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0 10. 흐려진 별 =========================
“뭐, 폐하와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뭐 아직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어서...”
일단 겸양의 말로 시작했는데, 아르논은 대뜸 고개를 저었다.
“기리인, 보통 사람들이야 너를 ‘새롭게 떠오른 영웅’ 정도로 알지만, 아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일단 우리 아버지만 해도 얼마나 너를 높게 치시는데.”
“정말?”
“그럼. ‘나이에 걸맞지 않게 현명하고, 한 마디를 하면 다음 세 마디를 읽어낸다’고 하신 적도 있고, 무엇보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시절에 목숨을 노리던 사람들을 잡아낸 적이 있었잖아? 그 과정을 알고 나신 후 아버지께서 혀를 내두르셨어. 서재에 계시던 아버지에게 차를 가져다 드린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이 친구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 낸 걸까, 무섭구나’라고 하신 적도 있어.”
언제나 제3자의 입을 통해 듣는 칭찬은 낯을 간지럽게 만든다. 내가 얼굴을 가볍게 긁고 있자니, 아르논은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래. 아버지 이야기 말고도, 기리인 너가 황궁 들어가는 날이면 황제 폐하께서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진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없어?”
“아... 폐하께서 짜증을 덜 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는데...”
후훗, 하고 가볍게 웃은 아르논은, 내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별 의미 없이 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리인, 알지? 폐하께서 내 사촌 오라버니인 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논은 옛날 생각을 하듯 약간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리인을 알기 전까지 나는 폐하가 제일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어. 어릴적에 가끔씩 같이 놀 때도, 아니면 고모, 어, 그러니까 황태후 전하를 통해 듣는 이야기로도 황제 폐하의 성취는 우리 오빠들보다 어마어마하게 빨랐나봐.”
“응, 나도 황제 폐하랑 이야기하다 보면 폐하의 머리 회전 속도에 놀랄 때가 많아.”
“그런 폐하라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속도를 못 쫓아오는 것에 답답해하시는 거야. 그런데 기리인 너가 있어서 그걸 나눌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가... 난 잘 모르겠어.”
아르논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기리인, 지금 황궁에 한 주에 한 번 들어가지?”
“응.”
“혹시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폐하께서는 나를 왜 잘 써먹으려고 하시지 않을까? 매주 한 번만 들어가는 걸로 괜찮을까?”
그녀는 깜찍하게 내 흉내를 냈다.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내는 것과 달리 그녀가 지은 궁금해하는 표정은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어, 그래... 실은 폐하께 직접 여쭤본 적도 있어. 제가 더 자주 들어오면 어떨까요, 아니면 공식으로 뭔가 일을... 이라고 했는데,”
“내가 맞춰볼까? 단칼에 거절하셨지?”
깜짝이야. 선생님이나 하는 줄 알았던, 내가 할 말 미리 앞질러 맞추기를, 다른 사람도 아닌 아르논이 할 줄은 몰랐다. 동시에 나는 속으로 아르논에게 사과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내 못된 버릇 중에, 남의 머리를 낮춰보는 게 있는데, 이번에도 그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다행히, 바로 그 때, 에스틴이 차와 쿠키를 날라왔다. 아르논이 웃으며 에스틴에게 고개를 꾸뻑하는 동안, 나는 마음속의 동요를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이 여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공작가의 레이디구나. 정치나 사교계에 있어서는 결코 무시 못할 식견을 지녔구나. 아르논은 쿠키를 한 입 깨물고는, 환한 표정을 짓더니, 웃으며
“기리인, 너를 지금 어떤 일에 묶어버리면, 예를 들어... 황제 폐하 옆에서 매일 폐하를 돕는 일을 맡기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내가 문제없이 일을 수행했을 때를 말하는 거지? 어... 그래서 일을 잘 해서 승진한다 치면...”
“기껏해야 궁내부 장관까지 올라가지 않겠어?”
아, 그런가.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니, 아르논은 우유를 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재미없고 머리아픈 회계나 통계, 법률 같은 기초부터 기리인에게 공부시키는 거 아닐까? 몇 년 사이에 기리인이 준비되면, 바로 중추적인 부서로 등용하려고 말이야.”
“아...”
내가 멍하니 그런 소리를 내자, 아르논은 웃으며 말했다.
“몇 년 후에 기리인은 젊은 재상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아르논, 자꾸 그러지 마. 부양 마법 끝나면 땅에 떨어져 엉덩방아 찧을 일밖에 없는걸.”
