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 / 0281 ----------------------------------------------
시작
다행이..우리 일행의 분위기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한참을 기어가다싶이 달려 한적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비가 많이 와서 가시 거리에 제한이 있었지만 꽤 넓은 공터는 그나마 감염체가 다가와도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는 듯 했다. 이제는 추가적인 물과 전기를 얻을 수 없기에 최대한 아껴가며 생활했다. 전등보다 촛불을 켜고 휴대용 가스버너로 밥을 지어 먹었다. 지도책을 보여 이동경로를 생각해봤지만 내비게이션이나 각종 전자장비에 익숙한 나한테는 이해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군대에서도 작전지역 지도 외에는 본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새삼 어른들이 지도책 하나 들고 다니며 이동 했다는 것이 존경 스러울 따름이었다.
" 그나저나 신기한데... 보통 영화에서 보면 감염되면 전 세계가 감염체로
득실거려서 제대로 이동도 못하는데 우린 집에서 나올 때 한 무리 본 게
전부잖아. 뭐 중간 중간 한 두 개체 정도는 봤지만 영화처럼 우르르
몰려 다니면서 위협이 되지는 않네? "
" 아무리 생존자가 많다고 해도 몇 백만 마리 정도는 돌아다닐 텐데... 우리가
남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너무 할 정도로 없는데... "
신기하긴 했지만 우리로서는 다행이었다. 수많은 의문들이 나왔지만 딱히
알 길도 없었기에 답답함만 늘어갈 뿐이었다. 잠들기 전 난 차에서 자기 위해
담요를 몇 장 챙겼다.
" 오빠 그건 왜? "
" 나 차에서 자려고.. "
" 응??! 불편하게 왜 거기서 자요! 따뜻한 침대 놔두고 !! "
은혜가 울컥하며 말을 했다. 그때 내가 차에서 자는 모습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나
보다.
" 만약 우리가 자는 사이 감염체가 다가오면 어떻게 이동하게? 마냥 카라반에서
버티다 굶어 죽게? 날이라도 좋으면 돌아가면서 보초라도 서겠지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이 날씨에 무의미하지. 그럴 바에는 차에서 대기하다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도망치면 되지. 원래 주행 중에 타면 안 되지만 지금에서야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고 4명 다 차에서 자는 것 보다는 효율적이지. "
다들 내가 한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재효의 적극적인 만류로 결국
5시간씩 돌아가며 차에서 자기로 했다. 미란이와 은혜도 하겠다고 했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기에 필요 없다고 했다. 내가 먼저 5시간 동안 차에 있고 후에 재효가 차에 있기로 했다. 말이 잠을 잔다고 했지만 실상 잠이 올지도 의문이었다. 운전석에 앉아 시간이나 때울 겸 차량 설명서나 잡다한 책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냈을 떄 멈출 것 같지 않던 비가 슬슬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 이제야 멈추네... 지긋지긋 하다 정말.. "
난 차에서 나와 담배를 한대 물었다. 다행이 이곳저곳 털면서 그래도 꽤 많은
양을 챙겼지만 흡연자의 욕구가 그렇듯 부족해 보인다. 어느덧 시계는
교대해야할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아마도 피곤한 상태였기에 못 일어났겠지.
난 굳이 깨우기보다 주위를 둘러보며 산책 아닌 산책을 했다. 무척이나 쌀쌀한
공기가 폐 속을 파고들었지만 오랜만에 상쾌한 느낌이었다. 걸어갈 때마다
느껴지는 시멘트 바닥이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한참을 돌아다니자 어느덧 해가 뜨는 듯 날이 밝아왔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되어도 해는 뜨는구나... 한참을 돌아다니다 트럭에서 캠핑의자를 꺼내 앉고
지도책을 펼쳤다. 대충 국도 번호라도 외울 생각이었다. 지금 내 위치를 찾는데도
한참을 해맨 후에야 대충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하루이틀정도 더 달리면
양양 쪽에 도착할 수 있을 듯 했다. 메인침실에서 나온 은혜가 누워있는 재효를
보고는 한동안 의문에 빠졌다. 원래 옆에 있어야할 내가 보이지 않고 없어야할
재효가 누워있는 모습에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면서 지도책을 보고 있는 나를 보았다.
