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06 10. 흐려진 별 =========================
아, 씨발. 욕나온다. 이 중요한 타이밍에.
우리는 결국 제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나와 아저씨밖에 보지 못했지만, 우리를 노리는 놈들이 분명히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무슨 준비를 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하필이면 지금 이 중요한 타이밍에... 그것도, 우연이나, 단순한 고장이 아닌, 누군가의 의도적인 장난질이라니.
“이건...”
맨 뒤 마차의 바퀴축을 살펴보던 에하트나스 경과 아저씨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누가 봐도 상황은 뻔했다. 바퀴축이 반 넘게 맨들맨들하게 잘려 있었고, 마지막으로 붙어있던 일부분이 길의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툭 부러져버린 것이었다.
“누군가 우리를 빨리 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요.”
위기상황이라고 생각했는지, 잠에서 깬 목소리로 에빌로 누나가 말했다.
“고칠 수 있을까요?”
에빌로 누나는 머리를 숙여 마차 아래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깔끔하게 잘렸어요. 물체 창조 같은 마법으로 잘린 바퀴축을 잠시 붙인다 한들, 이렇게 덜컹거리는 길에서는 금방 떨어져버릴 거에요. 새로운 바퀴축을 만들어내는 것도 무리구요.”
누나의 마법 서클이면 원래라면 그런대로 만들만 하겠지만... 누나는 하필이면 일반 마법은 그리 강하지 않은 심리 전문 마법사다. 하필 이럴 때... 아저씨와 나는 긴장감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에하트나스 경, 어떻게 할까요?”
아저씨가 물었다. 이 집단의 공식적인 지휘자는 에하트나스 경이다. 신분으로 따지자면 내가 제일 높지만(!), 어디까지나 주체는 수사기사단이고, 나는 ‘황제 폐하의 눈’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나서기 시작하면, 이 집단은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음...”
그러니, 저 약간은 미덥지 못한, 아직 군인 티가 나는 수사 기사에게, 그냥 결정을 맡기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아. 입은 근질거리고, 마음은 불안하다.
“톨라츠 씨와 에빌로 양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 잘린 자국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우리가 늦게 역참에 도착하기를 강렬하게 원하는 거죠.”
“네, 저도 동의합니다.”
아저씨가 말하자 에하트나스 경은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한시라도 역참에 빨리 도착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백작님.”
에하트나스 경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제 지휘에 따라주시겠습니까?”
“네.”
내가 뭐라고 할 줄 알았던지, 선선히 나온 내 대답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지금부터는 언제든 누군가가 습격해 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진하겠습니다. 다소 힘들거나 기분이 나쁘더라도 사소한 걸 신경써 드릴 여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하니까 더 기분이 나쁜 느낌이다. 흘깃, 아저씨와 누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표정도 나랑 비슷한 느낌이다. 하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집합!”
에하트나스 경은 기사들과 수행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분명, 병사들이 아니고, 하급 수사기사와 그 수행원들이라고 했는데, 쉽게 말해 에아임 형이 톨라츠 아저씨와 에빌로 누나를 데리고 다니던 느낌으로 그 하급 기사들이 데리고 다니는 수행원들이라는 얘긴데 – 그러니, 다들 전문 영역이 있을, 엄선해서 뽑은 사람들일텐데 -
에하트나스 경은 그런 점을 모르는지 아는데 무시하는 건지, 마치 징병관이 갓 뽑은 신병들을 대하듯, 호통치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그의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은, ‘아니꼬움’이라는 감정을 대놓고 표현해 주고 있었다. ‘더럽지만, 당신이 리더니까 진짜 어쩔 수 없이 말 듣는다’는 표정이, 한두 명이 아니라, 경의 앞에 모여선 열다섯 명의 얼굴에 모두 나타나 있었다.
“잘 들어라. 지금은 위기상황이다.”
