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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미란이와 은혜가 차려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9월 말 쯤
이지만 날씨가 매우 쌀쌀해져 갔다. 올해는 눈이 많이 온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TV를 켰지만 방송이 되는 채널이 없었다. 라디오에서는 아직까지 다행히 방송이 나오고 있었지만 녹음 방송인 듯 같은 말만 되풀이됐고 핸드폰은 아직 작동이 되었으나 바로 옆에 있는 재효한테 몇 번을 걸어야 한번 통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파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재효와 미란이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고 은혜도 가까스로 통화가 된 모습이었다. 억울하게도 나만 미국의 부모님과의 연락이 되지 않았다.
" 우아~!!! 이거 빠르다!! "
내가 고친 ATV를 타고 주차장 한 곳에서 신나게 타고 노는 미란이와 은혜였다.
한동안 시험해봐야 했고 넓고 넓은 주차장에서 사고 날 리도 없으니까.
" 오...민수가 말한 게 사실 이었군 자네 손재주가 좋구만. "
어느새 옆에 다가온 현준아저씨가 말했다.
"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죠. "
" 운도 실력이라네. 이 상황에서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것도 실력이지... "
씁쓸하게 웃으며 아저씨가 말했다.
" 그나저나 밖에 상황은 어떤가? 우리는 여기 온 지 꽤 시간이 지나 정보라곤
그저 물리면 안 된다는 것 외에는 모른다네. 혹시 알고 있는 정보가 있나? "
역시나... 이쪽도 정보가 부족한 건가... 나는 잠시 생각을 한 뒤 말을 이어갔다.
" 생존자 분들과 모여 이야기 한번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럼 서로 몰랐던
정보도 알 수 있고요. 혹시나 다른 분들과 연락이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
내 말에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경계 시간을 알려주는 것
외엔 거의 대화가 없는 듯 했다. 어찌 보면 철저한 개인주의라고 해야 하나.
폐쇄적이라 해야 하나..
" 이럴수록 정보가 도움이 됩니다. 서로 믿음이 안 가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적을
알아야 내가 승리한다 하지 않습니까? 서로 모여 이야기를 해 보죠 "
" 흠...알았네.. 내가 민수와 상의해보고 말해줌세... "
" 네 알겠습니다. "
끝까지 승낙하지 않는 아저씨. 속으로 여기서 오래 못 있을 곳이라는 생각과
정보를 얻은 후 며칠 뒤에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카라반으로
들어와 재효와 아이들에게 내 생각을 말했고 애들은 승낙하는 분위기였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저씨가 오셔서 15분 뒤에 주차장 중앙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낮이나 기온이 제법 올라 아침에 입었던 점퍼를 입고 나가기에는
더웠다.
" 기온 차가 점점 벌어지네... 생활하기 힘들어지겠네.. "
" 이럴 때 감기라도 들어 체력에 문제가 생기면 힘들어. "
우리는 아침에 입었던 옷들을 벗고 갈아입기 시작했다. 미란이와 은혜는
침실에서 나와 재효는 소파 쪽에서 갈아입었다.
" 자자! 어서 가자 10분 지났어! "
난 밖에서 침실 쪽 위치를 탁탁 치며 말했다. 잠시 후 미란이가 은혜가 나왔지만
난 그들의 옷차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 너희....어디 놀러 가냐... "
언제 챙겼는지 짧은 반바지에 상체의 굴곡이 확연히 보일정도로 붙는 티를 입은
은혜와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치마와 V넥 티셔츠를 입은 미란이었다. 나름
C컵을 자랑하는 미란이는 가슴 골이 살짝 보였고 족히 미란이의 두 배는 되는 크기를 자랑하는 은혜는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둘 다 모델 출신이라
그런지 그런 시선에 익숙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 당장 갈아 입고 와. "
난 약간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 왜! 예쁘잖아! "
이런 상황에 여자들은 예쁜 옷을 입으며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었고 괜히 문제 길게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 자세한 이야기는 갔다 와서 하자. 둘 다 긴 바지 입고 티 위에 뭐라도 걸쳐.
