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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대령의 방에는 몇 명만 모여 있었고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말없이 앉아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을 보니 꽤나 큰 일이 있는 듯 싶었다.
" 왔군. 앉게나."
" 네. 무슨..?"
" 흠. 우리가 앞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이탈한 인원들이 있었네."
" 무서워서 도망간 건가요? 아니면 우리가 밀릴 거라 생각해서 도망간 건가요?"
" 뭐 둘 다 아니겠는가? 가면서 우리가 가져온 탄약을 가져갔고 식량도 챙겨간
모양이야. 인원은 현재 파악된 인원만 5명 가량인데..."
" 도망간 인원은 도망간 인원이고 다른 일이 있나요?"
" 아니. 우선 우리는 이탈한 인원에 대해서.."
" 뭔 상관이죠?"
" 네??"
내 말에 다들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이미 흘러서 증발해 버린 물에 대한 것을 논의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인데 뭘 저리 심각하게 앉아있나 했다.
" 이미 떠난 인원이지 않나요? 다시 잡아올 생각인가요?"
" 아니..그건 아니지만 앞으로의.."
" 앞으로 누군가 죽고 누군가는 또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겠지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불안한 마음과 불확실한 상황에서 떠날 사람은 떠나야지요."
" 하긴.."
" 앞으로 이탈하는 인원을 막고 저희가 더 단압해서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방법을
찾아야지요.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라니요?"
내 말에 수긍하는 인원도 있었지만 반대하는 인원도 있었다. 떠난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라도 느끼는 것인가?
" 괜히 마음 맞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봐야 좋을 것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을
가중시키는 꼴이 될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인원에 연연하시는 겁니까?
차라리 소수 정예가 지금 상황에서는 더 생존확률을 높이는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떠날 사람은 언젠가 떠나기 마련입니다. 차라리 아무런
피해도 안주고 떠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맞는 말이군. 한정된 식량과 무기로 다수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그리고 지금은
멀쩡했던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
" 하지만 대령님 이런 상황에서 인원수가 많아야 유리한 점도 있습니다. 우선
숫자라도 많아야 유리한 것입니다."
" 이순신 장군님은 숫자가 많아서 전투에서 승리했던가요? 양보다 질적으로
우세한 것이 좋습니다."
" 중국이 왜 빠르게 강대국이 되었습니까? 우선 자국민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기에 가능했습니다! "
" 저기.. 지금 삼천포로 빠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정확이 모인 의도가 뭡니까?"
다들 언쟁이 격해지는 조짐이 보여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흐름을 끊어버렸다.
다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평범한 논리가 적용되는 사회가 아니었다.
" 우선 떠난 사람들은 부담 없이 떠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 네?! 그게 무슨?"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합니다. 저도 여기까지 오면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겪어봤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은 그냥 떠날 사람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우리 일행이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다들 내말에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일차적으로 떠난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이나 떠날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떠나게 두는 것이 좋았지만 문제는 뒤탈이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 다른 생존자무리에 섞여 우리를 공격이라도 한다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다. 예전 펜션에서의 상황이 되풀이 된다면 지금은 이길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 혹시 모르니 저희가 가지고 있는 무기의 양과 감시카메라 위치 등 중요한
내용은 몇 명만 알고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식량의
양도 실제로 보유한 양보다 적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게 해서 만에 하나
역으로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 해야겠습니다."
" 흠.. 김 중사 말이 맞군. 나가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괜히 우리의 정보를
적에게 주는 상황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어.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하는데
적은 우리를 알지만 우리는 적을 모르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 현재 대부분의 인원들은 감시카메라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니 이제부터는
최대한 방재실의 출입을 자재시키고 탄약과 무기도 잘 보관하도록 하게,
그리고 재원군 자꾸 이런 회의에 빠지려고 하지 말게나.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네. 마치 약한 척 행동하는 모습은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네."
" 네.."
내가 계속해서 빠지는 모습을 보였더니 대령이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물론 이들을 도와 생활하고는 있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태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인원들을 통솔하는 모습을 보였고 재효도 기태를 따라 움직였다. 상황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변화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우리는 처음과 다르게 순조롭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물론 인원이 빠질 수 있다는 상황이 싫은 사람도 있었지만 딱히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간다는 사람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앞으로 여기 있는 인원으로만 방재실 근무를 하기로 했고 나머지 인원들이 외부 경계근무를 하기로 했다. 여기 있는 인원이라고 나갈 인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까지는 나가려는 인원이 없었기에 신뢰를 바탕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약간의 휴식을 가진 인원들이 하나둘씩 나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챙겨온 탄약과 무기를 나눠서 보관했고 여자들은 나와서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나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건지 평소 보이던 인원들 몇 명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번 전투로 빠져나간 인원은 생각보다 많은 듯 했다. 하지만 다들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인지 밝은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번의 큰 전투였지만 살아남았다. 다들 살아남은 것에 안도했고 또 다시 살아남기 위해 움직여야만 했다.
