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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101에 매력 100, 마나는 0-309화 (309/309)

00309 10. 흐려진 별 =========================

새벽같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이 부족하긴 했지만, 이 정도야 뭐 아무 것도 아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에하트나스 경께서 이른 아침을 드시고 일찍 출발하자고 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흐음. 경‘께서’라는 말이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고, 오히려 흥미로워졌다. 쫄은 걸까? 엿먹이려는 걸까?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자, 이미 식당은 우리 인원으로 바글거렸다. 어제 에하트나스 경에게 두들겨맞았던 그 수사 기사도 불편한 기색이나마 앉아서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한 쪽 구석에 아저씨와 에하트나스 경이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하며, 나는 에하트나스 경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열등감이 폭발하는 경우, 그래서 평소에 하지 않던 미친 짓을 하는 경우, 그리고 그 미친 짓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차렸을 때,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엄청 쪽팔려하는 경우, 그리고...

“무슨 할 말이라도?”

말이 짧군. 너는 후자구나. 잘못했다는 걸 아예 모르든지, 아님 알면서도 자기합리화를 했든지, 어쨌든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쪽이구나. 이 정도에 발끈하기에는 아쉽지.

“아뇨, 아닙니다. 그나저나, 오늘도 어제와 같은 대형을 유지할 겁니까?”

언뜻 불쾌한 표정을 짓는 에하트나스 경. 헹, 작전권에 대한 간섭이다 이거냐?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낮이고 평원이니 큰 의미가 없겠죠. 두 마차에 분승시켜 빠르게 전진시킬 겁니다. 한 명을 전령으로 먼저 보내려고 합니다.”

이게 내가 대놓고 반기를 들지 않는 이유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에하트나스 경은, 아슬아슬하게 상식의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상식적인 지휘를 하는 이상, 내가 반기를 들지 않는 것이 단체의 효율을 위해 나을 것이다. 부하에 관련된 일은 수사기사단 자체에서 처리할 일이고, 내가 형에게 그리고 폐하에게 따로 보고하는 것이 옳을 테니까 말이다.

마침, 에빌로 누나가 하품을 하며 합류했다. 마법사에게 충분한 수면과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정신 집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듯, 에하트나스 경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잘 잤어요?”

“응...”

나른한 말투. 아저씨는 창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오후에는 비가 올 지도 모르겠군요.”

나와 에빌로 누나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에하트나스 경은 알까? 아저씨의 저 말은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 걸 선언한 거나 다름없다는 거.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냥 감입니다’라고 얘기할 줄 알았는데, 아저씨는 창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새가 낮게 날더군요.”

뭐야. 그런 거였나. 누나와 나는 서로를 돌아보고는, 서로가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퍼뜩, 머리에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내가 추리할 때 두 사람이 보여주는 태도가, 이런 거였을까.

아무튼 에하트나스 경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모두들! 서둘러라! 곧 비가 올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속마음이야 어떻든 “네!”하고 대답한 후 음식을 마구 밀어넣기 시작했다. 나도 체면 보지 않고 빵을 쪼개 수프 그릇에 담그면서, 다시 한 번 에하트나스 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절도있는 자세를 유지한 채, 속도만 높여 음식을 입에 밀어넣고 있었다.

당신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고 이해는 가려고 하지만, 그래도 당신같은 사람과는 오래 얽히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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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우리는 무사히 해군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나절의 여정은 평탄했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이 어두워지는 하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제였다면야 아무런 문제 없었겠지만, 오늘은 마차 지붕에 분승한 사람들이 있어 비를 맞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던지, 우리는 말들을 재촉해 어제보다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렇게 우리의 엉덩이를 희생해 속도를 얻은 우리는 빗방울을 약간 앞서 해군 기지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가 오기 전의 흙냄새와 바다냄새가 어우러진 공기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공기 속에 우리는, 흰 색의 아치 위에 방패가 그려져 있고 그 방패 위에 닻이 그려져 있는 정문을 지났다. 경비병들은 미리 우리가 척후를 보낸 덕이었는지 별 말없이 우리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우리 마차 앞에, 하얀색 말을 탄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제도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너무 듣기 좋은 게 외려 약간 미끌미끌한 느낌이 들었다. 기름기가 있는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에도, 콧수염에도 기름이 발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수사기사단 3급 기사, 기하드어 에하트나스 라고 합니다.”

“해군 기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해군 기지의 부사령관을 맡고 있는 오시비르 드네프 라고 합니다.”

어이쿠. 거물이로군. 에하트나스 경은 약간 주저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나는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이게 내가 에하트나스 경을 가만 놔 둔 나머지 이유였다. 기지에 도착해서 인사를 할 때쯤이 되면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마차를 내려 앞으로 걸어가자, 오시비르는 나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결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 가벼운 몸놀림은 그가 해군 무인이라 해서 육상에서 닦는 무예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

“반갑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 분의 눈이 된,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지난 전쟁의 최고 공훈자이신 신궁 기리인 모스 백작님이십니까?”

