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4 10. 흐려진 별 =========================
다음 날 아침, 나는 짐을 바리바리 꾸려서 황실에서 내어준 마차에 싣고,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황궁으로 출발해야 했다. 폐하의 아침 초대에 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 옆에서 역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출근하게 된 형이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형.”
“어, 왜?”
“그러고 보니, 저 누구랑 같이 가요?”
형은 눈을 꿈뻑꿈뻑하며 나를 보더니, “내가 말 안 해줬나?” 하고 말하더니,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너도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거기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봐야 얼마 없을 텐데요. 톨라츠 아저씨 정도?”
“어, 그래.”
“에빌로 누나도?”
형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톨라츠 아저씨와 에빌로 누나도 같이 가는구나. 나는 새삼, 형과 아저씨와 누나와 함께 북부 영지에서 제도까지 내려오던, 그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의 여행을 떠올렸다. 비록 형은 같이 가지 못하지만, 아저씨나 누나와 함께 한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니, 함께 다니던 재미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저씨나 누나도 설레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있어.”
“또요? 이젠 정말 아는 사람이...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그 때 제 집에서 집들이 했을 때... 아르논이 뭐라고 했었는데...”
“아르논이?”
힉. 의외의 곳에서 날카로운 형. 형은 나를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기리인. 설마 너 루오페 자작 흉내 내는 건 아니지?”
“설마요. 형 저를 그런 바람둥이로 보시는 거에요?”
“솔직히 말해서 니가 루오페 자작보다 한 수 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혀엉...!”
“아무튼, 일 안 생기게 조심해라. 말했지? 귀족가의 소문은 화살보다 빠르고, 언제든 추문으로 변질될 수 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언제나처럼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마차는 어느새 황궁의 외성문을 지나고 있었다. 잠시 후 내성에 마차가 도착했고 우리 둘은 마차에서 내렸다. 형은 마부에게 “수사기사단 정문으로 가라. 거기에 가서 모스 백작의 짐을 내려줘라”하고 지시하고는, 나와 함께 황궁의 정문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십시오. 에아임 경. 모스 백작님. 홀에 이미 다른 분들이 와 계십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말끔한 모습인 드르연 경이 황궁 정문에서 우리를 반겼다. 황제 폐하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실 때가 많으니, 드르연 경도 늦게까지 대기하실 때가 많으실텐데... 그런데도 어떻게 저렇게 머리카락 하나 빠지지 않는 말끔한 모습일까. 귀족가의 집사들은 저래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에스틴도 테리아도 늘 단정한 차림이긴 하구나...
내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형이 물었다.
“우리가 약간 늦었나요?”
“아뇨, 제 시간에 오셨습니다. 다른 분들이 일찍 오신 거죠. 얼른 드시죠. 곧 폐하께서 오실 겁니다.”
어이쿠. 그러면 안되지. 우리는 드르연 경을 따라 약간 서둘러, 소규모의 연회를 할 수 있는 중형 홀, 그러니까 내가 황궁에서 어전 회의에 참석하는 높은 분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을 때 왔던 그 홀로 향했다. 아직 폐하께서 내려오시지 않았는지, 궁내부원은 뭐라 말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긴 식탁 가운데에, 상석을 제외하고, 스물이 약간 안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아저씨의 예의 그 커다란 덩치였다.
“오, 백작님!”
톨라츠 아저씨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참석자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수사기사단 하급 기사이거나 그 보조 인력인 것 같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열 명 정도 있었고, 언제나처럼 약간 졸린 눈을 하고 있는 에빌로 누나, 수사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는 내가 모르는 한 남자, 그리고...
그래. 아까 마차에서 얘기하려다 말았던 거지만, 집들이 때 아르논 양이 저 사람에 대해 얘기했었지. 원래 자작가였고, 주변 백작가와 부모님 대가 혼인하게 되면서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그래서 백작가의 일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옛 성을 쓰고 있다고. 자세한 이야기는 폐하께서 끊어주셨었지만 말야.
“아저씨!”
나는 역시 반갑게 인사하며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내 내민 손을 아저씨가 굳게 잡아왔다. 언제나처럼, 신에게 부여받은 ‘눈썰미’라는 재능을 가진 아저씨의 힘 조절은 완벽했다. 내 손을 덮는 아저씨의 손은 두툼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신께서 가호하시니 저야 잘 지내지요. 백작님께는 잘 지내냐고 묻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알려고 들기도 전에 이미 백작님의 이야기를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이고... 그보다, 그 ‘백작님’ 소리는 좀 빼시면 안돼요? 어색해 죽겠네.”
“이곳은 황궁이니 참으시죠. 제도 밖으로 나가면 괜찮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저씨의 곁에 앉아있던 에빌로 누나를 보았다.
“누나, 잘 지내셨어요?”
“으응.”
“...졸려요?”
“으응. 아침에 잘 안 일어나는데... 저혈압이라 힘들어...”
...잠순이의 명성은 여전한가보다. 나는 웃으며, 다음으로 아는 사람에게 인사했다.
“아드마 경. 경도 함께 가시게 됩니까?”
