린을 목격하였습니다. 거듭된 경험은 당신의 안목을 높여, 당신의 예술성과 감수성을 키워줄 것입니다.>
<예술의 편린 – 1/20>
그런 메시지마저도 약간은 방해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집중해서 오페라를 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일단 초반은 잔잔하게 시작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기리인이 더 빡세게 구를테니까요...
반반무의 위력을 실감중입니다. 새로 읽어주시는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읽어주시고, 선/추/코/쿠 주시는 여러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씁니다.
웁수 님 후원쿠폰 6장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그래도, 댓글 세네개 달릴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기분좋습...^^ㅋ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건필할게요!
으악으아악 님 // 어이쿠 쿠폰 감사합니다!
스키테 님 // 감사합니다!
수와이 님 // 쿠폰 감사합니다!
Guaaaaak 님 // 아직까지 드러내지 않은 설정도 있으니 ^^; 감사합니다!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살펴가세요 님 // 쿠폰 감사합니다!
책모기 님 // 감사합니다!
인페르니우스 님 // 나이스 보트 타지 않게 조심해야겠죠? ㅎㅎ;;; 감사합니다!
Zxion 님 // 죄송합니다만 읽어본 적이 없는 작품이네요 ^^;; 찾아서 읽어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잘되기를 님 // 감사합니다!
포옹프 님 // 정주행과 칭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