" 자자!! 어서들 움직이자고!! "
" 여기 누가 망치 좀!! "
" 철조망은 도로 입구에 설치하도록 하죠! "
남자들은 이번 전투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 부비트랩을 만들어갔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철조망이었다. 길게 이어진 철조망은 감염체들의 이동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렸고 지능이 거의 없는 감염체들은 철조망에 뒤엉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덕분에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감염체들도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우리는 가능한 많은 양의 철조망을 구해와 설치하기로 했고 나는 메인도로에서 타고 남은 감염체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검게 그을린 시체와 조각조작 나있는 신체부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다행이 다른 감염체들은 몰려오지 않았지만 정확한 습성을 알 수 없었기에 최대한 조심해야했다.
한참을 이어진 작업은 저녁 늦게 되어서 마무리가 되었다. 해가 지기 전에 보유한 락스를 도로에 살포했고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만 하루를 넘게 거의 깨어있었으니 다들 피로감이 극심했고 긴장상태에서 일을 하다 보니 체력소모는 엄청났다.
" 정말 힘들다."
" 하아.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들 것 같은데."
" 배고파."
" 담배가 절실히 생각나네."
" 다들 이제 쉴 수 있으니까 기운내고 어서 들어가자."
피곤에 찌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위로를 하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근무에 배정된 인원만이 건물 외벽을 점검했다. 아쉽게도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나는 근무 조에 편성되었기에 준비를 해야만 했고 소총을 들고 교대를 하기 위해 교대 장소로 나갔다. 약속시간에 맞춰 담장을 살피던 인원2명이 돌아왔고 나와 재효는 간략한 인수인계후 주변을 돌며 근무를 섰다. 근무라고 해봐야 혹시 벽이 부실하지는 않은가 주변에 감염체들의 소리가 들리는 정도가 전부였다. 건물 옥상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내려오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전부였다.
" 지겹다. 솔직히 이 튼튼한 콘크리트 벽이 무너질 일도 없는데."
" 만약을 대비하자는 행동이지. 옥상에서 주변을 살피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만.."
" 하암. 졸려."
" 이제 몇 분만 참으면 교대시간이야. 정신 차려."
" 하암."
재효가 졸린 듯 연신 하품을 했고 덩달아 나도 계속해서 하품이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요 근래 미란이를 자주 본적이 없어 재효에게 미란이 이야기를 했다.
" 요새 미란이가 잘 안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
" 어? 그게.."
" 싸웠어?"
" 응. 요새 자주 다투기는 했어. 미란이가 약간 응석부리는 면이 있잖아?
예전에는 그런 행동이 귀여웠는데 지금 상황에서 자꾸 그러니까."
" 그래도 네가 잘 보듬어 줘야지. 이 상황에서 너 말고 누구에게 의지하냐?"
" 하아. 알아. 하지만.."
" 하지만은 무슨! 이길 생각하지 말고! 둘 다 한 성격하는 것은 알지만 생각해봐
둘이 잘못해서 헤어지면? 어쩌려고?"
" 끄응."
" 가서 잘 이야기하고 미란이도 응석부리는 것은 있지만 그래도 생각이 깊은
아이라는 것은 네가 더 잘 알 것 아냐? 당장 의지할 사람은 너 하나인데
응석부린다고 짜증내면서 같이 맞불로 나가지 말고! 자꾸 붙어봐야 매번 네가
지는 것 뻔히 알면서 왜 그렇게 툴툴대니. 네 성격 죽이고 잘 들어주고
보듬어줘."
" 알았어. 미란이 말로는 은혜가 징징 거리는건 더 심하다고 했는데 형은 별 문제
없나봐?“
“ 나라고 문제없겠니. 단지 내가 다 그냥 넘어가고 눈감아 주는 거지.”
“ 형도 대단하다.”
“ 후.. 넌 모른다.”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고 내 말의 의미를 아는 듯 가볍게 웃어넘기는 재효였다.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하나 피며 잠을 쫓고 있을 때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꽤 거리가 있는 건물인 듯 했지만 큰 불이 났는지 점점 불길이 치솟는 모습이 여기까지 보였다. 소수의 생존자들이 있다가 감염체의 공격을 받아서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일어난 불이 점점 커지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생존자입장에서는 제발 후자이길 의망했다.
