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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다행히 카라반에 있던 발전기는 가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캠핑용으로
구비한 제품이라 출력이 높은 편은 아니었고 그나마 다행인건 소음이 적다는
정도였다.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펜션에 구비되어있는 청소기를 이용하거나
물탱크의 물을 이용하기 위해 전원을 연결하여 보았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추운 날씨에 수도관어딘가가 얼어 버린 듯 보였다. 펜션 뒤에는
멀지 않은 거리에 천(川)이 흐르고 있었기에 잘만하면 물을 구할 수도 있을
듯 했다. 날이 풀리면 바다낚시 등을 하거나 야산으로 보이는 뒤쪽 산에서
핑크와 함께 사냥이라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토끼를 잡았다
하더라도 손질을 할 수가 없었다. 다들 정육점에서 잘 손질해놓은 고기만
사다 먹었을 텐데... 그래도 낚시라도 수확이 있다면 평소 취미로 바다낚시를
즐겨했기에 어느 정도 손질은 가능했기에 낚시 쪽으로 희망을 걸어 봐야했다.
" 자자!! 이쪽으로 이쪽!! "
" 그 물건은 창고에 보관하고 총기류는 사무실에 보관하자! "
" 여기!! 한명만 도와주십쇼!"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일을 하는 모습이었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최대한 일을 해놔야 했기에 바쁘게 움직였다. 비록 예전보다 적은 인원이지만 처리 속도 만큼은 그전 못지않았다. 간단하게 전투식량으로 식사를 한 뒤 계속해서 움직이다 보니 지치는 속도가 눈에 보일정도였다.
" 이제 부터는 천천히 일을 진행하자. 무리해서 다들 부담이야."
"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놔야지. "
" 알아. 이대로 가다간 감염체가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우리 체력이 안 돼서
버티기 힘들지도 몰라. 식사도 대충하고 다들 일에만 몰두 했잖아. 자는 문제야
천천히 해결하더라도 우선 건물방어는 어느 정도 되어있으니 체력을 보충하며
일을 하는 쪽으로 가자"
" 일리가 있네.. 확실히 피난 생활을 해봐서 그런지 넌 생각이 다르구나.."
" 칭찬으로 들으마."
기태와 나는 짐을 옮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부터 정비된 구역에서
지낸 기태와 정비를 해가면서 지내온 나의 차이는 컸다. 남들보다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나조차 지쳐 가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강원도의 추위와 강한 바람은 사람들을 더욱더 지쳐가게 만들었고 우리는 며칠간이라도 휴식을 병행해 가면서 일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일찍 작업을 끝마치고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챙겨먹은 뒤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부지런한 여자들 덕에 거의 대부분의 방들은 정리가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이고 오랫동안 허허벌판을 유지한 동네인 듯 감염체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간혹 무리에서 이탈한 녀석인지 아니면 감염 후 홀로 돌아다니는 녀석인지는 몰라도 한두 개체만 발견이 되어 소리 없이 제거가
가능했다.
" 흠...그래도 많은 감염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
" 아마도 인구밀도가 적은 지역이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우리의 냄새가
머물지 못하나봐. 그리고 예전과 다르게 많은 인원이 아니라서 발견 못하는
것 일수도 있고. 변수가 많으니까 긴장을 노치지 마 재효야."
" 걱정마 형! "
계속해서 운동을 해왔던 재효는 빠르게 체력과 근력이 늘어가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나도 게을리 지낼 수 없었기에 틈틈이 운동을 했고 다른 남자들도 체력이 모자라면 우리의 생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라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운동을 하는 모습이었다.
방안의 모습은 처음보다 훨씬 깔끔하고 아늑한 모습이었다. 먼지가 쌓여 회색빛
을 내던 방이 아닌 청소와 세탁을 거친 침구류와 물건들이 가지런히 노여있는
모습이었다.
" 우와. 완전히 다른 방인데? "
" 그럼요! 오빠랑 나랑 지내야 하는 곳인데!! 소홀이 할 순 없죠! "
" 하하! 고생 많았어! "
난 웃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래도 나름 신혼집 분위기를 내고 싶었던 건지
어디서 구한건지 아기자기한 소품과 물건들도 눈에 보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자니 잠이 쏟아졌다. 그런 내 위로 은혜가 올라타고는 깊은 키스를 해주었다. 약간은 야릇한 자세도 문제였지만 먼저 스킨쉽을 유도하며 흥분하는 일이 없는 은혜였기에 조금은 당황되었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눈치 챘는지 점점 과감하게 스킨쉽을 행하는 시작하였고
나도 따라서 수위가 높아지는 스킨쉽으로 받아쳤으나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과감해 지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보다 강하게 키스하면서 내 몸에 밀착
시키며 마치 고양이가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슬슬 내 인내력에 한계에 도달하여 은혜를 밀쳐내다 시피 했다. 평소라면 이런 분위기를 이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은혜이지만 은혜답지 않다고 해야하는 느낌.