이건 부탁이 아냐. 강제적인 거니까. 난 먼저 가있을 테니까 재효가 데리고 와"
난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말하고 뒤도 안 돌아 보고 주차장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 후 긴 청바지에 내 셔츠를 걸치고 오는 게 보였다. 둘 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하아... 아직은 애들인가? 아니면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가?
난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들은 극장 스크린 앞에서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가 가장 늦게 모인 모습이었다. 어디가도 지각은 하지 않는 내가 제일 늦게
도착한 것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 우선 서로 알고 있는 정보를 교환하고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이야기 하자고
모였습니다. 다들 말씀 부탁 드립니다. "
극장 주인이자 생존자 무리의 암묵적인 리더 급인 현준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들 섣불리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신뢰도도 없는데 말할 리가 없었다.
" 우선 제가 아는 걸 말씀드리죠. 현재 군부대와 국가 주요 기관들은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들은 내용은 생존자가 아직은 꽤 있는
편이었고 서울에 있는 생존자들이 대부분 남으로 갔다는 것과 감염체들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리를 지어 남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염체는
소리에 민감하고 시각과 후각은 거의 퇴화된 듯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큰소리가 없는 큰 무리의 생존자들을 잘 찾는다고 합니다. 10여명 이상 모이길
권장하지 않는다는 방송을 마지막으로 들었습니다. "
내가 먼저 말을 했다. 어떻게 보면 얼마 전까지 TV에서 방송한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말을 먼저 하는 게 좋을 듯싶어 말을 했다. 물론 중요한 정보들은 다
말하지 않았다. 저들이 필요한 말만 듣고 난 할 말 없소 라고 가버리면 그것도
문제였고 간다고 해도 아는 바가 없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을 테니까.
" 저희가 알고 있는 내용은... "
" 우리가 봤던.... "
솔직히 말하면 거의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정말 저 정도만 알고 있는지
나처럼 최소한의 수는 남겨뒀는지는 모르는 거다. 그 와중에 군인일행에서
엄청난 정보가 나왔다.
" 제가...여기 오기 전 군대에 있을 때 소대장이랑 친해서 마지막으로 통화를
하였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말한 내용은.. "
무리에 리더가 있다. 는 것이다. 감염체무리 중 선두 무리가 아닌 선두 바로
뒤부분의 한 감염체가 방향을 틀자 그 감염체를 따라서 이동했다는 거다.
그리고 가끔 거의 뛰는 듯 한 감염체도 있다고 한다, 차량으로 피난 도중 초반에
근접하게 따라오는 감염체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다들 슬슬 많은 내용의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꽤 유용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역시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모였을 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서로 아군도 적군도 아닌 상황에서는 크게 좋다고는 하긴 힘들었다.
" 저희는 이제 식료품을 구하러 나갈 것입니다. 혹시 나가실 분 계신 가요? "
군인무리 중 한 사람이 말을 했다. 아마도 인원이 많다보니 먹는 양도 많아
최대한 비축 해야하는 듯 했다. 1시간 뒤에 나갈 것이라는 말을 하고 군인 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카라반으로 오는 내내 미란이랑 은혜의 표정이 불만이 가득하다. 아까 나름 차려 입은 옷에 내가 화를 내서인 듯 했다. 물론 이해는 가지만 머리와 가슴은 따로 노는 법이다.
" 하... 둘 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니까. "
" 치...그래도 예쁘게 보이려고 차려 입은 건데 그렇게 짜증내면 우린 어떻겠어? "
차마 은혜가 따지지 못하고 미란이가 나에게 반격을 했지만 은혜 표정에서도
미란이를 응원하는 모습이 보였다.
" 이해 못하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솔직히 갇힌 공간에서의 스트레스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딱히 오락 거리나 유흥이 없으니 여자인
너희들은 옷이라는 것에 신경 쓰는 것도 알고 너희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하나가 옷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너희 인간의 3대 욕망이 뭔지 알지? "
" 응.. 식욕, 수면 욕....성욕... "
약간은 부끄러운 듯 은혜가 말했다.
