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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해가 뜨자마자 기온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국 날씨와 다르게 습한 느낌은 덜했지만 그래도 더운 것은 어쩔 수는 없었다.
" 겁나게 덥네.."
" 기온이 얼마나 올라가려고 아침부터 이렇게 더운 거야."
" 이런 날씨인데 감염체가 썩지 않는 것도 신기하네."
" 그러게.. 뭐.. 이미 자연의 법칙은 무너져 버린 지 오래니까."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도 나오지 않고 전기도 없는 상황에 좋은 것이라고는 그나마 지하 건물보다 안전하다는 것이다. 가설 벽이 쳐진 벽은 제대로 설치가 되지 않아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은 상황이었기에 나쁠 것도 없었다.
" 어디로 가야지?"
" 응??"
" 여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
" 우선 이 근처에서 배회를 하자. 알다시피 사막 도시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연료도 충분하지 않고."
" 흠..."
" 상황을 지켜보자. 뭐라도 하겠지. 아무리 감염체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식량과 무기가 충분하니 잘만하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 탈영했는데 막아서 안전해졌다고 다시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 잘도 받아주겠다."
" 생각해보니.. 우리 너무 계획도 없이 나왔다?"
" 쾅!!!"
" 응??!"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중 지하 건물이 있는 위치에서 큰 폭음이 들려왔고 곧이어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 뭐..뭐야?!"
" 설마.. 전에 말했던 미사일 공격인가?"
" 아닌 것 같은데.. 미사일이라면 더 큰 폭발이 들렸어야 하는데 지하 어디가
폭발한 것 같은데.."
" 자폭 한 거야?!!"
" 설마.. 뭐 하러 자폭을 해... 다른 구역도 많고 Z구역도 있는데 굳이 위험하게
자폭을 하겠다는 것은 좀.."
" 모르지.. 그 구역에서 원해서 한 것이 아니고 다른 구역에서 위험하다고 판단
해서 한 것일지도.."
" 피해가 클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지하라서 도망갈 곳도 많이 없는데."
" 쾅!!! 콰광!!!"
" 연쇄 폭발인가?"
" 화약고라도 터진 거야?"
" 대령님... 무사하시려나?"
" 터진 위치가 꽤 먼 걸로 봐서 우리가 있던 구역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모르는 일이지.."
" 불안한데.."
" 이제 분열은 불 보듯 뻔 한 상황인가? 자폭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한참을 바라봤다. 뭔가 상당히 불안한 느낌이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곳을 빠져 나온 상황이다. 지금은 우리 앞길만 생각해야 했다.
" 우선 밥이나 먹자. 뱃속에 뭐가 들어가야 힘을 쓰지."
" 이 상황에 밥 생각이 나는 너도 대단하다."
"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은 아니지만 그래도 배고프면 힘들잖아."
" 그래.. "
우리는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고 입맛은 없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먹어야만 했다.
그래도 캔 음식과 비상식량은 맛이 괜찮았다. 덕분에 별 무리 없이 식사를 끝낼 수 있었고 건물을 나와 다른 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식량이 남아 있었지만 언제 사람들이 밀려 나올지 몰랐고 앞으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최대한 물량을 확보해야만 했다. 삭막한 도로에는 다행히 감염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뜨거운 햇빛과 건조한 모래바람으로 쉽게 지쳐갔다.
" 우리야 괜찮다고 해도 여자들은 무리야."
" 허억..허억.."
" 먹을 식수도 얼마 없어. 이대로 이동하는 것은 위험해."
" 더 더워지기 전에 움직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덥다.."
" 우선 쉴 곳을 찾자."
우리야 체력이 받쳐주니 상관이 없었지만 여자들은 쉽게 지쳐갔다. 그나마 인원이 소수였기에 기동력은 좋았고 우리는 빠르게 부유해 보이는 가정집을 찾아 들어갔다. 가정집 내부는 급하게 떠난 것이 느껴질 정도로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 먹을 것이나 물건을 챙기기 위해 헤집었다기보다 급하게 필요한 물건만 챙겨간 흔적이었기에 사태 후에 다른 인원이 이곳을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 우선 창문을 닫고 쓸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 응."
