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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사는 존재들-104화 (104/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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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얼마간 걷지 않아서 가장 먼저 지쳐버린 것은 역시 여자들이었다. 아무리 걷기 편한 운동화와 옷차림이라고 해도 무거운 가방과 내리는 빗속을 걷는 것은 잘 다듬어진 운동장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가방은 나에게 주고 그냥 맨 몸으로 걸어.”

“ 괜찮아요. 아직은 버틸 수 있어요.”

“ 앞으로를 생각해야지. 지금 당장 버틸 수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소모되는

체력이 눈덩이처럼 불어 날텐데 그때는 더 힘들어진다고.“

“ 네..”

은혜는 나에게 가방을 억지로 넘기고 걷기 시작했다. 체력이 좋아진 나는 크게 부담되는 무게는 아니었고 재효와 기태도 미란이와 보미의 가방을 받아서 메는 모습이 보였다.

“ 비라도 그친다면 좋겠는데.”

“ 가능한 빠르게 움직이도록! 속도를 높인다!”

“ 무리야! 여자들도 있다고!”

“ 지금 행군속도가 너무 느려! 자칫 잘못하면 따라잡힌다고!”

“ 누가 따라온다고 그래?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 지금 추적을 받고 있는게

아니야. 미리 움직이는 상황이지.“

“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가. 조바심이 나네.”

“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아직은 크게 위험한 상황이 아니니 가능한 체력을

아껴가며 이동하자.“

“ 그래..미안..”

“ 뭘..”

박 중사는 우리가 쫓기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조급한 마음에 계속해서 사람들의 행군 속도를 빠르게 했던 것이다. 군인 생활을 한 박 중사와 군대라고는 병장 제대가 전부인 인원들도 있었고 20대 후반인 남자들도 있는 상황에 갑작스러운 이런 행군은 누구에게나 부담이었다. 그래도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자들은 쉽게 지치지는 않았지만 여자들을 달랐다. 조급함에 빠진 박 중사를 진정시키고는 다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점점 거세지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두 시간을 더 걸어야 했고 어렵게 이동을 끝낼 수 있었다. 도착한 골프장 클럽 하우스는 굳게 잠겨 있었고 조심스럽게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다. 내부는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엄청난 양의 먼지가 쌓여 있었다.

“ 이런데서 자다가는 폐암 걸리겠다.”

“ 지금 비를 피할 곳이라도 어디야. 우선 대충이라도 정리하자.”

“ 몇 명은 밖을 경계하고 나머지 인원들은 내부를 정리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우선 쉬고 있고.“

“ 네!”

지친 표정이 역력한 여자들은 박 중사의 말이 끝나자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 그래도 있다간 체온이 떨어지면서 더 힘들어지니까.”

“ 화장실이 있으니까 저곳으로 가서 갈아입으면 되겠네.”

“ 네..”

“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비라도 피할 곳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지.”

내 말에 세 여자들은 가볍게 웃으며 갈아입을 옷을 챙겨 입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사이 우리는 잠을 잘 곳을 정리했지만 워낙 많은 인원과 넓은 공간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다들 지칠대로 지쳤기에 무거운 몸으로 둔해진 움직임이 보였기에 더 안쓰러웠다. 아직은 체력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고 옷을 갈아입고 온 여자들도 우리를 도와 정리를 시작했다. 대충 잘 정도의 정리가 끝나고 우리는 순번을 정해 근무를 정했다.

“ 위험하게 밖에서 근무하기보다 창문을 통해 밖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

“ 아직도 포성이 들리네.”

“ 중간 중간 총소리도 들리는 것이 상황이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 그래도 계속해서 공격은 하네?”

“ 아마도 이번 공격은 본부대에서 하는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저번 그 남자가 소속된 인원들이 단독적으로 하는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 군부를 장악할 만큼 힘이 커진거란 말야?”

“ 아무래도 지금 작전과 상황에 불만을 가진 인원이 많다 보니 쉽게 포섭이

가능했던 모양입니다. 이미 결속력이란 거의 없는 상황 아니었습니까? 아예

불가능했던 것도 아니지요.“

“ 하지만 공항을 장악해서 뭘 하려고 하는거지? 자급자족이 가능한가?”