“과분한 명성입니다.”

“세상에, 이 먼 곳까지... 환영합니다, 백작님. 백작님의 믿을 수 없는 공훈은 이 해군 기지에도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별 것 아닌 공훈인데 부끄럽습니다.”

두 번의 칭찬과 두 번의 겸양이면 됐지 뭐. 오시비르 경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하늘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뱃놈은 날씨에 민감한 법이죠. 비가 올 것 같군요.”

“실은 저희 일행도 그래서 길을 재촉했습니다. 아침에 보니 새가 낮게 날더군요.”

오시비르 경은 약간 눈을 크게 뜨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수도에서 귀한 분이 내려오셨으니 원래라면 공식적인 환영과 사열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좋지 않은 일이 있는 중이라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대신 점심 식사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나마 환영 만찬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사령관님 이하 주요 인물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행의 거친 잠자리와 건량 같은 식사에 지쳤는데 그거 반가운 말씀이군요.”

오시비르는 말에 훌쩍 오르며 말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황급히 내가 마차로 오르자, 그의 백마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백마의 뒤를 따라 마차 두 대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기리인.”

나는 내가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에빌로 누나는 고개를 내 앞으로 쑥 들이밀고 있었다.

“네?”

“무슨 생각하길래 그렇게 골몰해있니?”

“아, 아뇨...”

왜 ‘에하트나스 경’이라고 계속 불렀을까, 생각해보고 있었어요. 저도 작위가 생기기 전까지는 기리인 경이라고 불렸고, 에아임 형도 에아임 경이라고 불렸는데, 왜 그는 기하드어 경이 아니고 에하트나스 경이라고 불렀을까요.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에 익숙해 있었을까요. 하고, 대답하는 게 귀찮아, 나는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 동안 마차는 야트막한 건물들을 지나, 기지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커다란 범선들을 정박시켜 둔 도크(dock)가 보였다.

“와...”

부지불식간에 내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그 정도로, 범선은 거대했다. 내가 미틱 – 레카를 잇는, 옆에 수차가 달린 정기선을 탔을 때도 꽤 큰 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열 배는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배였다. 길고, 컸다.

“운이 좋군요. 원양을 항해하는 배를 구경할 수 있다니.”

“원양이요?”

“아. 먼 바다라고 해 봐야 물론 해안에서 떨어진 섬이나 아니면 남대륙과의 사이에 ‘솟아오른 섬’까지 가는 정도지만, 그래도 해안선을 따라가는 배와는 모습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약간만 먼 바다로 나가도 파도가 크거든요.”

그런가? 그래서 모양이 저렇게 다른가? 뭉툭하고 평평하게 넓은 배였던 정기선과는 달리, 지금 멀리서 보는 저 범선은 정말 날렵한 느낌이었다. 높은 파도를 갈라버릴 듯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아저씨와 내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우리는 기지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마차가 멈춘 것은 다른 건물들처럼 야트막하긴 하지만 꽤 넓고 큰 건물이었다. 우리가 내리자, 오시비르 경 역시 말에서 내려서는 우리 앞에 다가와 손으로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곳이 해군 사령부입니다. 이 안에 있는 연회장에서 아버님을 비롯한 해군의 주요 직책을 맡은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님, 이라. 나는 출발하기 전에 해군에 대해 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내색하지 않은 채, 나는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오시비르 경은 마침 다가온 어려 보이는(그래 봐야 내 나이 정도였겠지만) 수병 서너명 중 하나에게 자신의 말 고삐를 넘기고는, “짐을 영빈관에 정리해 드려라.”라고 말하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채광이 잘 된 복도를 지나, 큰 문 앞쪽에 다가가자, 수병의 제복을 입은 병사 두 명이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제도에서 오신, 기리인 모스 백작님과, 수사 기사단 파견대입니다!”라고 누군가 외쳤다. 앳된 목소리로 보아 역시 어린 수병이었던 모양이다. 그 소리가 퍼지자, 메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세네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 전 잠시 들은 바에 의하면 드네프 가 역시 백작가이며, 로그푸스 가와는 달리 변경백 대우는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나는 저 해군 사령관에게 꿀릴 것은 없다. 바다에서 해적들을 소탕하며 전투로 뼈가 굵은 뱃사람들이라지만, 그렇게 치면 나도 전쟁에서 화려한 공훈을 세운 바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눈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위축되는 것 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사람들의 눈에 약간의 놀람과 이채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똑바로 서서,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하지만 비굴하지는 않게 인사했다.

“기리인 모스라고 합니다. 이번에 황제 폐하의 눈이 되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반갑소. 해군 사령관, 르셋 드네프라고 하오.”

온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머리가 반 넘게 백발인 근육질의 제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얼굴 만큼이나, 주름이 많고, 근육질의 몸 만큼이나 억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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