에하트나스 경은 하지만, 그런 표정들 따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마치 지휘관이 일장연설을 하듯 그들 앞에서 뒷짐을 진 채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제국 수사기사와 그 수행원들이니 잘 알겠지만, 저 마차 바퀴를 봐라. 저것은 누군가가 일부러 손을 댄 것이다. 즉, 우리의 여정이 지체되기를 바라는 자가 있는 것이다. 좀 더 무서운 상상을 해 보자면, 수사기사단 내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평소같았으면, 에하트나스 경의 이야기를 들은 모두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집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옳은 얘기라도 기분이 더러워진 상황에서는 곱게 들릴 리가 없지. 그들은 더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대놓고 항명만 하지 않을 뿐 아주 불량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서 있었다.
괜찮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말했다.
“꼭 자신은 혐의가 없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헉. 나와 아저씨와 누나가 놀라 돌아보는 가운데, 에하트나스 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앞에 불량한 자세로 서 있던 열다섯 명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누구냐.”
“아- 죄송합니다, 에하트나스 ‘기사님’.”
맨 끝줄에 서 있던, 약간은 성깔 있어보이는 위로 찢어진 눈매의 남자가 손을 들며, 하지만 전혀 죄송하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이 새끼가...”
“어우, 잘못하면 한 대 치시겠슴다? 만약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혐의가 있는 거 아니게씀까? 더더군다나, 기사단에 늦게 들어온 자일수록 더 의심해봐야 하는 거 아니게씀까?”
“말 다 했냐?”
“어이쿠, 죄송함다, ‘기사님’. 기사님은 수사의 기본에 대해 배우신 적이 없지 말임다.”
명백한 조롱. 저 ‘기사님’이란 말 마저도, 에하트나스 경이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돌이라는 사실을 찌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쯤은 쉽게 짐작 가능했다. 내가 더 놀라고 더 실망했던 것은, 분명 에하트나스 경이 자초한 면이 없지 않은 상황이지만, 저 남자가 저열하기 짝이 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말리거나 부끄러운 빛이 없이, 열다섯 명 모두가 동조하는 끄덕거림이나 웃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하트나스 경의 대처 역시도 내 상상을 초월했다.
스릉.
짝!
어느 누가 제대로 보았을까. 어느새 에하트나스 경은 허리에 찼던 롱 소드를 뽑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뺨을 싸쥐고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검면으로 뺨을 쳤군요.>
...세상에, 그게 가능하다고?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라면 가능하겠지요. 에아임 씨가 당신에게 그런다면 당신이 막을 수 있을까요?>
글쎄... 어쩌다 한 번은 막기야 하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뺨을 싸쥐고 있던 남자가, 굴욕감과 분노에 휩싸여 “으아아아아!” 같은 되도 않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에하트나스 경은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두 걸음 옆으로 피하는 것으로 그 남자의 돌진을 회피한 후, 다리를 걸어 그 남자를 넘어트리며... 다시, 검면으로, 그 남자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찰싹!
볼썽사납게 그 남자가 뒹굴자, 에하트나스 경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뒹군 그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사정없는 폭력이었다. 에하트나스 경은 두껍고 단단한 군용 부츠를 신은 채 바닥에 뒹구는 그 남자를 사정없이 밟아댔다. 처음에 어떻게 저항해보려 하던 그 남자도 두세 번 발에 채이더니 저항할 힘도 의사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으악! 악! 아윽!”
그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과 몸을 가리려 했지만, 에하트나스 경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마치 공을 차듯 그 두 손을 발로 차서 흩어버렸다. 빠각!
“아아아아아아아악!”
뼈 부러지는 소리. 그 남자의 팔이 괴상한 각도로 꺾였다.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는 그 남자에게, 에하트나스 경이 달려들려 했다.
“그만 하시죠.”
더 이상 참지 못한 나와 톨라츠 아저씨가 달려들어 그의 양 팔을 잡았다.
“내 지휘에 따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지휘에 따르기로 했지, 악행을 보아넘긴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휘에 반항하는 자는 이적자(利敵者)나 다름없습니다. 미연에 처단해야 합니다.”