" 잘 아네. 지금 식욕과 수면 욕이 어느 정도 충족되어 있는 마당에 가장
활발하다는 시기에 저들 눈에 너희가 뭘로 보이겠니? 솔직히 너희 둘 다
상당한 미모인건 나도 알아. 예전에 그렇게 입고 같이 거리를 나선다 해도
나와 재효가 있다면 크게 해코지 하는 놈들은 없겠지만 지금은 달라. 만약
저들이 너희 둘 모습을 보고 흑심을 품고 달려든다면? 평범한 옷을 입었던
마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노출이 있는 옷차림으로 있다간 저들 이성을
날려 버릴 수 있어."
나의 잔소리에 은혜와 미란이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했다. 우리가 지켜주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도 평범한 사람이다. 숫자로 밀고 들어온다면 우리 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조금은 조심하자.. 우리가 편하게 지내긴 하지만..우린 쫓기는 입장이야. 솔직히
금방 끝날..상황은 아니라 생각된다. 그러니..최대한 조심하자."
" 미안...오빠 ....생각이 짧았네.... "
미란이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했다. 딱히 잔소리하려고 한건 아니지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그렇게까지 미안하게 생각 하지 마. 너희 마음은 아니까. 예쁜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면 카라반에서 보여줘. 우리야 고맙지.."
난 분위기를 띄우려 농담을 했다.
" 저질... "
은혜가 중얼거리듯 말하고 카라반으로 들어갔다... 미란이와 재효는 차마
소리 내어 웃지는 못하고 킥킥됐다. 괜한 짓 했나보다. 한 시간 뒤 대부분의 일행들이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챙기고 차량을 점검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있던 커플 두 쌍과 한 식구. 그리고 군인일행. 현준, 민수아저씨네 일행으로 파벌 아닌 파벌이 형성된 듯 했다. 아마도 대량으로 뭉치기보단 10명 남짓으로 뭉쳐서 서로 이익을 보는 듯 했다. 가장 불리한 건 이번에 들어온 우리였다. 재효랑 나랑 나가자니 미란이와 은혜가 불안하였다.
" 나 혼자 간다. 재효 넌 여기 남아. "
" 말도 안 돼!!! 혼자 나가서 어쩌려고!! "
재효가 격렬하게 반대했다. 괜히 혼자 보내서 못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
죄책감과 남은 두 명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벌써부터 느끼고 싶지
않았을 테다.
" 지금 여기 다른 사람들을 신용 할 수도 없어. 지금상 황은 모든 전력을
쏟아버리기 보다 각개로 움직이는 편이 좋을 듯 해. "
" 우린 아직 먹을 게 많잖아! 굳이 안 나가도 되는데 왜!! "
" 그래 오빠! 괜히 나가지 말자. 아직 버틸 수 있잖아. 오빠 혼자 무리 하지 마! "
미란이와 은혜도 거들며 말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 우선 저들한테 우리가 얼마나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싫어. 지금은
우리도 식량이 없어 조급한 모습처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물론 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저들이 날 구해줄리 없는 것 알아. 하지만 같이 나가봐서
분위기도 봐야하고 솔직히 아예 혼자 나가는 것보다 은근슬쩍 껴서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
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끝까지 반대하는 재효를 뒤로 한 채 난
아침에 손 본 ATV에 시동을 걸고 입구로 나갔다. 다른 ATV에서 꺼내온 배터리를
하나 더 연결해서 못해도 3시간 이상은 버틸 수 있을 듯 했다. 한 손에 수리 센터
에서 가져온 공구와 등에는 등산 가방을 메고 천천히 입구를 나갔다.
" 서로 구해줄 순 없으니 자기 몸은 자기가 챙기는 겁니다. "
현준아저씨가 입구를 나가면서 말했다. 대부분 차량을 이용해 이동하는 모습
이었다. 극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슈퍼가 있다고 했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근처지형을 검색하면서 서서히 속도를 높여갔다.