“어머? 내가 일부러 맘에도 없는 칭찬 한단 말야?”
일부러 그런다는 티를 팍팍 내며 아르논이 입술을 삐쭉였다.
아아.
요안나가 내 곁을 비운지 오래라서일까?
남의 눈을 의식한 이브가 자주 오지 못해서일까?
내가 소문을 의식해 예전처럼 섹스를 자주 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내 주저하는 마음을 뛰어넘을 정도로, 아르논이 귀엽고 매력적이라서일까.
모르겠다.
물론 외적인 조건만으로 보면, (민망하지만) 내가 지금 제도 최고의 신랑감이라면, 아르논은 가진 조건이 부담스럽지만 제도 최고의 신부감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나스프 영지와 인접한 곳에 백작령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만약 내가 아르논과 연애하게 된다면, 나스프 공작 및 공작가의 모든 사람들은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할 것이다.
하지만 황제 폐하를 비롯해, 남부에서 공작의 영향력을 줄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모두 떨떠름해할 것이다. 폐하는 ‘꼭 그래야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융파트가 사라져 약간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 중앙에서 교역과 물산을 장악하고 있는 중부 귀족들의 강한 압박을 받게 되겠지. 추가적으로 첩실을 들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런 모든 고난을 뛰어넘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황제 폐하와 약간 사이가 멀어질 각오를 하고 있는가? 하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그녀와 거리를 둬 왔고 말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해?”
순진한 소녀처럼 묻는 아르논은, 넓은 창으로 들어온 주황색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과 눈썹이 주황색의 광택을 덧붙여 빛나고 있었다. 나보다 두 살 많지만, 그리고 그녀의 몸은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성인 여성의 매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가끔씩 보여주는 순진한 모습은, 순수한 소녀의 매력을 뿜어내는 것이었다.
전에는 그게 불안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불안정하다는 것은, 의외의 폭발력을 발휘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 아냐.”
결국 나는 약간 어버버하는 말투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아르논은 재미없다는 투로 피이- 하고 소리냈다. 후우. 위험했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아가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다행이다. 나는 먼저 일어나 아르논에게, 마치 왈츠를 신청할 때처럼, 왼손을 내밀었다.
“갈까?”
“응.”
아르논은 내 왼손에 가볍게 오른손을 올렸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가볍게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 다음...
“어어어... 읍?!”
그녀는 내 왼손을 끌어당겼다. 예상은 했다. 예상은 했지만... 만약 내가 저항한다면? 힘을 주고 버틴다면? 그녀는 매우 민망해할 테고, 부끄러워할 테고... 자칫하다가는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 짧은 순간동안 그렇게 머리를 굴린 후,
나는 아르논이 내 팔을 끌어당기게 두었다.
쪽.
그리고... 아르논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치 학생 때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끌어내어 키스하듯, 입술만 가볍게 내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아르논은, 아까 내가 마차에서 손을 처음으로 잡았을 때보다 훨씬 더, ‘이러다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서 아래에 빈혈이 오는 거 아닌가’ 같은 실없는 걱정이 들 정도로, 얼굴을 붉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끌어내서 일을 저지른 주제에 그녀는 심하게 부끄러워하며, 그러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좋은 공연 보여줘서 고마워. 이건 감사의 표시야.”
아.
간만에 마음 한 구석에 쿵 하는 울림이 온다.
동시에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 르플레스탁을 만나고 돌아오며 생각했던 것처럼,
아직 닥치지 않은 문제에 대해 미리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그에 대해 걱정하며 미리 가기 전부터 그 길을 가지 않으려는 것은 나 답지 않다.
‘띠링!’
<자기합리화 아닙니까?>
시스템이 이죽거린다. 뭐, 부정은 하지 않겠다. 어쨌든, 지금의 이 사태는 내 우유부단함에서 기인한 것도 일정부분 있기는 하니까. 애초에 이 사태를 막고 싶었다면, 아르논과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던 공작의 부탁을 거절했어야 했겠지. 아니면 그 후에도 선을 딱 그었어야 했고. 그러지 못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고 말이다.
여러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내 머릿속에 지금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다.
아르논은 매력적인 여자다. 그리고...
레이디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리고 그걸 막지 않았는데, 내가 여기서 우유부단한 행동을 계속하게 되면... 그건 신사로서, 기사로서 할 행동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에아랍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저희 하피에게는 ‘꽃을 울리지 않는 나비’라는, 다소 묘한 단서가 있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요안나가 내 침대 위에서 나에게 한 말이 떠오른다.