" 왜... 아직도 있어요? "
" 일어났구나? 새벽 공기가 차네... 애들은 아직 자? "
" 그게 문제가 아니라 왜...분명 아침에는 재효 오빠가 있어야 하는데 왜 아직도
오빠가 있는 거예요? "
매번 듣던 존댓말이지만 이런 순간에 듣는 존댓말은 오히려 살벌하게 느껴졌다.
" 아..그게...나도 잠을 자다보니 시간이 좀 흘렀고 어차피 정신도 멀쩡해서
그냥..아침이 되어버렸네..? 하.."
이리저리 핑계를 댔지만 절대 수긍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 절대 오빠가 잤다고 생각도 안 되고 눈이 그렇게 충혈 되어 말해봐야 신용은
절대 안 간다고요. "
" 하...하....그냥 나만의 시간과 앞으로의 계획도 짜고 그렇다보니 이렇게 된 거야
그러니 너무 재효한테 신경질 내면 안 된다.. "
난 가볍게 은혜의 뺨을 꼬집으며 말했다. 같이 지낸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분명 저 눈빛은 쉽게 넘어갈리 없는 눈빛이었다. 재효는 일어나자마자 은혜의
폭풍 잔소리에 기가 죽었다. 20분을 넘게 쏘아붙이는 은혜의 모습은 언니인
미란이 조차 말릴 수가 없었고 그런 그들을 피해 미란이와 난 밖에서 은혜의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서성였다.
" 의외로 무서운 면이 있네..정작 당사자인 나는 가만히 있는데.."
" 은혜가 좀...그런 면이 있어..화나면 나도 어찌 못해... "
재효가 불쌍하긴 했지만 저 틈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불씨가 나한테 넘어올까
두려웠다. 며칠은 굶은 듯 핼쑥해진 얼굴로 나온 재효였다. 한편으로는 매우
불쌍한 표정이었다. 먹을거리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밤새서 있어서 인지
나만 아침을 거른 채 넘어갔다. 어떤 벽이나 장애물이 없는 곳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았기에 서둘러 이동을 시작했다. 덩치 큰 차량과 카라반을 끌고 속도를 내기에는 초보자 입장에서 무리였다. 더군다나 혼자 운전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밀려와 피로감은 점점 가중되어 갔다. 분명 날은 추운데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히터를 튼 것도 아닌데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 오빠 왜 이렇게 땀을 흘려요? "
옆 좌석에서 나를 보면 은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봤다. 그 말에 이마에 묻은 땀을 소매로 닦았더니 소매 끝이 흥건해질 정도로 땀이 나고 있었다.
그런 나의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 몸에 웬 열이 이렇게 많아요! 지금까지 어떻게 운전 한 거예요! "
" 아냐..원래 열이 많아서 그래... 크게 걱정할 건 아냐. 아마 덩치가 큰 차라
신경 써서 운전해서 그럴 거야.. "
난 억지로 웃으며 말했지만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이
근육통에 걸리듯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아마 이 상태라면 운전은 몇 시간도
힘들듯 했다.
" 나...좀 힘들어서 그런데 우리 쉴 곳 좀 찾아보자.. "
" 미안해요 형... 내가 운전을 해볼게요.. "
" 아냐..이게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덩치가 커서 운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네가 하기 에는 무리가 있어. 그렇다고 길이 넓은 것도 아니라서 엄청
신경 쓰여 나중에 좀 큰 도로에 나가게 되면 해보자."
솔직히 평소에도 운전 못해서 면허 딴 지 1년도 안 돼서 사고를 몇 번이나 내서
보험료 폭등한 놈한테 우리의 유일한 쉴 곳을 넘기기에는 너무 불안했다.