" 이거 은근히 빠른데.. "
계기판 속도가 20km/h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감염체가 나타나도 충분히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슈퍼가 보이기 시작했다.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슈퍼였으나 이미 몇 번의 약탈이 있었는지 남아있는
식료품은 그렇게 많지 않아보였다. 물이나 라면 등은 이미 진열장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과자 몇 종류와 음료 몇 개만 보일 뿐이었다. 다행히 아직 날이 밝아
내부가 어둡지 않았으나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감염체를 대비해 공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다행이 슈퍼 뒤쪽 컨테이너에는 상당량의 식료품이 남아있었다. 다들 여기까지 수색을 못한 듯 했다. 난 물과 라면, 부탄가스를 챙겨서 가방에 넣고 가져온 캐리어에 물건을 담았다. 꽤 많은 양이었지만 굳이 저들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고 저들도 식료품 위치를 나에게 말해주지도 않았고 이동시에도 뒤도 안 돌아보고 출발한 게 내심 화가 난 것도 있었다. 가방에 물건이 가득 실렸고 난 빠르게 움직여 ATV에 싣고 극장을 향해 달렸다. 몇 몇은 이미 도착한 모습이었다. 다들 일행이 함께 움직여서인지 보기에도 꽤 많은 양을 가져왔다. 걱정스럽게 나를 기다리던 애들도 내 모습을 보자 환하게 웃기 시작했고 많은 양은 아니지만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치..치직....-
혹시나 새로운 소식이 있을까 라디오를 작동시켜 보았다. 그나마 미약하게 방
송이 되고 있는 주파수를 잡았다
- 현재... 일부 시민들과 군대는 .....까지 대피하였으며.....아직은 안전.....한.. -
상태가 좋지 않아 전부 듣기는 무리였지만 그래도 어딘가 안전한 피난처가
있는 듯 했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목적은 생겼으니....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난 재효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인침실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어느덧 해가 넘어가며 석양을 만들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채 있는 모습이 내일쯤이면 비가 올 모습이었다.
새벽2시가 되자 약속된 송전탑처럼 생긴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주변을 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군대처럼 깨워주는 건 아니고 알람을 맞춰서 일어나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뭐 서로 자기 집 보여주기 싫은 모양이다. 새벽2시가 조금 안 돼서 재효랑 나는 망원경을 들고 탑으로 향했다.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위에서 빼꼼히 쳐다보더니 내려오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없었기에 바로 앞에 다가와서야 누군지 알게 되었다. 별다른 말없이 수고하라는 말과 군인무리 중에 2명이 자리를 벗어났다. 우리는 감염체 보다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감시했다. 괜히 우리 카라반으로 들어가면 여자 둘이 자고 있는데 일이라도 생기면 속수무책이니....자신들 캠핑카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뒤에 우리는 주변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빛조차 없는 캄캄한 밤에 솔직히 감염체가 다가와도 보일리가 없었다. 철제 펜스를 잡고 흔들어 소리라도 내지 않는 한 아무리 망원경으로 본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 이게 무슨 경계냐.. 뭐가 보여야지.. "
내가 투덜거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군대가 아니니 근무지에서 담배 핀다고
영창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 그러게 형.. 이거 감염체를 보는 것 보다 남은 사람들 감시 하는 건데..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기적으로 카라반들을 지켜봤다. 잡담을 하다 보니 다음
근무자가 다가왔다. 역시나 별다른 인사 없이 교대를 했다. 카라반에 도착할 즈음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 콰광!!! "
아침부터 엄청난 양의 폭우가 내렸다. 하늘도 지금의 세상이 더럽게 느껴지는 듯
모든 것을 씻어버릴 생각인양 엄청난 양이었다. 가을비라기보다는 한여름 국지성
호우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근근이 이어가던 전력조차 끊겼다. 그
시험풍력발전인지 뭔지는 전력을 저장하는 양이 얼마 되지 않는 듯 했다. 우리는
다행이 배터리 여분이 있는 편이라 한동안은 지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더군다나 시기도 좋지 않다. 우리가 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가 끊겼고 가장 큰 카라반을 가졌으니 아마도 전기는 우리가 다 썼다는
의심을 할지도 모른다.