우리는 제법 큰 가정집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꽤 부유한 집안인 듯 차고에 차량도 몇 대 주차가 되어 있었고 큰 수영장도 마련이 되어 있었다. 서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이 아닌 제법 거리가 있는 형태로 보아 부유한 동네가 확실해 보였다.
" 우와... 침대 봐.."
" 와...TV가..."
집에는 호화로운 가구와 주방기구가 마련되어 있었고 몇 군데를 제외하면 꽤 깔끔한 상태를 유지했다.
" 응??"
" 왜??"
" 아니... 생각보다 2층 넓이가 작네.."
" 응?"
" 여기...1층은 차고 위치인데.. 밖에서 보면 분명 건물이 올라가 있는데.. 지금
여긴 아무것도 없네..."
" 응? 정말?!"
" 이 책장 넘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 밀릴려나?"
" 힘으로 해보자.."
나와 박 중사는 책장을 힘으로 당겼고 무겁기는 했지만 큰 무리 없이 당겨진 책장 뒤에는 큰 금고 같은 것이 보였다.
" 금고야?"
" 금고라기보다.. 패닉 룸인가?"
" 패닉룸?"
" 집안의 벙커라고 해야 하나.. 안전구역이야. 독자적인 전기와 수도. 전화선까지
가진 집안의 다른 집인데.. 나도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는데."
" 뭔 수로 열어?"
" 보통 지문이나 그런 형태로 열리지 않을까?"
" 힘으로 열기에는 너무 두꺼운데."
" 도대체 집 주인은 뭐하는 사람이라 패닉 룸까지 만든 걸까?"
" 모르지.."
너무 튼튼하게 생긴 형태라 힘으로 뜯어내는 것은 무리일 것 같고 괜히 힘으로
부수기에는 조금 아까운 느낌이 있었다.
" 안에는 뭐가 있을까?"
" 뭐.. 내가 아는 것은 그냥 안전한 집이라는 것 외에는.. 안에 뭘 넣은 것은
집주인이니까."
" 흠... 괜히 열어보고 싶은데."
" 잉?? 아직도 작동을 하네?"
" 뭐?!"
" 키패드에.. 불이 들어와 있는데? 어디선가 전기가 들어오나?"
" 지붕에 설치된 태양열 집열판에서 끌어오나? 많은 양은 아닐 것 같은데."
" 최소한의 보안을 유지할 전력은 공급이 되나봐?"
" 흠... 숫자패드면 열어볼 확률이 있을 텐데.."
" 몇 번 틀리면 꺼지고 그런 것 아닐까?"
" 흠..."
설치 된지 제법 오래됐는지 디지털 형식이 아닌 번호를 눌러서 여는 방식이었다. 내 생각과 다르게 정말 금고일 수도 있었다. 솔직히 금고보다는 패닉 룸이길 바랬다. 금고야 돈이 있겠지만 패닉 룸은 적어도 생존에 필요한 뭐라도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 뭔가 접착제 같은거 없냐?"
" 응?"
" 영화 못 봤어? 이런 곳에 접착제를 뿌리고 밀가루나 뭘 뿌리면 그래도 뭘
눌렀는지는 알 수 있으니 맞출 확률이 높아지잖아?"
" 그렇게 간단한가? 그럼 네 말대로 밖에서 그렇게 쉽게 열 수 있다면 패닉 룸을
뭐하러 만들어?"
" 안에 사람이 있다면 강제적으로 못 열게 하는 기능이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옛날 형태라고 해도 어찌됐든 안에 사람을 안전해야 하는 것이니까."
" 흠... 한 번 구해와 볼게."
어느새 다가온 재효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주방으로 필요한 것을 찾으러 갔다. 뭐 특별히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뭐라도 있다면 좋은 것이니까. 재효는 주방에서 밀가루로 보이는 것과 스프레이 접착제를 찾아왔다. 나는 밀가루를 보고 가루를 확인했다.
" 뭐해?"
" 가루가 너무 굵어.. 너 미세해야하는데.."
" 왜?"
" 이러면 접착제를 뿌리고 밀가루를 뿌려봐야 확인이 안 돼. 10개 숫자패드에
전부 달라붙는데 뭐가 모양이 약간이라도 다른 곳을 찾아야하는데.."
" 하긴 입자가 너무 굵으면 확인이 불가능하겠지."
