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 / 0281 ----------------------------------------------
시작
" 우선 주위에는 마트랑 슈퍼가 적어. 바로 앞에 슈퍼가 있긴 하지만 큰 규모는
아니고 마트까지는 차로 15분 정도. 말이 15분이지 거리가 꽤 되는 편이야.
그나마 다행인건 길 건너에 주유소가 큰 것이 있어. 집에 캠핑용 발전기가
있으니 정전에 대비해서 기름을 챙기는 편도 좋을 듯 하고.. 아침 뉴스에서 본
것처럼 번화가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감염체가 활보하는 편은 아닌가봐. "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집에도 어느 정도 물품이 있긴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에 더 많은 양의 생필품이 필요했다.
" 나랑 재효가 차를 몰고 마트에 가서 물건을 구해오자. 지금 이 상황에 당연히
문을 안 열었겠지만 이럴 때 훔친다고 도둑취급 받는 것도 아니니까 "
" 알았어. 형. 옷만 제대로 챙겨 입고 가자! "
" 미란이랑 은혜는 핸드폰으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주도록 해.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통화는 가능하니까."
" 난 반대야 오빠 "
미란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 왜? "
" 조금 더 있다 상황을 본 뒤에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해. 지금 우리가
나가는 건 좀 위험할 듯싶어 정보도 부족하고.. "
" 그렇긴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감염체가 현재 서울안쪽에 몰려
있는 상황이야. 상황이 좋게 변하면 다행인데 만약 감염체가 늘어나 상황이
안 좋아 진다면 더 움직이기 힘들어. 여유가 있을 때 움직이는 편이 좋을 듯
한데? "
도박을 건다면 결과가 조금이나마 좋은 쪽에 걸어야 하는 법이다. 나의 말을
들은 미란이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 만약... 상황이 위험하다면 최대한 재효가 먼저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
" 형! 왜 그런 말을!! "
" 만약이니까.. 나보다 네가 이런 상황에 대한 영화를 더 봤잖아. 그러니까
네가 더 생존율이 높겠지. 그만하고 이제 슬슬 출발하자! "
난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 표정조차 안 좋다면 다들 우울해
하겠지. 집에는 그 흔한 야구배트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무기처럼 쓸 만 한건 등산스틱이 전부였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했다. 카라반과 함께 온 픽업트럭을 끌고 빌라 단지 정문을 나섰다. 일반적이
SUV보다 훨씬 지상고도 높았고 적재량이 월등했기에..평소라면 보안요원이 철문을 열어줬을 테지만 아무도 없다. 이런 상황에 남의 가족을 지키는 상황이 될 리가 만무했다. 차위에 올라가 주위를 살핀 뒤 감염체가 없는 것을 확인 후 철문을 열었다. 다행이 전기가 들어와서 경비실에서 스위치로 작동이 되었다. 철문을 나선 뒤 문이 닫히는 걸 확인 후 빠르게 마트로 향했다. 마트로 가는 도중에 몇몇 감염체들이 보였다. 다행이 아직까지 무리지어 다닐 정도의 규모는 아닌 듯 했다. 우릴 보고 따라오는 듯싶었으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터라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아직까지는 위험한 듯 보이지는 않아 형. "
" 응.. 근처에 사람도 적었고 아파트 단지도 여기서 꽤 멀어. 저 마트도 원래
들어설 단지 때문에 생긴 건데 계획이 더뎌지면서 사람이 별로 없었어. "
"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나보네.. "
마트 정문의 유리는 깨어진 채 있었다. 아마도 어제 방송 후 사람들이 꽤 많이
다녀간 듯싶었다. 재효와 나는 정문에 차를 대충 주차 후 빠르게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전기가 끊기지 않았기에 마트는 꽤 밝았다. 몇몇 사람들이 카트에
마구잡이로 물건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우리가 감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빠르게 약탈을 해가는
모습이었다.
" 우선 1층에 옷 종류를 담자 너랑 미란이 은혜가 입을 옷들하고 겨울을
대비해서 두꺼운 옷들도 좀 챙기고."
