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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그 순간 내 오른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니 군 시절 자주 봤던 소총 총 신이 보였다. 난 순간적으로 왼손으로 총 신을 잡아챘고 오른손으로 캠핑 나이프들 꺼내 소총을 들고 있는 군인에게 겨눴다. 순간적인 몸의 반응이 나조차도 얼떨떨했다. 내가 언제 호신술 따위를 배운 적이 있었던가? 이런 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 할 때가 아니다. 이 거리에서는 칼이 더 위협적이다.
" 꼼짝 마라!!! "
하지만 언제나 군인은 2인 이상 이동인 걸 까먹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나에게
소총을 겨눴다.
" 어라..? 감염체가 아니잖아? "
나를 보고 놀란 군인이 말했다. 이 녀석들 담 넘어 다니는 감염체라도 본 건가...
난 아무 말도 없이 두 놈을 바라봤다. 들고 있는 소총 종류도 달랐다. 부대 마크도
다른 모양이었다. 두 녀석만 봐선 일치되는 점이 없었다.
" 그만!! 생존자이지 않나! 총 내려! "
근무를 서던 2명 뒤에서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어디서 봤던 얼굴.
" 손...하사 님? "
" 응?? 아!! 넌..!!! "
내 현역 시절 우리 소대장이었던 손 하사. 사단에서도 미인으로 소문났고 일도
똑 부러지게 하는 성격이라 인기도 많았다. 내가 전역하고 얼마 후 진급했다고
했으니 이제는 중사인가.
" 아...너...넌... "
전역 후 6년이 넘었으니 내 이름이 가물가물 하겠지. 3년 전 부터 문자도
한 적이 없으니.
" 김 재원입니다. 손 하사 님.. "
난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 아!!! 맞다!!! 아들 군번!! 멀쩡한 오타쿠!! "
" 그 별명이 여기서 왜 나오는 것입니까!!! 손 하사님! "
난 순간 울컥해서 말했다.
" 역시 너 살아남았구나! "
" 역시라뇨...왠지 기분 나쁜데요? "
" 하하...둘 다 총 내려 아는 사람이야... "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영부영 있다가 손 하사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듯 했다.
" 나 이제 중사야! 하사라고 하지 마! "
" 내가 전역 할 때는 하사였잖아요! 내 이름도 기억 못한 주제에!! "
내가 일병 때 임관하여 전역 때까지 꽤 친하게 지냈었다. 2살 차이고 나랑 당직
횟수가 많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기억이 생각났다. 임시로 마련된 군용
텐트 안에 앉아 손 하사..이제는 중사가 된 전 소대장이랑 의자에 앉았다.
" 둘만 살아 남은거야? "
" 아뇨. 조금만 가면 일반 주택에 일행이 있어요. 그나저나 여긴 왜 계신 거예요?"
분명 군인들 후방으로 밀려났다고 들은 게 마지막인데 전방 쪽에 가까운 이
지역에 있는 것도 그랬고 통일되지 못한 군인들도 이상했다.
" 원래 최소 인력만 남기고 모두 후방으로 이동했어. 처음 며칠은 통신도 원활했
고 이래저래 버텼는데 얼마 전 먹을 것도 없고 몇몇 부대원이 탈영했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남편이랑 같이 모여서 내려온 거야. "
원래 남자친구도 군인이었지. 내가 전역할 때 즈음 만났던 기억이 났다.
" 계획은 있어요? "
" 아니..우선 여기서 며칠 지낼 생각이야. 오면서 식량도 꽤 챙겼고 여긴
주민들이 많이 없었기에 안전할 것 같아. 너도 거기서 나와 일로 와. 어쨌든
뭉치면 좀 안전하지 않을까? "
일반인이 뭉친 것 보다 훈련받고 체계적인 소수의 군인 무리가 좋을 듯 했지만
극장에서 그 무리들이 생각나서 선뜻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이 생겨도 손 중사라면 애들을 지켜줄 듯 해서 알았다고 했다. 군인
몇 명을 대동하여 우리가 있던 주택으로 갔다. 미란이와 은혜는 우리와 같이 있던 군인을 보고 놀란 모습이었다.
"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해줄게 우선 짐 챙겨서 가자. "
무식하게 막아 놨던 대문에 짐들을 치운 뒤 학교 운동장으로 출발했다.
학교에 도착 후 우리 일행은 손 중사가 있는 텐트로 갔다. 텐트 안에는
분대장 견장을 차고 있는 병장2명과 손 중사 그리고 소령계급장을 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 왔네. 여긴 홍 소령 내 남편 몇 번 봤지? "
" 안녕하세요. 김 재원이라고 합니다. "
" 아..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연애시절에 와이프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는데.. 홍 길선 이라고 합니다. "
서글서글한 외모와 다부진 체격을 가진 전형적이자 천부적인 군인 체질인 듯
했다.
" 아까 봤던 애는 재효. 여기는 여자 친구 미란이고 그 옆은 내 여자 친구
은혜라고 합니다. "
" 안녕하세요. "
서로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그간의 이야기들을 했다. 확실히 군에서는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다.
" 현재 중요 시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멸 수준이야. 무슨 이유인지 통신도
원활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광주까지 내려갔다는 것 외에는 몰라.
남겨진 부대들은 알아서 움직이고 있고 우리도 지금은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상황이야. 병사 25명에 우리 2명이 전부고 소총이나 탄들은 좀 넉넉하게 있어.