" 좋은 건 연필 심 갈아서 쓰는게 좋을 것 같은데.."
" 어디 샤프라도 있는지 확인을 해볼게."
" 급할 것 없으니 조심해서 움직여."
" 응!"
" 그리고 김 중사는 서재를 뒤져서 개인 정보를 찾아봐."
" 왜?"
" 숫자가 확인이 되면 확률이 높은 것을 찍어야지. 그럴리는 없겠지만 생일이나
전화번호. 차번호 이런 것 말야."
" 아!! 알았어!"
김 중사도 서재로 달려가 다른 것을 확인했다. 여자들은 지쳤는지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진 모습이었고 나는 건물 주변을 확인했다. 높은 담벼락으로 방어도 유리했고 건물 사이가 넓어 감염체가 빨리 넘어 올리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살폈고 특별히 위험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차고에는 고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별로 쓸 만한 것은 없었다. 연비가 좋지도 못한 스포츠차량이나 세단 차량을 뭐하러 끌고 다니겠는가?
" 필요한 것이 별로 없네.. 그 흔한 픽업트럭도 한 대 없네. 다른 집은
있으려나?"
" 재효가 뭐 구해온 것 같은데?"
" 뭔데?"
" 몰라. 세재 책안에 들어있던데?"
" 응?!"
" 밀가루인가?"
" 어떤 바보가 밀가루를 서재에 보관해? 그것도 책 안에.."
" 아..."
" 마약인가?"
" 응?!!"
" 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 미국 애들은 담배보다 마약이 구하기 쉽다고
했는데.."
" 입자가 매우 곱다. 가능하겠다. 김 중사는 뭐 건진거 있나?"
" 몇 개는 적어왔는데 봐야지.."
" 올라가자."
우리는 물건을 챙겨 올라갔고 숫자패드에 스프레이 접착제를 뿌렸고 마약으로 보이는 가루를 입으로 뿌렸다. 숫자패드에 골고루 뿌려진 가루는 몇 개의 숫자 패드에 불규칙하게 붙어진 모습이 보였다.
" 제일 많이 누른 숫자는 알았고.. 아무리 4자리라고 하지만 확률이 엄청난데."
" 그래도 같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다행이네."
" 확률이 도대체 얼마냐?!"
" 구 곱하기.. 팔 곱하기.."
" 됐다.."
재효의 중얼거림에 머리가 아팠다. 아무리 숫자를 알았다고 해도 순서를 모르니 골치아픈 상황이었다.
" 그런데 왜 뭐 때문에 이 문을 열려고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거야?"
" 할 일 있어?"
" 아니."
" 그럼 어서 열어."
" 으...응..."
어차피 할 일도 없으면서. 그리고 열지 못하는 문은 항상 궁금하기 마련이다. 뭐 지금은 급박하게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었기고 이런 행동으로 우리는 잠시나마 감염체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을 노렸다. 다들 지금은 감염체보다 눈 앞에 보이는 문을 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다. 김 중사가 모아온 숫자에서는 맞는 것이 없었다. 보통은 3번이 틀리면 잠기는 일반적인 제품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3번이 최대였다. 설마 한 번 틀렸다고 바로 잠기는 일은 확률 상 적었다. 사람이란 존재가 실수를 할 수 있으니 정작 자기 금고를 한 번 틀렸다고 사람을 불러서 열어야 한다면 꽤나 열받을 테니까.
" 흠..."
" 도저히 모르겠는데.."
" 전화번호? 차 번호? 생일?"
" 에라이.."
" 야야야!!!"
박 중사가 생각에 잠기다 바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3번의 기회를 저런 식으로 날리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다들 소리를 지르며 말렸지만 이미 박 중사의 손가락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 띠.띠.띠.띠."
" 야!!"
" 띠링..."
" 앵??"
" 뭐..뭐야?"
키 패트에서 들리는 소리는 틀렸다기 보다 맞춰서 나는 소리처럼 맑고 청량한 소리가 나더니 묵직한 소리가 들린 후에 문이 열렸다.
" 너... 뭘 누른 거야.."
" 어...대충.."
" 운도 좋다.."
묵직하게 열린 문은 약간의 틈새를 벌려 놓고서는 멈췄고 우리는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