" 응 형! "
제법 쌀쌀한 공기가 감돌았기에 겨울은 금방이었다. 다행이 마트는 겨울철
옷가지가 많이 전시되었고 우리는 필요한 몇 벌을 챙긴 후 빠르게 이동하였다.
마트의 구조는 1층이 옷이나 신발류 2층이 생활 잡화류 3층이 식품류로
되어있었다. 우리는 무거운 카트를 끌고 올라가기보다 옷들은 차안에 던져놓고
3층부터 내려오기로 했다. 3층에 도착해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챙기고
있었다. 다행이 늦진 않아서 인지 꽤 많은 양이 남아있었고 우리도 빠르게
물건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 통조림 위주로 챙겨. 라면이나 냉동식품은 시간이 남으면 챙기자. "
라면은 비상식이 아니다. 생각보다 유통기한도 짧고 물이나 화력을 많이 쓰는
편이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3분 요리나 통조림이 효과적이다. 어차피 집에
라면은 있는 상황에 급한 건 아니었다. 제대로 아는바가 없는 사람들은 습관처럼
라면을 싹쓸이 하는 편이었고 냉동식품도 꽤 많이 털린 상황이었다.
" 헉...헉... "
이런 초스피드 쇼핑이 있었을까.. 돈 걱정 없이 카트에 담는 게 아닌 쓸어서
밀어 넣는 수준의 쇼핑.. 5분정도가 지나자 마트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게
보였다. 한쪽에서는 언성이 오가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 상황에 여기 오래있다가는 좋을 게 없었다.
" 재효야 이제 2층으로 가자! "
" 형 잠깐만 이것만 챙기고! "
" 그만 챙겨 이제 이동해야해! 점점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
" 알았어. 형! "
우리는 무거워진 카트를 끌고 2층으로 갔다. 우선적으로 부탄가스와 물을
챙기고 아직 철수하지 않은 캠핑용품 매장으로 가서 숯과 그릴도 챙겼다. 혹시나
가스가 끊기면 이거라도 도움이 될듯해서였다. 흔히 말하는 말통이라 부르는
통 몇 개를 로프에 묶어 카트에 고정시켰다. 이런 통들은 나중에도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건전지와 손전등도 챙기고 휴지나
여성용품도 챙겼다. 시계를 보니 마트에 온지 15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물건이 카트 가득히 담겨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매장에서 무기가
될 만한 배트를 챙기고 캠핑용 나이프도 몇 개 담았다. 더 이상 담을 공간조차
없어진 카트를 이끌고 빠르게 1층으로 나왔다.
" 꺄아아아아아!!!! "
어디선가 들리는 괴성. 근원지는 마트에서 약 50미터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감염체로부터 공격받고 있었다. 약 50여 개체는 되어 보이는 감염체들은
사람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마트로 다 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마트 속에서 저들을 마주 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적재함에
짐을 적재하기 시작했다. 50미터는 그리 긴 거리가 아니었지만 저들의 느릿한
걸음은 상당한 시간이 걸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물건을 담고 시동을 걸고 바로 엑셀을 밟았다. 인도를 넘어 크게 덜컹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갔다.
" 쾅!!! "
몇몇 차들은 정면으로 감염체를 받아버렸지만 오래 못가서 차가 멈춰버렸다.
일반 승용차로 정면충돌 했다간 엔진룸 쪽에 손상이 갈수도 있었고 바로
앞 유리를 깨고 들어와 버린 상황도 있었다. 차에 캥거루 범퍼라고 불리는
범퍼가 있지 않는 한 정면충돌을 피해야만 했지만 보통 생존자들이 알기에는 무리였다. 우리도 어제 인터넷을 보고 알았으니까.
" 살..살려줘!!! "
" 으..으아아아악!!! "
" 죽고 싶지 않아!! 저리가 이 괴물아!!!! "
오도 가도 못하고 차안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영화가 아니 실제로 사람이 죽어가는 장면을 처음 봤지만.. 슬퍼하고 패닉에 빠질
시간조차 없었다. 시간의 지체는 우리도 저 사람과 같은 최후라는 것을 알았기에... 10분의 거리가 엄청난 시간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은 재효도 아무
말이 없었다. 누가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내가 아는 친구 동료 식구가
언제 저렇게 변할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살아야만 한다.