식량도 꽤 챙겨 와서 한 달 분량 정도 되려나... "
" 저희도 그 정도는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으로 감염체를 상대하기에는
좀 위험할 텐데요. 소리가 너무 커서 오히려 우리 위치만 알려주는 결과가
될 수가 있어서.."
" 그래서 가능한 사격은 하지 말라고 했어. 감염체들이 생각보다 육체가 약해서
쇠파이프로 강하게 치면 죽더라고. 물론 목뼈가 부러질 정도로 쳐야하더라.
덕분에 부대원 몇몇이 감염됐지만... "
여기까지 오면서 그래도 피해가 있는 듯 했다. 몇 달을 같이 생활했던 부대원이
변해가는 모습에 많이 힘들어 했던 것이 느껴졌다. 부대원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텐트를 나왔다. 역시나 미란이와 은혜의 미모에 다들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군에서 여자라고는 소대장인 손 중사 외에 없었을 테니까. 더군다나
또래 모델출신 여자들이라 더욱 시선이 갔을 테다.
짐을 정리하고 밖을 나와 보니 병사들이 짐을 학교 건물로 옮기고 있었다. 아마
감염체가 있을지도 모를 학교 내부에서 하룻밤을 보내긴 무리였을 테고 동이
트자 바로 수색을 시작한 듯 했다. 그 와중에 나와 재효를 본 것일 테고.
텐트를 철수한 병사들은 트럭에서 물품들을 꺼내어 교실로 이동했다. 우리도
근처 공터에 카라반을 주차한 뒤 짐을 풀었다.
" 오..여자 친구 예쁘던데? 역시 능력 있어? "
" 별 말씀을..그동안 고생 많으셨겠네요. "
" 뭐..그나마 우리는 안전한데 있었기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서울이나
도심 지역은 폐허수준이라던데. ? "
" 저도 도심 안쪽으로는 가보지 못했어요. 경기도 권에서 살아서 그쪽에서
피난 온 거라 양양이나 속초 쪽을 생각하고 있어요. 산이랑 바다, 강이 있으니
최소한의 식량이나 식수는 구할 수 있을 듯 해서요. "
" 흠..그럼 우리도 그쪽으로 가볼까.. 지금은 딱히 목적지가 없어 병사들도
힘들어하고 있고 지금은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힘을 내야 하는 게 좋을 듯
한데 잘됐네. "
" 근데 이런 걸 중사가 소령한테 말도 안하고 정해도 되요? "
" 어차피 나한테 잡혀 사는데 .남편도 딱히 계획이 없으니 우선 병사들이랑
모여서 이야기 좀 해보고 올께. "
그동안 힘들었는지 피곤한 기색이 보였는데도 애써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손 중사였다. 군 생활에도 여자 몸으로 꽤 묵묵히 일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아마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 그렇다면 몇 명만 서울로 가서 식구들을 데려오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마지막
연락이 됐다면 어디서 만나자 정도는 이야기 했을 테니 몇몇 부대원을 꾸리고
서울로 가서 구출해 오는 방식으로요. "
" 오...그거 좋은데.. 모두 같이 움직일 생각만 했는데 .. "
" 대신 시간 제한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냥 저들을 기다릴 수 없으니
24시간 안에 복귀한다는 조건하에 가능한 이동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
지역별로 묶어서 이동시킨다면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을 듯 한 데요. "
" 좋은 생각이야. 손 중사 말대로 잔머리가 좋은 친구구만! "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학교 안에 마련된 숙소로 뛰어가는 홍 중령이었다.
머리가 좋고 나쁜 게 아니라 크게 좋은 아이디어도 아니었는데... 아마도
교범적인 명령에만 익숙하여 꼼수 쪽은 무딘 듯 했다. 우리 일행은 교실보다는
카라반에서 지내기로 하고 학교 뒤 쪽으로 차량을 옮겼다. 혹시나 교문 쪽에서
차량을 보고 감염체가 모일수도 있으니 가능한 밖에서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을 듯 했다.
다음날 아침 의견이 정해졌는지 많은 인원이 움직였다. 병사 5명을 제외한
모두가 60트럭에 나눠 탑승했다. 각자 소총과 장비를 점검하는 모습이 아마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 수 있다는 걸 직감으로 아는 듯 했다.
" 우린 이제 10분 후 출발이야."
" 소령님도 가시는 겁니까? "
" 응..저들만 보내는 건 영 불안해서.. "
" 손 중사는... ? "
" 아..여기서 머물다가 우리가 내일까지 안 오면....잘 부탁하네.. "
굳은 결심을 하고 떠나는 듯 했다. 난 악수를 청하는 소령을 손을 잡고 말했다.
" 저분 군 생활동안 모신 걸로 충분합니다. 소령님이 책임지셔야죠. "
" 하하!! 그래그래!!! 자네를 위해서라도 와야겠어!! "
나의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다들 출발했다. 출발 전 손 중사와 가벼운 입맞춤 후
빠른 속도로 교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군용트럭은 내구력이 일반차량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기에 감염체를 보더라도 밀고 들어갈 수 있으니 우리처럼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았다. 남은 인원들은 한곳에 모여 식사준비를 했다. 병사들은 챙겨온 전투식량을 뜯고 있었다.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전투식량은 솔직히 두 번 먹기 힘들다. 난 미란이와 은혜에게 카라반에서 먹을거리를 더 챙겨오도록 했다. 많은 인원은 무리지만 저 정도 인원이 먹을 음식은 충분했다. 우리랑 같이 먹자는 말에 병사들은 화색이 돌았고 손 중사도 미란이와 은혜를 도와 식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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