“ 어렵지는 않을거라 예상됩니다. 바다를 끼고 있고 주변에 공터도 많고..”

“ 그래도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식물을 키우는게 쉬운 일인가?”

“ 공항으로 오는 보급물자를 노리고 있는 건가?”

“ 하지만 그것도 끊어지고 있는데 얻어봐야 얼마 안 되는 양입니다.”

“ 알 수가 없군.”

“ 단순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하려는 것일 수도 있어.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한 존재니까.“

“ 하아..”

“ 주변은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인원을 보내서 대령님에게 저희 위치를

알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 내가 가지.”

내가 일어서며 말했고 박 중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니. 재효랑 다른 병사가 가는 것이 좋아. 스피드는 재효가 조금 더 좋고

이곳의 위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가능한 손실을 줄여야해.“

“ 흠..”

“ 다녀올게요.”

“ 조심해서 다녀오고. 장비는 잘 챙겨가.”

“ 걱정마. 갔다 올게.”

재효는 병사 한 명과 장비를 챙기고는 거세게 내리는 빗속을 향해서 은밀히 움직이며 이동했다. 난 재효가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바라봤고 그런 내 모습을 본 미란이가 말했다.

“ 뭔, 자식 보내는 것 마냥 바라봐?”

“ 넌 네 남자친구인데 걱정도 안 되냐?”

“ 걱정할 실력이 아니니 걱정을 안 하는 거야. 오빠는 나보다 재효 오빠 실력을

잘 알면서 뭘 그리 걱정해. 이런 곳에서 감염체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본부대는 반란으로 정신이 없을텐데 크게 걱정 하지 않아도 돼.“

“ 하하. 네가 나보다 더 느긋한데?”

“ 누가 그랬지. 바쁠수록 여유를 가지라고.”

“ 하하! 그래 그래!”

난 미란이의 등을 두드리며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촛불을 켜놓고 다들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몇 몇 일행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뭔가를 먹고 있는 인원도 보였고 잠을 자는 인원도 보였다. 비교적 편하게 쉬게 하려는 모양인지 박 중사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난 밖이 가장 잘 보이는 창문으로 가서 외부를 둘러봤다. 간헐적으로 날아가는 미사일과 포를 보고는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대령님의 계획은 실현가능성이 낮았다. 억지로 이륙하려다 괜히 로켓포라도 맞으면 말짱 헛일이다.

“ 빌어먹을. 시간이 좀 걸리겠는걸..”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바라보니 박 중사가 나를 보며 담배를 하나 권하고 있었다.

“ 어디서 났어?”

“ 이곳 편의점에 있더라. 그래도 꽤 온전한 편이라 먹을 것도 있고..”

“ 남은 게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 시간이 꽤 흘렀는데?”

“ 이곳은 처음부터 약탈이나 그런 행위가 없었고 골프장 안에 마련된 편의점이니

많은 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겠지. 초반부터 이곳의 치안은 잘 유지

된 편이라.“

“ 우리에게는 다행이네.”

“ 다들 뭐라도 먹고 있으니 너도 가서 먹어.”

“ 지금은 크게 생각이 없네.”

“ 그래도 조금은 먹어두는 것이 좋아.”

“ 응..”

난 박 중사가 주는 담배를 피고 말을 했다. 굳이 내가 찾아 먹지 않아도 은혜가 내 몫을 챙겨뒀을 것이라 생각되었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내 위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라면 한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 어떻게 알았어?”

“ 뭐..느낌으로요.”

“ 뭘 이런 걸 챙겨와. 자기는 먹었어?”

“ 전 먹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생각도 별로 없고요. 자기 먹어요.”

“ 고마워!”

난 은혜가 챙겨온 라면을 먹으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우리 도망다닌지 반년이 넘었지?”

“ 네. 가을부터 감염체가 나타나서 세상이 엉망이 됐으니까요.”

“ 흠... 그럼... 이 라면...

“ 네??”

“ 유통기한이 엄청 지났겠군!”

“ 아!! 생각해보니..”

“ 그런데도 맛은 먹을만 한데?”

“ 생각도 못했는데..”