난 우리 4명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저들보다 훨씬 잔인해 져야 한다. 지금은 저들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저들이
우릴 구해 줄지는 의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차는 벌써 빌라 근처에 다가왔다
" 미란아. 정문으로 와서 경비실에서 문 좀 열어줘. "
나가는 것 만 생각하다 들어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문을 열어주는 보안요원이
없으니 우리가 수동으로 열어야 했는데 밖에서는 열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담을
넘어가기에는 너무 높았다. 인터폰으로 미란이에게 연락 후 1분도 채 안 돼서
미란이와 은혜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간단한 설명 후 문이 열리고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 와..그래도 많이 챙겨왔네? 오오!! 남자 둘이 여성용품까지 쇼핑을!!
발전 했네. 재효 오빠!! "
마트에서 본 모습을 말해주지 않았다. 괜히 그런 상황을 말해주어 분위기를
암울하게 하는 것보다 우리만 알고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해서였다. 괜히 겁을 주는 상황이 될 수 있기에 재효와 말을 맞춰 별 일 없는 척했다.
" 그럼!!! 날개가 편하다며!! "
" 날개만 사온 게 아닌데? 쓰지도 않는 것들까지 몽땅 들고 오셨네?! "
" 하하!! 있으면 쓰겠지..? "
" 오빠가 쓰는 거 아니라고 막말 하지 마! "
시시덕거리며 쇼핑 아닌 쇼핑 물품을 정리하는 둘을 보면서 난 미소 지었다.
" 고생 했어 오빠. "
" 오..이제 말 놨네? "
" 음..오빠말대로 편하게 지내야지.. 그래도 아직은 어색해.. "
" 차차 나아지겠지. 우선 이것부터 나르자! "
" 응! "
역시나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하는 은혜였다. 이들이 있어 아마도 난 더
신중하게 살아갈 방법을 강구해야 할듯했다. 트럭에 담은 양은 꽤 많아 한동안
2층을 왕복해야만 했다. 1시간도 안 걸린 시간이었지만 엄청난 긴장감에 덥지도
않은 날씨에 땀에 흠뻑 젖어야만 했다. 뜨거운 물에 샤워 후 습관처럼 TV를
켰다.
- 현재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서울근교에 50%이상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며 군 내부 분열로 인하여 통솔력이 약화되는 상황입니다. 다행히
경기 권으로 후퇴한 군부대들이 자체적으로 방어하여 감염체 제거에 노력하고
있지만 부족한 물품과 탄약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많은 상황입니다. -
서울시내 감염체가 많은 상황인데 뉴스는 어디서 방송하는지 문뜩 궁금해졌다.
아마 지방 쪽이 아닐까 싶었다. 저들도 사람인데 감염체 바글바글한 서울
한복판에서 방송하지는 않을 듯 싶었다. 원래 방송국은 테러에 대비해 구조가
복잡하다고 한다. 하지만 감염체들은 남는 게 시간이고 걸리면 오늘의 식량인
생존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도 아닌데 용가리 통뼈도 아닌 아나운서들이 서울에서
방송할리가 없었다. 좀 더 많은 정보를 위해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점점 올라오는 글들이 줄었고 생존자를 위한 카페등도 개설되어 가족의
생사를 알아보려 했지만 점점 느려지는 인터넷 속도에 답답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너무 많은 사람이 접속한 듯했다. 지금의 관심사는 생존. 그리고
식구들이었을 테니까..마트에서 건져온 물품들을 정리 후 다들 어정쩡하게 앉아있었다. 정확히 말해 뭘 해야 할지 몰랐다.
' 뭘 해야 하지...? '
평범한 날이었다면 소주나 한잔 하면서 은혜처럼 미인이 있다면 어떻게든
꼬셔보려 노력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다. 갈 곳 도 없고 이 와중에
술 취해서 잠들어 감염체들이 들이 닥쳐서 숙취에 죽고 싶은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벌써 한참동안 내린 비는 그칠 줄도 모르고 뉴스를 틀어봐야 암울
터지는 소리만 나오는 상황.
' 하아...'