아드마 경은, 언제나처럼 너무 뻣뻣해서 오히려 예의가 없어보이는 태도로, 약식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저도 해군 기지에 가게 될 예정입니다만, 백작님과 동행하지는 않을 예정입니다.”
“그럼 언제 오시게 됩니까?”
“저는 에아임 경과 함께 할 일이 있어 제도에 남아있다가, 에아임 경과 함께 내려갈 예정입니다. 그 때까지 저는 황궁과 기사단, 특히 정보부 사이의 연락 장교가 될 예정입니다.”
“그러시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덕분에.”
하이고. 좀 나아졌나 했는데 여전하시구만. 형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기리인. 이 사람은 3급 수사기사 기하드어 에하트나스라고 한다. 저기 앉은 사람들은 에하티나스 아래 배속된 4, 5급 기사들과 수행원들이고. 에하트나스, 이번 수사단에 폐하의 눈으로 동행할 내 동생, 기리인 모스다.”
에하트나스라는 사람이 웃으며 손을 내밀고, 내가 그 손을 맞잡고 있는데, (그리고 속으로는 저 작자가 기선제압 같은 걸 하려고 손에 힘을 주면 어쩌나 하고 준비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궁내부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제국의 정당한 지배자이며 대륙 모든 생물들의 주재자이며 신앙의 수호자이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가 제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서 있는 동안, 폐하께서 혼자 척척척 걸어와 내 앞의 화려한 의자에 와서 앉았다.
“다들 앉으세요.”
그러고 보니 내 앞 자리에는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내 자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앞에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하긴, 아까처럼 일일이 폐하에게 소개시켜 드리거나 할 수가 없겠지. 홀의 문이 열리고, 뚜껑이 덮인 은쟁반들을 실은 수레 여럿을 궁내부원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불러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도통 시간을 내기 힘들어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폐하. 불러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에아임 경,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 하세요.”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폐하. 아무리 중대한 사건이라 한들, 출발 전에 격려를 해 주시기 위해 황궁에 수사 기사단원들을 부르신 적은 역사상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얼마나 이 자리를 뜻깊게 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에아임 형의 말이 끝나자, 폐하는 약간 쑥쓰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길에서 동전을 잃어버려 그걸 찾기 위해 골목을 열심히 청소한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칭찬을 받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동안 궁내부원들이 차와 스크램블 에그, 갓 구운 빵, 역시 갓 튀겨낸 베이컨과 햄 등을 우리 앞에 놓아주었다. 대략 음식이 놓이자 폐하께서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말했다.
“이 자리는 여러분들의 무운과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나와 제국을 위해 열심히 복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이 다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제국을 위해 일해주는 것이 훨씬 더 제국과 나,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다치지 말고,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폐하는 마지막 말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폐하는 “자, 듭시다.” 하면서 스푼으로 스크램블 에그를 떠 먹기 시작했다. 그걸 신호로 모두가 식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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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그럼 아드마 경이 궁성에 남는다는 말입니까, 에아임 경?”
“그렇습니다, 폐하.”
“흐음... 사실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 말인데...”
그 말을 하며 폐하는 나를 향해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아드마 경은 궁성에서도 좋지만 해군 기지 쪽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폐하, 조사와 정보 취합이 어느 정도 끝나거나, 혹은 조사단원들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저와 아드마 경을 비롯한 몇 명이 2차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폐하는 “그래요? 잘 됐군요.” 라고 말하며, 흘깃 아드마 경을 바라보았다. 아드마 경은 저번에 우리 집 집들이에서 폐하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 이후로 폐하를 바라보는 눈길이 약간은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흐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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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인, 폐하의 분부 들었지.”
“네, 형.”
“솔직히 말해 좀 걱정스럽다. 위험할까봐. 폐하의 말대로 너는 눈이다. 눈은 본 것을 머리로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위험한 자리에 직접 가서 단서를 찾을 필요도 없고,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알겠지?”
그렇게 말하며 형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모툼 경 뒤에 가서 섰다. 수사기사단 단장인 플레이크 모툼 경은 마차 앞에 도열한 우리를 보더니, 별 말 없이 한 번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무운을 빈다. 출발하라.” 하고 아주 간단한 기념사를 남겼다. 잠시 당황하던 남은 사람들은 곧 세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제도의 서쪽 문을 향해 출발했다.
내가 탄 왜건(wagon) 형태의 마차는, 앞에서 수사기사단의 수행원 하나가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나와, 에빌로 누나, 아저씨 세 사람이 올랐다. 에하트나스 경은 당연히 우리와 함께 탈 줄 알았는데, ‘유사시에 지휘관과 부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며 두 번째 마차로 올랐다. ...으음. 거기 탄 사람들은 좀 눈치를 볼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제 백작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어색해 죽겠어요.”
“그렇다고 백작님을 기리인 군, 이럴 수는 없잖아요.”
“그냥 기리인 씨 라고 하셔도 돼요...”
푸념하듯 말했지만, 아저씨는 빙글빙글 웃을 따름이었다. 안다.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 덕분에 어색함이 확 줄어들긴 했지만...
============================ 작품 후기 ============================
오늘은 유달리 피곤하네요. 그러다보니 양도 평소보다 적고.;
오늘 하루만 리리플을 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