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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낮에는 다른 인원들이 주변을 수색하러 나갔고 나는 하루 종일 은혜를 도와 식사준비와 식품 정리를 했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저녁을 먹고 근무를 선후
방으로 내려오니 은혜는 이미 잠이 들어있었다.
" 핑크야. 아빠 나갔다 올게. 여기 가만히 있어."
난 핑크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먹고 남은 음식을 던져주고는 카라반으로 달려갔다. 낮에 깔끔하게 정리한 바닥에는 발자국이 없었다. 오늘은 아직까지는 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내 의도를 알아버린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난 소리가 나지 않게 카라반 안으로 들어갔고 메인 침실에 누워 한 동안 멍하게 있었다.
" 응??"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어느새 해가 떴는지 아침이 밝아왔다.
" 오늘은 안 왔네."
난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연수원 침대보다 편했기에 몸은 한결 가벼웠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괜한 짓을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내 카라반을 외도의 공간으로 이용한다는 것이 불쾌했다. 난 방으로 들어갔고 방에는 이미 일어난 은혜가 무서운 눈으로 날 째려보며 말했다.
" 어제 어디서 잤어요?"
" 응?? 카라반."
" 왜 멀쩡한 방 놔두고 거기서 자요?"
눈을 보니 뭔가 의심을 하는 표정이었고 나는 사실대로 내가 하려는 행동을 은혜에게 말해주었다.
" 그래서?"
" 물론 남의 연예사이긴 하지만 내 카라반이 그런 식으로 쓰인 것은 별로 좋은
기분은 아냐."
" 하지만 그래도 남의 연예사에 관여하지 않는 다고 한 것은 오빠인데 그런
식으로 마주하려 한다는 것은 좋은 판단은 아닌데요?"
" 그럼 어째?"
" 차라리 현장을 덮치는 게.."
" 그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 그런가?"
" 그럼 며칠 지켜보고 판단하자. 우선 상대방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 난 누군지 알 것 같은데?"
" 응?"
의외였다. 이미 은혜는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말투로 이야기 했다.
" 아마도 민희 언니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요."
" 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어?"
" 원래 여자들끼리는 말이 많은 법이니까요."
" 흠."
" 그냥 요새 느껴지는 것도 있고 여기서 민희 언니 소문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더라고요. 여우같은 이미지도 있고 뭐랄까. 좀 그런게 있어요."
" 참네. 알 수가 없네."
" 뭐. 오빠가 잘 알아봐요. 저도 별로 관심 없으니까요."
" 내 카라반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기분 나쁘지만 생각해보니 괜한
오지랖이 될 수 있겠네. 그냥 그러려니 지내야겠다."
" 잘 생각했어요. 오늘은 안 나가요?"
" 아! 오늘은 다른 생존자 지역 감시가 있는데. 깜박했다."
" 어서가요! 조심히 다녀오고요!"
" 응!"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나서면서 은혜와 오랜만에 깊은 입맞춤을 했다.
나와 김 중사와 둘이만 움직이기로 했고 우리는 첫 번째로 산속에 있는 생존자들을 감시하러 갔다. 산 중턱에서 지켜보면 발각될 걱정도 없었고 전체적인 상황을 보기에 수월했기 때문이다. 물론 차량을 산 중턱까지 운전해서 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적어도 30분 이상 등산을 해야 했지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 생각보다 평화롭네."
" 그러게. 다들 무기보다 농기구를 들고 있는 것 같은데?"
" 우리가 생각했던 상황이 아닌데."
" 그냥 우리를 견제하는 건가?"
" 애들도 생각보다 꽤 많은데? 힘들겠다."
" 인원도 우리보다 많은 상황인데 식량이나 물품 구하는 것도 힘들 텐데?"
" 인원이 많으면 그 만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 분열의 확률도 동시에 높아지지."
" 넌 보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소수의 인원을 선호하는 것 같아.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는 가능한 많은 인원이 뭉쳐서 살기를 원하지 않나?"