근처 한적한 마을을 찾아보려 내비를 켰다. 내비게이션은 길안내 할 때 최적 길이나 최소시간 고속주행 등의 설정만 가능했다. 최장시간 가장안전한길 따위를
프로그래밍할리도 없었기에 지도를 보며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래도 근처 지형을
확인하기에는 내비만한 것이 없었기에 축척을 줄여가며 확인을 했다. 그러는
시간동안도 내 몸은 점점 천근만근이 되어갔다. 핸들을 잡은 손조차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적한 마을이 보였다. 다행히 주유소도 있는 곳이었다. 주유소 옆에 꽤 넓은 마당을 가진 집이 보였다. 농사를 짓는 집인지 마당한쪽에는 제법 큰 트랙터도 보였다. 담벼락도 꽤 높았고 대문도 넓고 튼튼해 보여 우리가 진입하기에는 무리가 없어보였다. 우선 문 앞에 차를 세운 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없는 체력을 끌어올려 평소에 무리 없이 들던 공구조차 무거웠다.
" 형!! 저기!!! "
내 앞에 감연 전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일 것이 분명한 감염체가 나를 보더니 슬금슬금 걸어왔다.
" 퍽!!!! "
난 지체 없이 손에 든 알루미늄 배트를 머리 쪽으로 힘차게 휘둘렀고 감염체는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이며 힘없이 주저앉았다. 한 번의 휘둘림이었지만 다리조차 후들거렸다. 억지로 쓰러지는 몸을 이끌고 집안을 봤다. 시골집이라 주택 안은 훤히 보이는 구조였기에 크게 어려움 없이 수색을 할 수 있었다. 집안 물품으로 봐서 할아버지 혼자 살던 집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감염체는 나타나지 않았다.
재효는 몇 번 더 감염체의 머리를 가격한 뒤 집 밖으로 끌고 갔다. 카라반을
마당에 주차하고도 꽤 넓은 공간이 남았다. 문단속을 한 뒤 집안에 있던 장롱이나 가구들로 대문을 막았다. 대문은 철제형태였지만 시골집에 도둑이
있을 확률이 거의 낮아서 인지 군데군데 녹이 슬고 작은 구멍들이 보였기에
불안한 마음에 가능한 모든 물품으로 틀어막았다. 그나마 다행인건 담벼락이 꽤
높았기에 별다른 조치가 필요치 않았던 정도였다.
" 하... 끝났다.. 이 정도면 웬만큼 버티겠지.. "
작업이 마무리 된 후 재효가 손을 털며 말을 했다. 난 머리에 망치라도 맞은
느낌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렸다.
" 헉....헉.... "
재효에 의해서 카라반 침대에 이끌려 왔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걷기는
물론 서있기도 힘들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고 싶었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얼마나 잤는지 온몸이 뻐근했다. 메인침실 위쪽에 마련된 선루프를 통해 보이는 별빛으로 지금이 새벽시간인걸 알게 되었다. 난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침대 끝에 팔을 올리고 잠든 은혜를 볼 수 있었다. 손에 수건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아마 나를 간호하다 잠든 듯 했다. 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몸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그간의 긴장이 풀렸는지 오랜만에 푹 잔 느낌이었다. 난 카라반 밖으로 나가보았다. 도시의 공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과 함께 담배를 물었다.
" 일어나자마자 담배 피냐..은혜가 담배 피는 거 싫어한다고 애기 안 해? "
" 어?? 나 때문에 일어났어? 조심히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
어느새 뒤에서 말을 거는 미란이었다. 편한 옷차림으로는 나오는 게
무리였는지 담요를 몸에 둘둘 말고 나왔다.
" 내가 얼마나 잔 거야? "
" 이틀 즈음...? "
" 뭐!!??? "
오래 잤다고 생각했지만 이틀이나 잤다는 말에 놀랐다.