한동안 지켜보았지만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은 없었다. 어느덧 후번 근무자와 교대를 할 시간이 다가왔고 교대장소로 내려가 이미 도착한 후번 근무자에게
화재의 현장에 대하여 인수인계를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 이제 왔어요?”
“ 응? 안자고 있었어?”
방안에는 은혜가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는 은혜가 보였다.
“ 뭘 그렇게 보고 있었어?”
“ 아. 자기가 저장했던 자료들을 보고 있었어요.”
“ 그래? 꽤 양이 많을텐데? 대부분이 겹치는 내용도 많고. 생각보다 좋은 정보는
없었는데.“
“ 네. 양을 엄청난데 생각보다 중복되는 자료가 많네요. 그래도 혹시나 하고
하나씩 읽어보고 있었어요.“
“ 잘했네요.”
난 탁자에 놓인 물을 마시며 말했다. 전력을 아끼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전기 사용을 자제하기로 했기 때문에 물은 상당히 미지근했다. 한 겨울에도 찬물을 마시는 내 성격상 이런 미지근한 물은 내 갈증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한 컵을 더 따라 물을 마시려는데 은혜가 말을 이어갔다.
“ 동영상도 많이 있던데요?”
“ 응? 자료 중에 동영상이 많이 있었나? 대부분이 문서 파일인데? 있어봐야
열 개 남짓 인데?“
“ 다른 폴더에 있는..”
“ 쿨럭! 쿨럭!”
난 물을 마시다 사례에 걸려 몇 번이나 기침을 했다. 은혜가 본 폴더는 설마?
“ 하..하...”
“ 정말 잘도 숨겨놨네요? 마치 드라마 파일처럼 이름까지 바꿔서 놨네요? ”
젠장. 도대체 어떻게 알았던 것인지 평소 즐겨보던 미드 마지막 편 이후로 파일명을 설정해놔서 미드를 보지 않는 은혜가 절대 봤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 솔직히 다른 파일보다 월등히 크지 않았다면 몰랐을 텐데요.”
“ 봤...어?”
“ 네.”
“ 하.. 미안..”
“ 미안할게 뭐가 있어요. 저 만나고 받은 것도 아니고 원래 받았던 것 같던데.
남자들이라면 그럴 수 있죠.“
저 반응 도대체 화를 내는 건지 정말 별 것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정말 화를 내던지 그냥 정말 쿨한 반응을 보이던지 긴가민가한 저런 반응은 나를 정말 더 미치게 만들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내가 쿨하게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하긴. 오래전에 받았던 것 같은데 기억도 안 나네.”
“ 솔직히 오빠가 이런 것을 볼 줄은 몰랐는데요?”
“ 이미 걸린 상황에서 핑계를 말하는 것 같아서 별 말은 못하겠네. 남자들이
그런 동영상 안 봤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 칫. 차라리 핑계를 말하지. 그런 반응은 날 더 허무하게 만드네?”
“ 뭐. 자기가 생각보다 굉장히 야한 속옷을 좋아하는 거랑 비슷한거지?”
“ 어째서 그런 거랑 비교하는데요?! ”
“ 하하!”
오히려 앙칼지게 말하는 은혜가 더 당황한 듯 했다. 챙겨온 옷들이 부족해 마트나 매장에서 옷을 챙겨올 때 속옷을 고른 것들을 보면 굉장히 화려하고 내 입장에서 봤을 때 상당히 야한 속옷들이 꽤 있었다. 깔끔한 속옷을 선호할 줄 알았던 내 생각과는 달라 처음에는 당황한 적도 있었다.
“ 뭐. 나도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부끄러워하기에는 나이도 있고”
“ 굉장히 당당한데요?”
“ 풋. 뭐 그렇다고. 나 씻고 올게요.”
난 가볍게 웃어 넘기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반응이 약해서.
씻고 나오니 은혜도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미 눈은 반쯤 감겨
매우 졸려하는 모습이었지만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줬다. 처음의 약간 철없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우리들을 도와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 왜 그런 아빠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 응? 아..아니.. 자기가 그렇게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귀여워서.”
“ 흥! 오늘은 그냥 자요!”
내 말 뜻을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한 은혜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말했고 난 그 옆으로 들어가 옆으로 누워있는 은혜의 등 뒤에서 팔을 벌려 껴안았다. 말은 저런 식으로 했어도 내 행동에 거부감 없이 안겨왔다. 은혜는 따뜻하지만 차가운 살결을 느끼며 피곤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