"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닌가 봐. 이러나저러나 난 인원이 많은 것은 질색이야.
그 만큼 잡음도 많고 전부다 신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차라리 소수의
인원으로 생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 틀린 말은 아니지만."
" 저기 봐. 차량이 몇 대 들어온다."
" 응?"
마을 입구로 보이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방어벽을 열고 들어온 트럭에서 사람들이 내려 구해온 짐들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몇 대의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내렸고 트럭에서 내리는 양은 상당했다.
" 이상하네. 이 근방에서 저렇게 많은 양을 구할 곳이 없을 텐데?"
" 우리가 모르는 곳이 있는 건가?"
" 아니라면 며칠에 걸쳐서 구해온 것일 수도 있지."
" 응??"
" 반기는 모습이 하루 이틀 못 본 상황이 아닌가봐?"
서로 격하게 껴안으며 복귀자를 반기는 모습으로 봐서는 내 생각이 맞아 보였다.
그리고 저 정도 양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곳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하루 만에 구할 수 있는 양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생존자들에게서 약탈해 왔다고 생각하기에도 조금 무리가 있었다. 김 중사와 나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로는 의외로 평온한 무리였다. 어린 아이들도 큰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아는지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고 사람들도 경작을 하려는지 땅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 다음 목적지로 가볼까?"
" 응."
얼마 후 도착한 콘도텔 근처에서 우리는 예전에 봐두었던 건물에 들어갔다. 거리는 좀 되는 편이지만 콘도텔이 정면으로 보였고 저 쪽에서는 우리위치가 제대로 보이기 힘든 위치였기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 굉장히 폐쇄적이네?"
" 응. 안에서만 생활하는 건가?"
" 애들이라고는 지금 건물 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전부인가?"
" 들고 있는 무기가 설마 소총인가?"
" 응.."
"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콘도텔은 놀고 있는 아이와 그 옆에 보호자로 보이는 여자 한명이 아니라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와서 아이를 보는 여자의 행동은 불안한 듯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었다. 가끔씩 보이는 경계근무자로 보이는 인원들도 옥상에서 주변을 몇 번 둘러만 볼뿐 별다른 행위는 하지 않았다.
" 생각해보면 우리가 전에 갔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없었어. 그래도 또 다른 생존자인데 관심도 없는 건가? "
" 지금은 섣불리 결정할 상황은 아니니 지켜보자. 아무래도 두 군데 모두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 우리가 생각했던 생활과는 정반대로 생활하고 있는 두 집단이네."
우리는 오히려 반대적인 생활을 예상했다. 콘도텔 인원들이 오히려 자유롭고 산속 인원들이 위치상 더 폐쇄적인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눈으로 본 상황은 달랐다. 눈으로 본 상황만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유추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듯 했다.
돌아온 연수원은 한바탕 난리가 나있었다. 근무를 서던 인원들이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인원을 발견했고 곧바로 그들을 추적하려 인원 몇 명이 나간 상황이었다.
" 발견된 인원은 현재까지 2명이며 우선 추격조를 파견했고 주변에 있을지
모르는 인원에 대비해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인원 전부가 주변을 살피고 있
습니다. 그리고 비전투원들은 각자의 방에서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 까지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 ATV를 가지고 온 상황으로 보입니다. 현재 저희는 그런 소형 차량이 없기에
추적이 힘들 것입니다."
" 아니! 도대체 지금까지 근무를 제대로 했던 것이 맞습니까? 이 정도
거리까지 접근할 때까지 저희가 몰랐다니요!?"
" 솔직히 저희 위치는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도
외부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나무와 풀들이
제대로 자라지 않은 상황이니 큰 문제는 없지만 여름이 다가오면 상황은
오히려 나빠지겠지요."
" 추적조가 복귀했습니다만 추적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 예상했던 결과군."
" 흠. 예상했던 일이 생각보다 늦게 터졌네."
" 뭐. 이전에도 왔었는데 이제야 본 상황일 수도 있지."
" 굉장히 여유롭다? 걱정도 안한다?"