" 에구구... 갈수록 태산이요 산 넘어 산이요 여우 굴 피하니 호랑이굴이구나.. "
난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깊게 잠들어있는 은혜를
살짝 쳐다보았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지만 하얀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전형적인 미인 형. 더군다나 흔히 볼 수 없는 바스트를 자랑하니 남자들
이성이 온 전 할리 없었다. 더군다나 미란이도 한미모를 자랑하는 아이었다.
암울하게도 은혜 옆에 있어 빛이 바래보였지만 재효를 만나기 전 모델 일을 할
때 팬 카페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 후우... "
난 카라반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대 물었다. 밖에는 어닝이 쳐져 있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는 어닝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 오빠 뭐해요? "
" 조금 답답해서... 비도 오는데 기분도 눅눅하네... 처음 감염체가 나타났을
때도 이렇게 비가 내렸는데. "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억 속 에서는 몇 년은 된 듯이 느껴졌다. 비가 와서
그런지 꽤 기온이 떨어진 듯 했다. 은혜는 가벼운 옷차림위에 제법 큰 담요를
어깨부터 걸치고 나왔다. 내색은 안 했지만 다들 이 상황이 힘들 테다. 가족들
친구들 누구 하나 제대로 연락은커녕 생사조차 불분명하니 불안감도 커질 테고
당장 우리의 앞날에도 잔뜩 먹구름인 상황이다.
" 추운데 들어가지.. 감기 걸려... "
" 괜찮아요. 오빠 혼자 청승맞게 밖에 두기 뭐한데... "
살짝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얼마 전 첫 키스 사건이후
제대로 수다를 떨거나 개인적이 말을 해본 기억이 없다. 괜히 미안해지기도 하고
조금은 어색해진 느낌도 있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 응?? 아 미안.. "
한동안 말이 없는 나를 보다 답답한듯했다. 난 억지로 이런 분위기 보다 밝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아직은 잘 모르는 은혜에 이것저것에 대해 물어봤다.
" 뭐 그때는 그런 일도 했고 한동안 미란 언니 회사 모델도 해보고... "
어렸을 때 미란이랑 친했고 모델 일을 하면서 더 친해졌다고 한다. 외동딸에
꽤 부유한 집에서 자랐었고 패션 쪽이 좋아 이런저런 일을 해본 듯 했다.
나와는 다르게 은혜는 나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미란이가
줄기차게 소개시켜 준다고 하더니 셋이서 술자리를 가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 솔직히 그때는 별 관심 없었는데.. 지금 와서 조금은 후회되네. 언니한테
졸라서 좀 일찍 만났으면... "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은혜였다. 날이 어두워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고
타이밍 좋게 천둥이 여러 번 울려 펴졌다.
" 글쎄...아마 그랬다면...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어.. "
난 보이지 않겠지만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느 정도 서로 호감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은혜와 다르게 어느 정도 연예경험이 있는 나였고 아마도 은혜는
지금 상황에 스톡홀름증후군 비슷한 것일 수 도 있었다. 폐쇄된 공간에 오래있었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했으니까. 난 담배를 주차장 저 멀리 던지고는 카라반으로 들어갔다. 미란이와 재효도 일어나있었는지 주방에서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다들 크게 요리 실력이 없었기에 인스턴트로 때우는 식이었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이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있으랴.. 말없이 밥을 먹는 나와 은혜의 모습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듯 눈치를 보는 미란이었다. 어차피 재효야 이런 쪽에 눈치가 없었고 나랑 은혜를 이어주기 위해 은근히 노력하는 쪽은 미란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1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하여
꽤 어두운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빗소리로 우리의 소리가 세어 나가지
못한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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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마음을 비우고 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