“난 내 남자가 세상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사람이었으면 해.”
“그래줄 거지? 수많은 꽃들을 울리지 않을 거지?”
그래야겠지. 나는 한 걸음 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흠칫 놀랐지만, 뒤로 물러나지는 않는다. 나는, 손을,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 쪽으로 가져간다. 내 손 안에 닿은 그녀의 몸은 긴장과 흥분으로 표시나게 떨리고 있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언제든 그녀가 주저한다면 놓아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듯, 나는 그녀의 허리를 천천히 내 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아르논은 떨면서도 거부하려는 움직임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내 쪽으로 끌려왔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마수에 올라탄 셈이다.
<자기합리화입니다.>
알아 임마.
“내가 한 거에 비해 너무 과분한 감사인데.”
내 품 안에 쏙 들어온 아르논은, 떨고 있지만, 수줍게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이건 답례.”
아르논이 사르르 눈을 감는다. 딱 알맞은 키.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아까 그녀가 나를 끌어당긴 것이 마치 새들이 부리를 마주치듯 하는 가벼운 입맞춤이라면, 지금 것은 어른인 남녀가 나눌 법한 키스였다.
아르논의 뜨겁고 가쁜 숨이 내 볼에 닿아온다. 경험이 없는 것이 명백한 것 같다. 그녀의 입술은 그저, 내 입술을 세게 빨아당기고만 있을 뿐이다. 나는 가볍게 그녀의 윗입술을 지분거리다가, 기습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더 끌어당긴다. 그녀가 내 입 안으로 헉 하는 놀란 신음을 낸다. 그 서슬에 그녀가 뒤로 허리를 약간 젖히며 내 품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다.
그 열린 틈을 놓치지 않고, 내 혀가 그녀의 혀를 툭 건드린다. 그녀의 온 몸이 놀람으로 뻣뻣하게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녹는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굳어있던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목을 감아온다. 아직은 경험이 없어 뻣뻣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혀가 내 혀를 마중나와, 자연스럽게 감겨온다.
그녀의 입술과 입에서 아까 쿠키와 커피에서 남은, 단 맛이 난다.
얼마나 그렇게 하고 있었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의 입술이 떨어진다.
“후아...”
그녀가 숨을 몰아쉰다. 그 모습마저 귀엽고 사랑스럽다.
“답례가 너무 과한 거 같은데?”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우리 둘은 잠시 눈빛을 마주치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는 다시 짧게 입을 맞추고, 그녀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들기 전에, 손을 약간 풀었다.
“그럼 다음에 또 하면 되지 뭐.”
“그래, 그러면 되겠네.”
그렇게 웃으면서도, 나는, 속으로, 이 무슨 아카데미 때 하던 연애놀음 같은 행동을, 하고 생각하며 속으로 탄식했다. 어차피 오늘은 여기까지일 거다. 이 경험없는 여자를 급하게 취했다가는, 부작용이 클 테니까.
============================ 작품 후기 ============================
300회네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기리인 행동이 약간 이해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일부러 좀 혼란스럽게 썼습니다.
지력 101에 의지력 101의 남자가 작정하면 당연히 어떤 유혹에든 안 넘어가겠지만...
그래도 아직 스물도 안 된, 게다가 연애경험이 많은 남자가,
게다가 '본처'가 "꽃들을 울리지 말라"고 반쯤 허락까지 해 줬는데,
억지로 계속 꾹꾹 눌러참으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꽃을 울리지 않는 나비'라고 공인까지 된 사람이니까요 ^^;;
케리오 님, cacao99 님, 다카메이 님 //
전 화에 에아랍이 덥석 손을 잡은 건,
실은 밑밥을 깔아둔 사항이긴 합니다만(마법 방식이 프그단과는 다르다는)
그걸 잊을 정도로 기리인을 반가워했다... 정도로 이해해주세요. ^^;;
MorPhjne 님 // 그러게요 이미 시작전부터 밀어주려는...?!
계룡산도인 님 // 감사합니다!
박성빈 님 // 감사합니다!
원샷노킬 님 // 정주행 감사합니다!
인페르니우스 님 // 감사합니다!
eastarea 님 // 감사합니다!
|라랄라랄라| 님 //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다은임♥ 님 // 저도 가사 보고 벙쪘더랬죠 ㅋㅋ 감사합니다!
아이앤립 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