나는 순간, 그의 눈을 보았다. 지금껏 한 마디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마치 과업 중 하나를 수행하듯 사람을 밟아대던 그의 눈에는, 분노 같은 것이 없었다. 분노라기 보다... 좀 더 익숙한 감정... 아. 그래. 열등감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지독히 부러워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에 비춰, 자신을 한없이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 지저분한 감정이 그의 얼굴을 좀먹고 있었다. 입매는 웃고 있지 않았지만, 눈매는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그는 왜. 무엇을. 부러워하고 또 저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만 하시죠. 아직 확실하지도 않지 않습니까.”
아저씨의 말에 그는, 턱의 힘줄이 보일 정도로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놓으시죠.”
‘진정했으니 이제 놔라’로 알아들은 나와 아저씨는, 잠시 눈빛을 교환하다가, 그의 팔을 놔 주었다. 그러자 그는, 표정이 얼어붙은 나머지 열네 명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나의 지휘를 인정할 수 없는 놈은 나서라. 똑같은 이적자로 대해 똑같은 처벌을 해 줄 것이다.”
그의 눈에는 광기라고 보기에는 약간 부족하지만 어쨌든 기이한 열망 같은 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감정에 나머지 열네 명은 압도되어 버린 것 같았다.
“없는 것으로 알고, 현 시간부로 나의 지휘에 항명하는 자는 항명죄로 처벌할 것이다. 알겠나.”
“넷!”
잔뜩 얼어버린 열네 명의 대답. 그는 그제야, 한 쪽 입꼬리만 올려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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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마차에 실린 짐을 두 번째 마차에 옮겨 싣고, 세 번째 마차에서 말을 풀어내어 한 마리에는 자신이 올라타고, 나머지 한 마리에는 5급 기사 한 명을 태워 정찰을 내보냈다. 원래는 역참으로 먼저 보내서 우리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려는 것이 에하트나스 경의 의도였으나... 그랬다가는 어찌 될지 뻔히 알고 있던 나와 톨라츠 아저씨의 결사반대에 의해 그 안이 취소되었고, “정찰을 통해 본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식으로 내가 살살 꼬여내자 그가 결국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차 두 대로 줄어든 채 다시 출발했다. 맨 앞에 그가 말을 타고 선도하고, 그 뒤를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 두 대가 이었다. 그리고 아까 그의 압도적인 폭력과 어두운 감정 앞에 굴복해버린 열네 명의 하급기사와 수행원은 묵묵히, 검이나 창 같은 자신의 무기를 뽑아든 채, 마차를 호위하듯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뒤를 따라오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그 마차의 지붕 위에는 여러 짐들과 함께, 아까 두들겨맞고 팔까지 부러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던 아까의 그 남자가 부려져 있었다. 톨라츠 아저씨가 신성력을 발휘해 치료를 했고, 에빌로 누나도 치유 주문을 날려줬지만... 워낙 에하트나스 경이 입힌 상처가 컸던지 그는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그는 끙끙거리고 있었다.
마차는 여전히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앞에 걸어가는 에하트나스 경이 듣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어, 나는 나와 함께 첫 번째 마차 지붕 위에 올라와 있는 아저씨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저씨는 예의 그 커다란 방패를, 언제든 들 수 있게끔 살짝 내려놓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기리인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세요.”
“하하, 제가 그랬나요.”
하지만 아저씨의 웃음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필요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친 것 같군요. 우리가 모르는 과거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동의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저씨는 앞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는 에하트나스 경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여유있을 때 그에게 이야기를 걸어보겠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다면 이 역시 신의 손길로 어루만져줘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 말만을 남긴 채, 아저씨는 좀 더 먼 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왠지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라서, 나는 상자에서 꺼낸 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서쪽 지평선으로 넘어가고, 평소보다 더 커 보이는 보름달이 떠오른 밤.
일은 그 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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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습니다.
그간 많이 자면서 푹 쉬었습니다.
그간에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안심하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응원의 코멘트 남겨주셨던 계룡산도인 님, cacao99 님, 책모기 님, eastarea 님, 니코틴 님, 하늘에서뚝딱 님, Erisnaden 님, 바람색 님, liz5611 님, 인페르니우스 님, 건필하십쇼! 님, 유한도전 님, 체크필통 님, 살펴가세요 님, 넙치광어 님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힘내서 써 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