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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어느덧 햇살아래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만큼 날씨가 변했다. 아침부터
화장실에서 오랜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정돈하였다. 오랜만에 왁스도
바르고 옷장을 열어 외출복을 찾기 시작했다.
" 오늘은...뭘 입어볼까..? "
은혜와의 데이트약속으로 한껏 들떠서는 옷을 골라잡았다. 패션 테러리스트를
능가하는 나의 코디능력은 은혜와 극과 극을 달렸다. 원래 이런 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그 흔한 브랜드 이름조차 모르던 나였지만 은혜를 만난 후 부터는
약간씩 변화가 생겼다.
" 아차! 더 있다가는 늦겠다. 어서 움직여야지! "
방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논 차키를 찾아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새벽의 낮은
온도에서 방치된 차는 높은 소음을 내며 시동이 걸렸다.
" 흠...그래도 데이트인데... SUV를 가져갈까..? "
이제 와서 다시 차 열쇠를 가져와 예열하자니 시간이 촉박했다. 우리 집에서
은혜 집까지는 못해도 30분이 걸리는데 약속시간은 정확히 30분 후였다.
" 에라...그냥 가져가자... 트럭 가져왔다고 뭐라 하겠어..나름 외제차인데..."
난 순간의 고민을 빠르게 포기한 후 빠른 속도로 은혜의 집까지 운전했다.
" 도착했어요. 내려와요! "
전화를 걸어 내가 도착함을 알리고는 내려서 담배를 하나 피기 시작하였다.
내 전화를 받고 바로 내려온 경우가 없었기에 마음 놓고 담배를 폈다. 어차피
데이트가 끝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 담배를 필수 없을 테니 한동안 니코틴
부족에 시달릴 것이다. 10여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은혜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짧은 하늘색 플레어스커트에 오버니 삭스에 킬 힐을 신고 시스룩의 셔츠를 입고 나온 모습이 마치 화보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저러면...분명 나보다 키가 커 보일 텐데....
" 응?? 왜요?? 이상해요? "
" 아..아니... 너무 예뻐서!!! 가자!! "
" 치..."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었지만 싫지 않은 듯 보였다. 짧은 치마로
인해 지상고가 상당히 높은 픽업트럭에 올라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 너무 높아요. 이 차는..."
" 아... 고민하긴 했는데 늦을까봐...습관적으로 트럭을 끌고 나왔네.."
"뭐..어쩔 수 없죠.. 그래도 이차는 내부가 넓어서 좋아요!"
무식하게 큰 차량답게 보통 승용차보다 훨씬 넉넉한 내부를 자랑했다. 역시
대형픽업은 미국이 강국이지..라는 생각과 함께 파주로 출발했다.
" 우와!!! 이거 신기하다!! 오빠!! 이것 봐요!! "
" 응? 와!! 신기한데? 어떻게 있는 거지? "
아는 사람을 알법한 수도꼭지에서 물을 나오는데 연결선이 없어 공중에
뜬 형태를 하고 있는 모형물. 뭐가 그리 신기한지 수도꼭지 주위에 팔을 휘져
으면서 혹시 있을법한 선을 찾는 모양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흔히 볼수 있는 것이었지만 은혜는 처음 보든 듯 했다.
' 물속 안에 파이프가 있다고 하면 또 삐지겠지? '
내가 정할 수 있는 데이트코스는 뻔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가본 곳 위주로
계획을 잡았고 이미 한번이상 봤던 풍경들이지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신기한척
했다. 데이트코스로 유명한 곳이니 괜히 와봤다는 표현을 하면 마음 상해할게
분명했다. 한동안 구경을 한 뒤 근처 맛 집을 찾아 식사를 한 뒤 미리 예매해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이동했다. 이상할 정도로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다.
제법 날씨가 풀린 주말인데 도로에 차들이 많이 보이지도 거리에 사람들도
없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우리는 극장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근처 편의점
에서 주전부리와 마실 음료를 사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 영화라 그런지
사람들이 가득한 모습 이였고 언제나처럼 복도 쪽에 예매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 이거 괜찮아요? 무슨 내용이에요? "
" 좀비....미안.."
" 하아.... 나 무서운 것 못 보는걸 알면서..."
" 완전 좀비영화라기 보다는 그냥 괴물영화라고 생각해. 그렇게 무서운 건 아냐."
평소 무서운 드라마나 영화를 보지 못하여서 난 끝까지 내가 예매한 영화가
무엇인지 말을 안했다. 미리 말했으면 아마 취소하려 했기에...