" 응? 솔직히 우리 위치는 요새에 버금가는 상황인데. 건물 자체도 두껍고 외부
벽도 상당히 높은 편이고 철조망까지 설치되어 있는 상황이잖아? 적어도
박격포나 대전차 로켓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면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고 내가 봤을 때는 그냥 우리처럼 상황을 알기 위해 온 것으로 예상돼.
아무리 근처까지 다가왔다고 해도 제대로 본 것도 없을 텐데 뭘."
" 설치한 부비트랩을 다 피한 건가?"
" 부비트랩은 감염체를 상대하기 위해 설치했지 인간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 아니잖아. 위치상 저들이 정문으로 왔을 리도 없고 봤다 해도 솔직히
군대만 다녀왔다면 쉽게 해체가 가능할 정도로 허술하게 만들었는데. 걱정해야
할 것은 그게 아니고 해체해서 가져간 상황이 더 무서운 거야."
" 문 하사! 부비트랩 상태는?!"
" 멀쩡합니다. 재원씨 예상대로 수풀 쪽으로 돌아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 인원을 추려서 부비트랩을 다시 설치하도록 하고 이제는 다른 인간들도 상대한
다고 생각하고 설치해!"
" 알겠습니다!"
" 아니. 차라리 해체하는 편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 무슨 말씀인가요?"
" 이미 저들은 우리가 부비트랩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간단한 구조인 트랩은 솔직히 해체도 쉽기 때문에 저들이 해체해서 가져가
버린다면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감염체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우리
시야에 보이는 정문에 설치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맞군. 재원군 말이 일리가 있어. 그러니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것들은 해체해서 가져오도록 하게나."
" 네."
" 다른 인원들도 듣도록 이제는 감염체만 상대하는 상황이 아니다. 인간과
감염체 둘 다 상대해야하는 상황이니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 네!"
" 오늘은 모든 인원이 돌아가며 근무를 서도록 한다!"
" 네에?!!"
장교 한 명이 대령의 말이 끝나자 외쳤다. 다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나 또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 대위님 굳이 그럴 필요가.."
" 언제 또 침입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비를 해야지!"
" 소 잃고 외양간 고치십니까?"
부사관 한 명이 신경질 적으로 대답을 했다. 내 기억으로는 저 녀석이 하는 말이라고는 제대로 된 것이 없었는데 오랜 시간 같이 지낸 인원들이야 오죽할까.
솔직히 지금까지 계급체계를 유지한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 무슨 소리야!"
"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들도 발각된 것을 아는데 오늘 저녁에 또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많은 인원이 서봐야 효율성이 없다는 것은 저번
회의 때 결정 난 상황이 아닙니까?"
"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잖아!"
" 하아.."
" 하아.."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나와 대령이 동시에 한 숨을 내쉬었다.
" 그만! 다들 나가보고 둘은 남아!"
" 네."
역시나 대령이 중재를 했다. 상관을 앞에 두고 싸우는 저 둘도 대단하지만 그런 상황을 처음부터 뭐라하지 않고 지켜보며 질책하는 대령도 대단하다고 느꼈다.
우리는 대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몰려서 나갔고 다들 각자 할 일을 찾아 하는 모습이었다. 난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하나 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기에 주변을 밝은 편이었고 이제는 나무에서 초록빛깔의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 하아. 이제부터 고난의 시작인가."
봄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좋은 의미로 해석한다. 추운 겨울이 지나 생활하기 편한
날씨로 변하고 굳어졌던 몸도 움츠렸던 생명들도 다시 기지개를 펴고 활동을 시작하는 계절이지만 우리에게는 겨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다른 의미에서 보면 겨울보다 더한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추론이기는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감염체가 남쪽으로 몰려있는 상황이니 언제 다시 올라올지 몰랐고 연수원 주변이 나무와 풀들로 무성하게 변하면 시야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이 겨울보다 편하게 우리를 감시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 이지만. 내가 시야를 돌려 카라반을 내려다 본 순간 카라반에서 나온 두 명의 사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