속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소리 내어 내쉬었다가 가뜩이나 분위기
초상집인 이런 분위기가 더욱 암담해 질듯해서 이다. 하지만 뭘 한단 말인가!
이런 나의 기분을 알아챘는지 평소 분위기 메이커인 미란이가 은혜랑 수다를
시작했다. 다행이 사태가 시작 된지 며칠 되지는 않아서 인지 TV는 몇몇 채널을
제외하고는 무난하게 나오는 편이었다. 셋은 모여앉아 TV를 보며 깔깔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마도 억지로라도 웃어 지금의 이 사태를 잠시나마 잊고 싶을
테다. 난 조용히 내방으로 들어와 데스크 탑을 켜고 담배를 하나 물었다.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을 때 정보를 최대한 습득해야한다. 다행이 몇몇
홈페이지는 원활이 가동되고 있는 중이라 정보수집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우선
국가가 임시로 만든 세계 여러 나라의 사태와 현재 감염체의 대응방법, 대피소
예정 위치 등이 나온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급하게 만든 모습이 확연히
들어났지만 차라리 단출한 게 보기도 편하고 수만의 접속자를 관리하는데
유리할 듯 했다. 현재까지 상황으로는 서울이 가장 피해가 심각했다.
아마도 인구의 절반 가까이 서울, 경기에 거주하다 보니 밀집도가 높아 감염속도도 빠른 듯 했고 그 외 광역시는 소수의 감염체가 발견되어 크게 피해는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감염체가 발견되고 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특이한건 서울에서 발견된 감염체들이 아직까지 서울에서 맴돌고 있다는 거였다.
서로 무리를 지어서 움직이는 모습이기는 하나 생존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느릿느릿 서울시내 산책하는 듯 걸어 다니는 모습만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마
감염이 되어도 인간이었을 때의 최소한의 본능이 남아있는 듯 했다.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을 떠나기 싫은 마음...인간이 발전하게 된 계기중 하나인 무리지어 생활하는 모습들.. 바로 옆에 한강이 있었지만 낮은 지능을 가진 감염체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점과 불에 타고 있는 건물 주위에는 가지 않는 점. 그리고 후각보다 청각에 의존하는 행동 등 여러 가지 정보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소리를 내지 않아도 많은 인원이 뭉쳐있는 생존위치를 찾아낸다는 점이었다. 홈페이지에서도 되도록 10여명이 넘지 않는 인원으로 구성된 쪽이 발각확률이 적을 것이라고 했다. 이건 아마도 뭔가 특별한 능력일 듯 했으나 산채로 잡아 실험한 것이 아니니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보였다.
서울경계선에서도 멀지 않은 이곳이지만 주거인구가 적은 탓인지 아직까지
근체에서 발견되는 감염체는 없는 듯 했다. 우선 우리가 가진 물품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식량은 2리터 생수가 약100여개 쌀은 약 30Kg정도. 라면
두 박스 그 외 면 종류가 한 박스 분량. 참치 캔이나 캔에 든 햄 등 캔 음식 약
100여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까지 파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이 저장되어있었다. 이번에 구입한 캠핑용 6kw 소형 발전기와 캠핑카에 붙어있는 발전기 까지 하면 꽤 많은 양의 발전이 가능할 듯 했고 카라반 상판에 태양집열판도 달려있는 상황이고 주유소에서 가져온 기름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정도면 풍요롭게 한 달 가량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이곳 근처까지 감염체가 발견될 듯 했고 여차하면 바로 이동을 시작해야 했다.
" 오빠 뭐해요? "
살짝 열려있는 방문을 열고는 얼굴을 빼꼼히 내민 은혜였다.
" 아..이것저것 정보 좀 보고 있었어. 애들하고 TV는 다 본거니? "
" 네. 아직은 상황이 좋은 편인가요? "
" 아니...그렇다고 최악은 아니지만 감염속도가 약간은 더디게 진행되는 듯 해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로는 서울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감염을 통제할 수
있어 보여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 우리야 숨어서 지내지만
밑에 지방은 치안이 난장판 인가봐. 감염체로부터는 안전할지 몰라도 우리가 만났던
불량배들을 상대해야겠지. 그래서 고민 중이야. 이대로
여기서 머무느냐 아니면 내려가서 감염체로부터 안전 하느냐... 전자인 경우도
그렇지만 후자인 경우도 우리가 계속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
난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혜는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고는 긴 다리를
까딱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 오빠..내가 오빠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재효 오빠랑 언니가
오빠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재효 오빠는 오빠를 매우 존경하고 멘토라고
생각하고 있고 언니도 장난이지만 재효가 없었다면 오빠한테 갔을 거라고
말을 종종 했으니까요. 며칠이지만.. 오빠의 침착함과 판단력은 정말 대단해요.
