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99 10. 흐려진 별 =========================
정신차릴 틈도 없이 극은 진행되어, 어느새 최종장에 다다라 있었다. 리에나가 결국 치르낙을 받아들여, 치르낙을 보좌해 치르낙이 설득과 협상을 통해 다른 나라들을 조금씩 복속시켜 나가는 과정이 그려졌다.
제목인 <왕비 리에나>에 걸맞게, 이야기는 시종일관, 리에나가 끌고 나갔다. 치르낙 역의 남자 배우는 얼굴을 내비치는 빈도가 후반부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아마 치르낙 대왕이 계속 나오면 리에나 왕비에게로 비춰지는 빛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나보지.
대왕이 세 아들들을 데리고 남부 왕국 연합군을 무찔렀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져 눈을 감자, 리에나 왕비가 노구를 이끌고 치르낙이 잠들어있는 관으로 다가가는 마지막 장면이 나왔다. 극장 안의 모든 불이 꺼지고, 리에나를 향해 빛이 집중되고 있었다.
[신이시여,
천칭의 반대편을 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인간에게 무엇이 허락되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이처럼 길에서 잠드는 운명은 맞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마른 모래처럼 부스러지는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그대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하군요.
마치 나는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아아, 치르낙. 치르낙----!]
온 힘을 다해, 극장이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으로 에아랍 씨는 절규하듯 고음을 내질렀다. 한참 그렇게 강한 성량으로 지르던 소리가 조금씩, 음정은 유지한 채 작아지고, 작아지다, 마치 흔들리는 촛불처럼 흔들리다... 픽 하고 꺼졌다. 에아랍 씨가 치르낙의 관 위에 엎드리고, 불이 꺼지고 나서야... 나는 내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아르논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작은 한숨소리가 들렸으니까.
천사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오고, 서서히 막이 내려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고 환호하자, 막이 다시 올라가고, 먼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배우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배우들이 조연부터 차례대로 나와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치르낙이 나와 인사한 후, 주인공인 리에나를 가리키고, 리에나 왕비 역의 에아랍 씨가 무대 앞으로 걸어나오자, 사람들의 환호는 귀가 멀 지경이었다.
객석 이곳저곳을 향해 인사하던 에아랍 씨의 눈이, 2층 박스석에 앉은 나와 마주쳤다.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던 에아랍 씨는, 잠시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르논이 놀라 에아랍 씨와 나를 번갈아 보는 동안 나는 에아랍 씨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짧은 인사가 끝난 후, 다들 다시 손을 잡고 인사하고, 막이 내려갔다. 막이 내려가고도 한참동안, 사람들은 박수치고 발을 구르며 환호했다.
“기리인, 정말 에아랍 씨랑 알아?”
“그렇다니까~”
이 쯤에서 한 번 공격을.
“실망인데, 아르논. 설마 내 말을 안 믿은 거야?”
아니나다를까 아르논은 기겁을 하며 당황해했다.
“아, 아냐, 그, 그게 아니구...”
누가 봐도 ‘들켰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는 아르논은, 그 나름대로 귀엽고 매력적이었다. 한 번 밀어줬으니 또 한 번 당겨줘야겠지?
“아르논. 에아랍 씨한테 가볼래?”
“응? 그래도 돼?”
안그래도 큰 편인 눈을 더 크게 뜨며, 눈을 빛내며 나를 향해 달려들 듯 다가오는 아르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볼래! 인사하고 싶어!”
나는 아까 챙겨왔던 꽃다발을 의자 아래에서 꺼내들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르논이 아까 내가 꽃다발을 챙겨왔는데 자신에게 주지 않는 걸 보고 약간 의식하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 말 안 했는데, 흐흥. 이제는 알았겠지?
우리는 박스석 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 서 있는 극장 직원에게 무대 뒤 대기실로 향하는 길을 묻자, 그는 직접 앞장서서 우리를 대기실 앞으로 안내해 주었다. 대기실 앞은 이미 온갖 종류의 선물상자들과 꽃과 과일 바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들고 가는 꽃다발이 완전히 무색할 만큼 말이다.
<리에나 역 – 에아랍 아마이바 대기실> 이라고 적혀 있는 문 앞에는, 어깨가 넓고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생각보다 정중한 말투로 그 중 한 남자가 물었다.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이 쪽은 아르논 나스프 양이구요. 에아랍 씨를 보러 왔는데요. 아마 말씀을 전하면 들어오라고 할 겁니다.”