" 은혜가 어찌나 간호하던지...죽은 사람이라도 살아나겠더라... 밥도 제대로
먹지도 않고 오빠 옆에서 떨어지지도 않던데.. "
" 미안한데... 괜히 걱정 끼친 것 같아서.. "
" 미안하면 몸 관리 좀 해.. 그래도 운동 좀 했는지 몸은 좋더라? "
" 내 몸은 언제 봤냐..난 너랑 수영장 간 기억도 없는데.. ? "
" 재효가 씻기느라 그랬는데 은혜가 죽어도 자기가 하겠다는 거 말리다가..
아직 둘이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아는데 은혜도 무슨 생각인지 부끄러움도
없이 닭살 돋는 대사를 어찌나 외쳐 되던지.. 재효가 억지로 밖으로 끌어낸 거
아니었으면 정말 닭 될 뻔했어.."
" 너..지금 그거 유머라고 하는 거냐.... "
" 뭐..그랬다고... "
자기도 민망했는지 말을 돌리네.
" 솔직히 난 오빠가 감염체가 되는 줄 알았어. 그 증세와 매우 비슷했으니까..
이렇게 쌩쌩한 거 보니 다행이네.. "
미란이가 웃으며 말했다. 재효 때문에 오래 보긴 했지만 저 눈웃음이 참
매력적인 아이다. 어느 순간 잊고 있던 미란이의 미모가 단 둘이 있으니 참 예쁜 아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은혜라는 아이까지 있으니 빛이 바랬지만..
아침을 차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말없이 뛰어나와 내 품에 안기는 은혜를 보며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품에서 소리 죽여 우는 모습을 보니 매우 미안했다.
" 걱정했지...미안...그래도 쌩쌩해졌으니 걱정 마. "
" 흑....흑....네.. "
더 이상 우는 모습이 싫었는지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끼니를 거른 적이 많은 미란이의 말이 맞는지 아침 치고 꽤 많은 양을
먹어버린 은혜였다.
" 아..살찌겠다... 아침부터 폭식이네.. "
여자들이 들었다면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올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은혜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글래머에 몸매까지 좋아 모델 일을 하는 아이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닌데 말이다. 미란이 말로는 살이 가슴부터 쪄서 어쩔 수 없어
자연스럽게 적게 먹게 됐다는 이야기를 미란이가 했다. 어렸을 때부터
콤플렉스여서 험한 상황에도 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가방에는 전기
충격기도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어째보면 자신의 은밀한 애기를 시작하자
부끄러워하며 반응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 어제 저녁에 차 엔진 소리가 꽤 많이 들리는 듯 했는데.... 생존자가 있나 봐.. "
재효가 어제 저녁 잠들기 전에 들었던 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꽤 큰 소리로
보아 많은 인원이듯 했고 분주한 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난 재효와 확인을
해볼 마을을 살펴보았다. 꽤 많은 감염체들이 중간 중간 보였다. 확실히 파주에 지낼 때 보다 많은 숫자였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아직 우리의 존재를
파악하고 따라 오지는 못했지만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5분정도 지나자 초등학교가 보였다. 도로 옆에 높은 방음벽이 쳐져 있었고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넓이의 운동장과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2층 건물이 보였다. 운동장 한쪽에는
군용 60트럭 흔히 말하는 두 돈 반 5대 정도와 렉토나 차량 2대가 보였다.
24인용 텐트 2개가 펼쳐있는 게 보였다. 난 조심스럽게 학교 철문을 밀었지만
안에서 잠겼는지 밀리지가 않았다. 학창시설의 기억을 되살려 재효와 어렵지
않게 철문을 넘어갔다. 학창시절에는 담벼락을 넘나들었지만 방음벽으로 인해
넘어가기는 불가능했다.
" 오...군인인가보네... 그래도 인원 좀 되는 듯한데? "
재효가 철문 위에서 뛰어내려와 말했다.
============================ 작품 후기 ============================
각색하는 것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