아마 오빠가 없었다면 재효 오빠나 미란언니, 저나 아마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말았을 거예요. TV에서도 나오듯이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집단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속에서 우리 셋만으로 버티기에는 무리일거예요. 저희도 최대한
돕고 노력할게요. 그러니 많은 짐을 오빠 혼자서 짊어지고 갈 필요는
없어요. "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하는 은혜.. 말은 안했지만 이미 나의 고민을 알고
있는듯했다. 그래... 이들이 있어 내가 살아가야만 했고 이 녀석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야만 한다. 난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고맙네...내가 고민하고 있던 걸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말하네... "
" 훗...오빠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심리에는 능한 편이예요! "
난 별다른 말없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자리를 일어섰다. 아마 밖에
커플도 알고 있을 테지.. 내가 고민하는 바를..난 마음속에 응어리가 풀어지는 걸
느끼며 방문을 나섰다. 아직도 TV를 보며 웃고 있는 녀석들 옆에 앉아서 편하게
TV를 보며 즐겼다. 은혜도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난 멋쩍은 듯
미소로 답했고 그런 우리를 보며 재효와 미란이도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마트와 주변 슈퍼를 털고 다니면서 생필품을 구하면서 그렇게 며칠의 시간을
보냈다. 점점 상황이 악화되는지 TV방송이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그나마
라디오에서 현재 상황에 대해서 방송을 했지만 녹음방송인 듯 계속해서 같은
말만 되풀이 되서 나왔다. 언제 전기가 끊길지 모르는 상황이 다가온 듯 했다.
발코니에서 근처 빌라를 보니 불이 켜진 집이 확연히 줄었다. 다들 어디론가
피난중이라는 증거였다. 평화로운 날이었다면 8시쯤 식구들과 저녁을 먹던지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칠 시간인데 지금은 혹시나 감염체들이 몰려올까 이 와중에
미친 짓을 하고 다니는 무리들이 오지는 않을까 걱정을 해야 할 시간이다.
얼마 남지도 않은 마트의 물품을 건지다가 계속 해서 힐끗거리는 남자들의 무리를 봤다. 미란이의 미모도 미모였지만 은혜의 미모는 연예인 급을 뛰어넘는 수준이었기에 대충 걸친 바지와 셔츠조차 섹시해보였다. 어차피 법이 존재하지도 않는 시기였기에 범죄를 저질러도 공권력이 상실된 마당에 아무의미 없어진 법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중 남자2명이 은혜에게 껄떡되더니 아예 대놓고 납치를 시도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나랑 재효가 떨어져 있었기에 아마도 우리가 일행이란 생각은 못한 듯 했다.
" 꺄아아아!!!! "
하이 톤의 고음이 마트 내부에 울려 퍼졌다.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나와 재효는 빠르게 은혜에게 다가갔고 남자 2명이 은혜를 끌고 가는 것을 미란이가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나와 재효는 두 남자에게서 은혜를 떨쳐놓고 무서운 눈으로 두 남자를 쳐다봤다
" 뭐 하시는 겁니까... "
난 낮은 톤으로 말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나는 오히려 냉정하게 변함을
느꼈고 재효도 상당히 분노한 듯 주먹을 말아 쥔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저들
무리가 얼마나 될지 모르기에 섣불리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 아씨.. 머긴.. 이런 상황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좀 나줘 쓰자는 거지 "
두 남자가 키득되면서 말했다. 180은 넘는 체구에 운동을 했는지 다부진
몸이었고 우린 둘 다 170정도에 평범한 체구였기에 아마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 사람을 나눠 쓰자 라... 크게 좋은 의미는 아닌 듯싶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