나도 꽤나 사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긴 했지만, 나스프 공작가의 영애의 이름은 그보다 더 강한 모양이었다. 아르논의 이름을 듣자마자 두 사람은 약간 놀란 빛을 짓더니, 한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뭐라뭐라 말했다. 그러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모스 백작님! 와주셔서 감사해요!”
에아랍이 채 분장도 다 지우지 못한 채 내 쪽으로 다가와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아르논이 나를 보고 아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셨어요? 공연 잘 봤어요.”
“백작님이 오시는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했을 거에요.”
“거기에서 더 열심히 할 구석이 있긴 한 거에요? 오페라는 생전 처음 보는데, 생전 처음 보는 오페라가 에아랍 씨 작품이라는 걸 신께 감사할 정도로 대단했어요. 저 팔에 소름돋았다니까요.”
“말씀 감사해요.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안으로 차 세 잔만 부탁해요.”
마지막 말은 우리가 아닌, 문 밖에 서 있던 남자들에게 한 소리였다. 나와 아르논은 약간 쭈뼛대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예전 레카 시에서 수르키 씨에게 마지막 인사하러 갔을 때 이렇게 대기실로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잘 지내려나. 그때의 대기실과 구조 자체는 대동소이했다. 약간 더 크고, 약간 더 화려한 정도. 아르논과 내가 손님용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동안, 그녀는 거울 앞의 큰 의자에 앉았다.
“잠시 분장 좀 마저 지울게요.”
온갖 사람들이 바삐 오가며, 마지막 막에서 노년의 리에나 왕비 분장을 하느라 가발과 노인 분장을 한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바삐 닦고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분주함이 익숙한지,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 같으면 말도 잘 안 들릴 것 같은데.
“백작님, 같이 오신 분은 누구세요?”
“아, 네. 이 쪽은 나스프 공작가의 영애, 아르논 나스프 양이세요.”
“어머나... 귀한 분을 모셨네요. 레이디 아르논, 공연은 마음에 드셨나요?”
“정말 최고였어요. 전부터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오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아르논은 누가 들어도 흥분한 것이 명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아랍 씨는 이런 경험이 많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모스 백작님은 제게 은인 같은 분이세요. 그래서 앞으로도 백작님을 종종 모실 생각이니, 레이디 아르논께서도 백작님과 함께 앞으로도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으윽. 아르논이 나를 돌아보는 눈빛에 열기가 몇 배는 강해지는 느낌이다. 뚫어지겠어요, 이 아가씨야.
---
그 방에서 차를 다 마시고 나오자, 해는 이미 서쪽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아까 국립극장 앞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도 이미 다들 사라지고, 우리를 아까 태우고 왔던 화려한 마차가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로 내려가는 긴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기대하고 있을 것이 명백한 아르논에게) 말했다.
“아르논, 시간 괜찮으면...”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갈까? 테리아가 저녁 넉넉히 해 놓는다고 했거든. 서재에서 같이 이야기도 좀 더 하고.”
“갈게.”
즉답. 안 청했으면 또 삐지려고 했구나. 무서운 여자.
우리 둘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두 말 없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아르논과 나는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본 오페라 이야기에서, 연극 이야기, 연기 이야기... 레이디들이 ‘화술’, 그러니까 대화가 끊기지 않게끔 하는 이야기 방법과, 그 근원이 되는 교양 저반에 대해 교육을 받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아르논의 화술은 교육으로 성취할 수 있는 그 이상인 것 같았다.
이야기하는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내가 이야기할 때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고, 적절한 의견을 이야기하는 그녀는, 요안나만큼이나 훌륭한 대화 상대였다. 요안나가 그 지성과 통찰력으로 내 지적인 면을 자극한다면, 아르논은 편안하게, 대화 자체를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아. 요안나. 보고 싶다. 떠나간지 한 달이 지났고, 발신일이 한 달 전인 편지를 보름 전에 받은 게 고작이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 보름은 걸리는데다, 요안나는 또 주변을 탐색하러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마탑에도 잘 없다고 한다. 내가 마법사가 아니라 메시지 스펠에도 한계가 있고.
“무슨 생각해?”
아차. 요안나 생각을 하다 그만 대화가 잠시 끊겨 버렸다. 여기서 다른 여자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건... 뭐 그게 통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르논한테는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배고프다는 생각?”
“후훗, 그러고 보니 우리 점심을 걸렀구나?”