" 그...그만! 왜 그래? 자기답지 않게? "
" 나...? 내가 왜..?"
굉장히 야릇한 음성과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 하는 모습에 숨이 막힐 듯 한 기분
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준비를 하고 사랑을
나눴지만 잘못하다 2세라도 생기는 날에는 현재 상태로는 답도 없었다. 먹는 음식조차 온갖 인스턴트와 화학조미료가 가득한 음식이었고 간간히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도 섭취하는 상황에 태아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그야말로 최악의 몸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뒹굴고 있을 때 은혜의 몸이 내 몸 위로 떨어지는 듯 감싸 안겨왔다. 평소에 은혜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하는 모습에 의구심이 들었다.
' 응?? '
몸에서 미약하게 풍기는 알코올의 향을 맡았다. 저녁을 평소보다 잘 차려서 먹긴
했지만 술 종류는 먹지 않았다. 음식이 잘못됐다면 먹은 사람 모두 잘못되어야
정상인데 현재는 그런 인원이 없었다.
" 코..올..."
내 위에서 잠이든 은혜를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눕혀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흠. 아까 미란이랑.."
저녁식사 후 다들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난 기태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펜션에서 가져온 맥주 한 병씩을 나눠먹었다. 몸에 알코올이 들어가면
잠이라도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 몰래 마셨는데 생각해보니 우리가 몰래 마실 수
있다면 다른 인원들도 몰래 마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난 아랫방에서 지내는
재효네 방으로 내려갔다.
" 똑똑...자니? "
" 응?? 아니 형! 무슨일이야? "
" 미란이 있니?
" 응?? 응... 갑자기 미란이는 왜...? "
내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재효가 약간은 당황하듯 말했다.
" 은혜...상태가 조금 의심스러워서..."
" 응?? 하...하...."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 난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 술...마셨지 너희들..? "
" 응..... 조금...아주 조금!! "
어차피 거짓말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솔직히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듯 했다. 도대체 이 녀석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건지. 물론 나도 술을 마시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을 자기 위함이었고 취할 정도가 아닌 가볍게 한 병을 마신 상황이었다. 저들은 내가 맥주를 마신줄 모르니 다행이긴 했지만 양심의 가책은 피하기는 어려웠다.
" 후...그래서 얼마나 마셨는데..?"
" 맥주..4병..."
" 앵??? 맥주 4병?? "
소주도 아니고 양주도 아니고 고작 맥주4병? 500ml 4병이라고 해봐야 2000ml
인데 3명이서 나눠먹어봐야 얼마나 먹는다고...
" 미란이는?? "
평소 술을 어느 정도 하는 미란이라서 상태를 물어봤다.
" 잠들었어.."
" 은혜야 그렇다고 하지만 미란이나 너나 맥주 4병에 취할 수준은 아닌데?
솔직히 말해..뭘 마신거야? "
" 조금 독한 맥주인데..아마도 둘 다 맥주를 못하는 체질이다 보니 금방
취한 듯 해. 그리고 술 마신지 꽤 되서 몸에서 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고.."
" 에햐...마시고 싶은 건 이해한다만... 그래.. 이제 와서 화내봐야 무슨 소용이니
너도 어서 쉬어라... 낼 이야기 하자.."
" 미안해 형.."
" 미안 할게 뭐가 있니.. 솔직히 나도 안마신건 아닌데.. 취할 정도는 좋지 않지.
앞으로는 조심해서 마셔. 혹시나 마시고 싶다면 나도 같이 마시고.. "
" 응...."
" 형 간다. 푹 쉬고 내일 보자."
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재효를 뒤로 한 채 공동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일찍 일을 마쳐서 인지 날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담배를 한 대 피기 시작했다. 이제 세 갑도 채 남지 않아 최대한 아껴서 피거나
끊어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잘 해오던 아이들이라 안심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한창 피 끓는 20대 초반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으며 난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일어난 은혜는 내 얼굴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마도 아예 필름이
끊어진 모양은 아닌지 계속해서 쭈뼛거리며 행동했고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은혜야! "
" 네??!! 네...."
" 이리로 와봐.."
난 반쯤 누워 침대머리에 상체를 기대고는 왼손 바닥으로 침대 메트리스를
치며 말했다.
" 네..."
마지못해 오는듯한 모습에 약간은 웃음이 났다. 나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하는지 고개를 숙인 체 다가왔다.
" 아침부터 왜 그렇게 안절부절 하고 내 눈치는 왜 그렇게 봐..? "
" 아...아니..."
" 어제 일이 기억에 남아 있나봐? "
" ........."
내 물음에 대답이 없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맞는 듯 했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없다면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난 살짝 웃으며 말했다.