" 이제 시작한다.."
어느덧 영화관은 어두워지면서 CF 몇 편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 응?? '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이상한 모습이다. 음료수를
마시다 흘렸는지 입에서 음료수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눈이 찌푸려졌다.
' 아씨..뭐야 이 인간...'
혹시 내 쪽으로 튈까봐 자리를 은혜 쪽으로 당겨 앉았다. 하지만 입에서 흘러
나오는 음료수는 멈추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난 화가 나서 옆 사람에게
말했다.
" 저기요..? 지금 뭐...??!!!! "
화면이 바뀌면서 영화관 내부가 밝아지기 시작하자 옆 좌석의 사람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눈동자는 붉게 변한 모습에 입에서는 음료수가 아닌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이었다.
" 무...무슨!!!! "
당황한 나는 영화관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소리쳤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보니 영화관 모든 사람이 붉게 변한 눈동자와 검붉게 변한 피부를 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난 황급히 은혜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예쁘게 화장하고
다소곳이 앉아있던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붉은 눈을 한 무서운 여자가 내 옆에
앉아있었다.
" 으아아아악!!!! "
" 헉....헉....헉..."
" 오..오빠???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숙소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급하게 일어난 나의 움직임을 느낀 듯 놀라서 일어난 은혜였다.
" 응? 아..미안..깼어? 악몽을 꿔서.."
" 땀 흘린 것 봐!! 열이 있는 건 아니죠? 괜찮죠? "
" 응.걱정마..그냥 꿈자리가 사나워서 그런 거니까.."
" 여기 물 마셔요. 오빠 요새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래요.. "
" 고마워. 미안 나 때문에 잠이 깼지? 어서 자자.."
" 아니에요. 어차피 오빠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잘 못자요."
" 응?? 내가 코를 골아? "
30년 살면서 술 많이 먹고 자는 거 외에 코골이를 한다는 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하긴 내가 자 면서 내가 코고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상했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에게 코 골고 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가끔 몸을 떨기도 하던데요? 아주 심한 건
아니고 가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요."
은혜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정말 빨리도 잠에 드는 모습이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평소처럼 우리 집에 모여드는 인원은 없었다. 별다른 일도 없고 탄약도 부족해서 나갈 수도 없으니 집에서 시간을 죽이는 일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아침부터 은혜와 함께 시간을 보내니 우리의 상황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같이 아침을 만들어 먹고 테라스에 나가 차를 마시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곳의 다른 인원들이 보면 욕을 한바가지는 할 행동이었지만 우리는 여유가 필요했고 여유가 있었다. 은혜도 즐거운지 애교도 부리며 어리광도 부리며 웃고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을 늦게 먹었기에 점심은 거르고 바닷가에 나가 산책을 했다. 물론 맨몸으로 나간 것은 아니고 간단한 무장을 하고 나갔다.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 자기랑 이렇게 걷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 그러게.. 앞으로는 시간을 자주 내야겠어."
" 풋.. 그래도 일 생기면 다시 나갈 거면서.."
" 일 생겨도 나갈 수도 없어요."
우리는 대충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봤다. 세상 상황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 바다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제법 더운 날씨였지만 나와 다르게 은혜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짧은 핫팬츠에 긴팔 셔츠 속에 받쳐 입은 나시티로 매우 시원해 보였지만 나는 긴 바지에 그냥 티를 걸친 상황이라 가뜩이나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에 더 더울 수밖에 없었다. 직사광선을 그대로 받고 그늘 하나 없는 곳에 계속해서 앉아 있다 보니 땀이 온몸에 흐르기 시작했다.
" 어서 들어가요. 자기 너무 더워한다."
" 괜찮아. 집에 가서 샤워하면 되는데. 오랜만에 나왔는데 고작 이런 이유로
돌아갈 수는 없지."
" 풋.."
매력적인 눈웃음을 보이며 웃어 보이는 은혜의 얼굴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쩌다 이런 여자와 같이 지내게 된 것인지 정말 운도 좋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만난 것이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솔직히 만날 수도 없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몇 시간을 같이 산책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카라반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꺼내어 와서 TV를 시청하고 주전부리를 챙겨 먹으며 멀쩡했던 사회에서 마치 신혼부부인 마냥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집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 누구세요?"
" 날세.."
" 어라? 대령님? 중령님도 계시고.. 이 중사님?"