“그러게, 원래 생각은 중간 휴식시간에 간단히 요기라도 하려고 했는데...”
“둘 다 넋이 나가서 배고픈줄도 몰랐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뭐가 웃긴지도 모른채 쿡쿡 웃었다. 그러는 동안 마차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 모퉁이를 돌아 우리집 앞에 멈춰섰다. 언제나처럼 내가 아르논이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그리고... 평소와는 달리 손을 가볍게 잡은 채, 우리는 에스틴이 매일 공들여 손질하는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으로 갔다.
“아가씨!”
마차가 온 것을 보았던지, 에스틴이 황급히 현관문을 열며 달려왔다.
“에스틴,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럼요. 공작님께서도 잘 지내시죠? 에크네익스 집사님도?”
“응, 모두 건강하셔.”
그제야, 에스틴은 나를 보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마, 잘 돌아오셨습니까 에 더해서, 죄송합니다 의 의미도 있겠지. 아무튼 나스프 공작가만 관련되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니까. 그래서 당신을 아직 완전히 못 믿겠는 거기도 해요, 에스틴.
“에스틴, 아르논은 저녁 식사를 하고 갈 거에요. 그 전에는 서재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에요. 점심을 먹지 못했는데, 부담되지 않을 요기 거리가 있을까요?”
“안 그래도 티타임때 내놓을 쿠키를 점심에 테리아가 구워냈습니다. 그것과 우유를 탄 커피를 올려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잡은 채로, 나 혼자 쓰는 공간인 2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아르논’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본 에스틴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와...”
서재에 들어서자 아르논은 사방을 둘러보며 탄성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서재는 내 손길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책을 선택한 것도, 가구를 선택한 것도 모두 황태후 전하가 시킨 사람의 손길이었다. 자연히, 책꽂이를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좋은 책들이 많은 것 같았지만, 실상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양장된 고전 위주였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읽다가 다른 생각 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는 책들은 좀 그렇다.
“기리인, 요즘은 뭐하면서 시간 보내?”
서재 가운데의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아르논이 물었다.
“아, 황제 폐하께서 부탁하셔서... 공부하고 있어.”
“공부? 어떤 공부?”
“법률하고... 회계.”
“세상에... 머리아프겠다. 황제 폐하께서 ‘부탁’하신 일이니까 안 할 수도 없고... 세상에, 그럼 저기 쌓인 종이 뭉치가, 다 ‘숙제’야? 와...”
아르논은 잠시 감탄했다. 늘 생각하지만, 이 순진한 매력을 지닌 아가씨는 감탄할 때가 가장 예쁜 것 같다. 아르논은 잠시 내 책상 위의 내 분투의 흔적을 보더니, 말했다.
“기리인, 황제 폐하께서는 너를 정말 중용하시려고 하는 모양이야.”
“응?”
“아니... 폐하의 총신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게 기리인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
윽.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 아가씨 말을 할 때 생각보다 거침이 없네.
============================ 작품 후기 ============================
오페라 노래 가사를 쓰려고 머리를 쥐어짜다가,
예전에 찾아봤던 가사들이 기억나 전체적으로 가사를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깨는 가사들이 많더군요.
대표적으로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
'아버지, 이 남자 멋진 사람이에요,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강물에 뛰어들겠어요...'
음음. 그래서 그냥 대충 써버렸습니다. 쿨럭.
내일이 300회군요. 정말 징하게도 썼네요.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느블르스브그으 님 // 정주행과 칭찬 감사합니다! 앞의 느블르스 는 노블레스 인 거 같은데 브그으 는 뭔지 모르겠네요 ^^;;
Zxion 님, Guaaaaak 님 // 아, 어새신 크리드 게임. 해 보거나 그 스토리를 읽어보거나 하지는 못했네요. 그저 인터넷에서 Assassin Creed를 Ass ass in Creed라고 띄어써서 '엉덩이 엉덩이 안의 신조'라고 번역한 개그짤방만 봤습...
인페르니우스 님 // 감사합니다!
유한도전 님 // 글쎄요, 어떨까요? ^^;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cacao99 님 // 감사합니다!
포옹프 님 // 감사합니다!
강철의혼 님 // 냉장고 님의 대항해-아티팩트 에이지나 그 전작 모두 제가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스키테 님 // 주인공은 굴러야 제맛...
잘되기를 님 // 감사합니다!
건필하십쇼! 님 // 뭐, 그런거죠...^^;
책모기 님 //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어서 굴러라, 핫산, 아, 아니, 기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