"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말없이 술을 마신 것은 잘못이지만 크게 문제 일으킨
것도 아니고 실수를 한 것도 아니잖아? "
" 네...하지만....내가 그런..행동을... 오빠가 이상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도
들고 창피하기도 하고.."
" 걱정마.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어. 다만 술이
취했다는게 문제였지만. 그래도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어! 은혜의 다른 모습
이랄까...? 하하!! "
" 오..오빠!! "
" 걱정하지마.. 그런 일로 뭘 그렇게 걱정해. 아니면..요새 좀...? "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이내 기분이 풀린 듯 했지만 다시 버럭 화를 냈다
"아니라고요!!! "
" 그래! 그래! 알았어!! 그만!! "
내 옆구리를 꼬집으며 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도 내가 크게 신경 쓰
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인지 표정은 한결 밝아진 모습이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발코니 창문으로 보이는 바다를 감상했다. 은혜는 내 품에 꼭 안긴 채
내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둘만 있을 때 행하는 애정표현 중 하나였다. 나도
은혜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나는 바다를, 은혜는
나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이 들었다.
딱히 할 일을 정해주지 않아 다들 방에 머물거나 테라스에 나와 주위를
살피는 행동들만 했다. 탁 트인 시야는 감염체의 발견에 유리했고 외부로
통하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어 만약의 사태에 다시 피난을 간다고 해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구조였다. 주도로가 아닌 이면도로 근처인 숙소는
식량이나 물품을 구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위치였지만 감염체의 방어에는
효과적인 위치였다. 나는 기태가 묵고 있는 방을 찾아 거리는 있지만 시내로
가봐서 물품을 구하러 가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고민을 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생필품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많은 인원보다는
SUV를 이용해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을 택하였다. 혹시 감염체를 만나다고 해도
기동력만 받쳐준다면 어렵지 않게 피해갈수 있을테니까. 우선 소수만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픽업트럭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나와 기태 그리고 지원자 2명을 받아 움직였다. 처음부터 멀리 나가는 것 보다 근처 마을을 뒤져 보기로 했다. 지도상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크지 않은 마을 몇 개와 항과 휴양지가 있었다. 지도가 정확한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위치를 파악한 후 움직 이는게 좋았다.
" 우선 마을 쪽으로 가보자. 그래도 사람 사는 동네이니 최소한 슈퍼나 잡화상
이라도 있겠지. "
" 그래.. 우선 식량이라도 조금 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
아직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10분 정도 걸려 조그만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생각한 대로 작은 편이었으나 주위에 해수욕장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많은 가게들이 분포되어있었다. 하지만 마을 크기가 작다보니 조그만 슈퍼와
구멍가게 2군데와 닭 집과 정육점등은 1곳만 있었다. 민박과 모텔이 몇 개 보였
지만 규모도 크지 않았다.
" 생각한 데로 크지는 않구나.. "
" 그래도 이정도가 어디랍니까? "
" 하긴...그런데 마을이 정말 깔끔하다. 감염체가 온 적도 없나봐... 약탈이나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조차 없어. 눈이 내린 상태로 얼어버린 모습은 보니
확실한 듯 한데? "
정말 이상하리 만큼 손상이 없었다. 물론 해수욕장위치로는 좋지 않은 곳이긴
했다. 조금만 더 위로 가거나 아래로 내려가면 더 큰 해변과 숙박시설이 많이
밀집되어 있어 굳이 고속도로 출구에서 먼 이곳을 찾아오기란 꽤나 귀찮을 듯
했다. 최대한 조용히 크지 않은 마을을 둘러 본 뒤 우선 슈퍼 앞에 주차를 했다.
크기라고 해봐야 서울 SSM(기업형 슈퍼마켓) 정도 크기였다.
" 우선 총은 김 상병만 들도록 하자. 나머지는 칼이나 찌를 수 있는 무기로 상대
하자. 괜히 소리 냈다간 주변 감염체들이 몰려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움직이자. "
" 네! "
" 내가 먼저 갈게. "
난 허리춤에서 정글도를 꺼내어 잡고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단층으로
이뤄진 슈퍼는 밖의 빛이 안에까지 비춰져서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내부는
문이 닫혀 있던 기간이 길었다는 걸 증명하듯 먼지가 쌓여있는 모습이었지만
생각보다 아니 먼지만 아니라면 당장 문을 열어서 장사라도 할 수 있는 상태
였다. 감염체 사태 이후 아무도 안다녀 갔다는 건 그렇다 치고 마을 주민조차
집에 있는 물건만 가지고 피난을 갔다는 것도 이상했다.
" 말도 안 되는데.... 아무리 인구가 적은 마을 이지만....무언가 이상해.."
" 지금 그걸 따질 시간이 어디 있어! 어서 담자! "
기태와 병사 두 명은 빠르게 물건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아마도 감염체가
이곳에는 없다는 확신이 들은 듯 긴장이 풀려보였다. 물론 나조차 긴장이
풀리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