“ 유통기한이 긴 제품은 많지 않아. 특히나 라면은 더군다나..”

“ 그냥 먹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낫지요!”

“ 네!”

난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뭐 지금까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수두룩하게 먹었지만 별 탈은 없었으니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몇 젓가락 먹자 라면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고 빈 그릇을 은혜에게 건내주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는 총소리가 제법 많이 들렸다. 반란을 꾀하는 무리에 대항하는 본부대 인원이 쏘는 총소리라 생각되었고 반란군은 압도적으로 공항을 접수할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시간이 걸리는 모습이었다.

“ 시간이 걸리나 보네. 우리에게는 좋은 상황인가?”

“ 응.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아무래도 공중 감시는 힘들 것 같은데?”

“ 하루 만에 점령하기는 힘들겠군.”

“ 그렇지. 아무래도 인원이 많으니 반란군에 소속되는 인원보다 남은 인원도

많을 것이고 중립을 지키는 인원도 많을 것이고..“

“ 재효가 뭘 못먹어서 걱정이 되는데.”

“ 미리 빼놨으니 걱정마.”

“ 고마워.”

“ 경계인원이 있으니 너도 쉬는 게 어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찾을 시간도

없을걸?”

“ 응.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찾으러 할거야.”

“ 왜 그렇게 생각해?”

“ 우리가 가진 힘이 크다고 느끼게 한 것이 실수였지. 만약 반란군이 본부대를

장악한다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무리가 우릴테고. 괜히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것이 후회되는데.“

“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지. 반란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고.“

“ 이 빌어먹을 비만 그쳐도 좋으련만..”

“ 그래도 우리를 지켜주는 비야.”

“ 하아..”

“ 체력을 보충해둬. 아무리 너라도 힘들 것 같으니.”

“ 응..”

난 박 중사의 말을 듣고 일행이 자리를 잡은 곳으로 돌아갔다. 이미 사람들은 대부분 잠을 청하는 모습이었고 여자애들도 자리를 잡고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에 미란이는 잠을 자지 않고 재효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미란이에게 다가가 말을 하려고 하자 재효가 대령님에게 우리 위치를 말해주고 돌아왔다.

“ 수고했어! 별 일은 없었고?”

“ 응! 반란군 인원이 꽤 많은가봐. 본부대까지는 밀고 들어가지 못했는데 근처에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 대령님의 말씀으로는 본부대에

우선 항복을 하라고 권했고 24시간의 시간을 줬다던데?“

“ 흠.. 그럼 우리에게도 24시간의 여유가 생긴건가?”

“ 대령님은 그 전에 우리가 떠났으면 한데. 반란군의 계획이고 뭐고 지금 공항의

상황은 좋지 않은 모양이야. 그리고...“

“ 그리고..?”

재효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한번 끊고는 말을 이어갔다.

“ 남은 다리...에서 변종 감염체가 조금 전부터 공격을 해왔고 공격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미 절반가까이 뚫고 들어왔어.“

“ 뭐?!!”

“ 그럼 지금 공격은?!”

“ 도심을 공격하는 것도 있지만 우선 남은 다리 한 곳을 끊을 생각인 것 같다고

하셨어. 대령님은 공격 작전에 큰 권한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모르시고.“

“ 엉망진창이군.”

“ 명령도 제대로 하달이 안 되는 모습이 많은 것 같아요. 대령님도 빠른 시간

안에 저희에게 연락을 주신다고 했고 가능한 이곳에서 지내고 다른 인원이

눈치 못채게 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대충 보니 반란군과 본부대. 그리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인원들로 지금

삼파전양상인데?“

“ 와우...”

“ 도대체 뭘 위한 반란인건지..”

“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겠지.”

“ 뭘까.. 그냥 권력을 얻기 위한 행동인지..아니면 정말 감염체의 제거를

위해서만 행동하기 위한 반란인지..“

그들의 계획을 알 수 없는 것도 답답했고 우리의 탈출도 불투명한 상황이라 더 답답하였다. 지금 우리의 희망은 대령님 뿐이었기에 우선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냥 믿고 있다 상황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한 작전도 있어야했다.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근무를 서고 있는 김 중사에게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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