문을 열고 보니 세 명의 인원이 서있었다. 대령님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있었고 다른 두 분의 표정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 우선 다른 인원들을 불러주게나."
" 알겠습니다."
나는 은혜와 함께 다른 집을 다니며 우리 집으로 불러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이 가득 찰 정도의 인원이 우리 집에 모였다.
" 다들 모인 것 같으니 이야기 하지. 우선 현재 공항의 전기는 잘해야 보름이
한계라네. 그리고 탄약. 이번에 미국에서 들어오는 항공기에는 탄약과 식량이
있다고는 했지만 많은 양이 아니라네. 공항에 머무는 인원의 30%도 배급할 수
없는 양이라네. 탄은 뭐 내 소관이니 알아서 챙겨둘 것이지만 이번이
마지막 보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네."
" 하아... 그럼 저희는 어떻게.."
"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라네. 첫째는 섬에서 자급자족을
하며 버티는 것. 물론 다리는 완전히 폐쇄하여 감염체가 올 수 있는 통로는
완전히 차단하는 것일세. 두 번째는 다른 생존 캠프로 이동하는 것이네.
하지만 차량이 부족하여 공항의 인원이 전부 이동할 수는 없다네. 그리고
셋째. 우리가 비행기를 탈취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라네. 물론 세 번째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될 것이고."
" 그 계획이 전부인 것입니까?"
" 뭐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지만 현재 우리가 하려는
계획은 이것이라네. 다른 나라의 보급은 이제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좋고
자급자족이라고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양을 수확하겠는가?"
" 흠.. 전 세 번째가 마음에 드는데요."
" 전.. 첫 번째.."
각기 다른 의견을 내며 말을 했다. 나도 솔직히 세 번째 계획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어봐야 좋을 것도 없고 어디가 같은 상황일 텐데 차라리 비행기를 탈취해서 다른 곳. 제주도나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다른 방법도 많이 있었지만 현재 대다수의 인원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감염체가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 한 곳에 정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선 먹을 식량. 농사를 해서 수확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몇 개월이 거리는 작업이다. 그리고 전투에 필요한 물자와 장비는 자급자족을 한다고 해도 많은 양을 만들 수는 없다. 많은 인원이 한 곳에 정착하고 있으니 눈치를 채고 감염체들이 몰려 올 것이고 우리는 막지 못해서 다시 이동을 하는 행위의 반복이 지속되었다. 그렇다고 소수의 인원이 언제까지나 이동을 하며 살 수도 없었다. 먹을 식량이 어디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이미 도심의 곳곳은 폐허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수많은 포탄의 흔적과 탄흔들. 거리에 널려서 썩어가는 감염체 시체들. 그 시체를 먹고 변해가는 동물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위험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쪽은 우리였던 것이다.
" 우선 세 번째 방법을 조심스럽게 진행 중에 있다네. 제주도를 가던 미국을
가던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다네."
" 하지만 당장 구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비행기도 문제이지만 조종사
가 있는 것도 아니고.."
" 그 문제는 걱정 말게나. 뭐 내가 말을 안 해도 하고 있겠지만 가능한 많은
물품을 챙겨두게나. 그리고 내일 탄을 조금 배급하겠네. 우선은 전투보다는
생존자를 찾는다는 명분 아래에 가능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구해서
오게나."
" 알겠습니다."
" 자네들 성격을 알기에 제발 감염체와의 전투는 한동안 피해달라고 당부하고
싶구만."
대령님과 중령님이 말했다. 우리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고 우선은 최대한 많은 양의 물품과 식량을 구하기로 했다. 물론 지금까지 마트에 남은 물건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제품들이 유효기간이 지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희망은 있었다. 대령님과 중령님과의 대화는 몇 분을 더 이어졌고 우리는 입단속을 철저히 하기로 약속을 하고 우선적으로 필요한 목록을 정했다. 그리고 최대한의 정보를 습득하여 현재 섬의 분위기를 알아야 했다. 우리는 아웃사이더 마냥 행동했던 팀이라 섬 분위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 중사와 석 하사가 전부였다. 박 중사 일행이 가장 오랜 시간 이곳에 있었지만 처음부터 감염체 제거에 열을 올렸던 팀이니 분위기 파악 따위는 개나 줬던 것이다. 그래도 몇 가지 소문들을 이야기 해줬지만 언제의 소문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이 중사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며 섬의 분위기가 어떤지 정확히 알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