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6 / 0281 ----------------------------------------------
-3부-
검사 아닌 검사가 끝나고 나는 은혜와 뱃머리에 앉아 따가운 햇살을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은혜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비치 타월을 바닥에 깔고 오붓하게 누워있었다.
" 누가 오네?"
" 네?"
우리의 휴식을 방해하듯 대령과 박 중사. 그리고 김 중사가 무장을 한 병사를 대리고 우리 배로 올라왔다.
" 다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절대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어."
내 말에 다들 대답이 없었다. 내 휴식처에 무장을 한 병사가 올라오는 것은 꽤 기분이 상하는 행동이었다.
" 의료진에게 자네의 몸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네."
" 그래서요?"
더 이상 대령을 믿을 수 없어 삐딱하게 나갔다.
" 이 순간부터 자네의 모든 행동에 제재가 가해질 것일세. 자네의 움직임
자네 일행들의 움직임까지 모두!"
" 하아.."
이제는 완전히 우리에게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 그래서요?"
" 뭐?"
" 이제 와서 저희를 감시한다고 뭐 달라질 것이 있나요? 제 육체가 검사가
안 될 상황이라 그런 건가요?"
" 부정하지 않겠네. 이제는 자네와 일행은 완전한 감시 대상이네."
" 결국은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입니까?"
저들은 내 검사가 내 의지에 의하여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힘이라.. 자네를 힘으로 이길 생각은 없다네."
" 그럼 저희를 그냥 두시죠."
" 그건 안 된다네. 자네는 우리 생존자 무리 중에서 가장 희망적인 사람이니
말일세."
대령의 말에 나는 다시금 피가 끓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 희망이라... 제가 과연 그 기대에 답할거라 생각하십니까?"
" .... "
내 물음에 대령은 말이 없었다.
" 나가주시죠.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제가 나갈 수 없다면...
다른 인원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령은 몸을 돌려 병사들과 배를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재효에게 말했다.
"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진 무기들을 확인해. 그리고 여자애들은 가장 안전한
방에 머물게 하고."
" 뭐?"
" 이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 된 거야."
내 말이 끝나고 재효와 기태는 우리가 가진 무기와 식량을 확인했고 잠시 후 병사들이 우리가 먹을 식량을 가지고 왔다.
" 그래도 먹을 것을 주네."
" 생필품도 주던데?"
" 무기는 얼마나 있어?"
" 유탄 백 여발이랑.. 수류탄. 크레모어. 소총탄.."
생각보다 많은 양이 있었다. 그 동안 우리가 착실하게 모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인원들은 좀 더 보강된 상황이었고 가능하면 같은 인간끼리의 전투는 피하고 싶었다.
" 생각보다 숫자가 많이 늘었네."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고 기태가 말을 했다. 그런 병사들을 지휘하는 사람들 중에는 김 중사의 모습도 보였다. 왠지 모를 배신감에 가슴 한 곳이 씁쓸했다.
" 그나저나 신기하네? 주사 바늘도 안 들어가고 엑스레이도 찍히지 않는
몸이라니."
"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느낌이야."
" 좋게 생각하자. 덕분에 은혜와 다른 인원들이 다른 생존자들 보다 더 편하고
안전하게 생활하니까."
" 솔직히 난 두려워."
" 다른 생존자들은 다른 의미로 두려워."
기태의 말에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남들은 살아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최소한 그들보다는 그런 두려움은 덜 한 상황이다. 내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에 다른 두려움은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나서 우리는 주방에 모여 간단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메뉴라고 해봐야 감자 삶은 것과 약간의 스프가 전부인 식단이었지만 없는 것 보다야 나았다.
" 고기가 먹고 싶다.. 고기..고기.."
" 나가서 뭐라도 잡아 올까?"
" 저 많은 병사를 뚫고 나갈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저번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또 그런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란 말야."
내 말에 기태가 대답을 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행동하는 나를 잡아주는 존재가 기태였다. 오랜 친구사이니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 보완하며 지내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끈끈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감자를 나눠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어디선가 큰 폭음이 들려왔다.
" 뭐.. 뭐지?"
"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진거야?'
" 쌔앵!!!"
" 크엑!!"
배 바로 위로 미사일이 지나갔는지 전투기가 지나갔는지 모르겠지만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고 우리는 먹던 것을 멈추고 갑판으로 나갔다.
" 어...라?"
" 뭐지?"
강북 쪽에서 몇 번의 섬광이 보이고는 엄청난 높이로 치솟는 불길이 보였다. 아무래도 감염체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확신이 든 곳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 젠장.. 자던 비둘기를 전부 깨웠나봐."
" 이런!! 어서 들어가!!"
불길이 치솟는 곳으로 향하는 비둘기 무리가 보였고 반대편에서도 우리 쪽으로 향하는 무리가 보였다. 괜히 이곳에 있다 비둘기 밥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서둘러 배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 있는 병사들도 대부분 텐트나 터널 안으로 숨는 모습이 보였다. 불쌍하기는 했지만 아량 따위를 베풀 생각은 전혀 없었다.
" 푸덕! 푸덕!!"
" 끼에에엑!!"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비둘기를 창문을 통해 바라봤고 녀석들은 야식이라도 먹을 생각에 들떴는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날아간 자리에는 엄청난 크기의 깃털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 저 녀석들..잡으면 먹을 만 할까?"
" 아서라... 감염체를 먹고 자란 녀석을 먹어봐야 뭔 이득이 있다고.."
" 정말 먹을 것이 없다면 잡아먹을 수도 있겠지요."
기태와 나. 그리고 재효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들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배 안으로 들어갔다.
밤새도록 미사일과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와중에 화음이라도 맞추려는 듯 비둘기들의 괴성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고 했지만 적의 적은 그냥 더 무서운 적이 되어버렸다. 일행들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표정들이 좋지 못했다.
" 제대로 잔 사람이 없군."
" 저런 소리를 듣고 제대로 잘 수 있다면 더 이상한 사람이지."
" 그런 의미에서 재원 오빠는 이상한 사람이군요."
" 뭐?"
" 진짜 잘 자더라고요. 저는 제대로 잠도 못 잤는데."
옆에서 은혜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요새 살이 많이 빠져 코를 골지 않지만 한 번 잠이 들면 잘 깨지 못했다. 예전에는 무슨 소리만 나도 바로 깨어났는데 지금은 많이 편해졌는지 푹 잠드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남들이 보면 기절초풍할 내용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기태에게 무전기에서 뭔가 주고받는 내용이 있는지 궁금하여 물어봤다.
" 무전은 별다른 내용이 없어?"
" 주파수를 바꿨나봐. 잡히는 것이 없어."
" 다른 주파수를 찾아보지."
" 말이야 쉽지. 생활 무전기가 아니라고."
" 저들이 하는 대화를 알아야 우리도 뭔가 움직일 수 있는데.."
" 박 중사는 요새 뜸하다?"
기태의 말에 내가 대꾸를 하지 않았다.
" 아무래도 윗선에 눈치가 보이겠지."
" 따로 무전을 주고받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무전이 없네."
" 설마 우리 무전 주파수도 알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박 중사가 무전을
못 하는 상황이라면?"
" 내가 가봐야겠지."
" 응? 뭐라고?"
내가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 미쳤구나? 저 인원들이 널 밖으로 나가게 둘 것 같냐?"
" 형! 제 정신이야?"
" 오빠! 미쳤어요?!"
당연히 다들 나를 말렸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를 나가며 말했다.
" 걱정마."
내 표정에 다들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난 유유히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정지! 움직이면 쏜다!"
" 쏴 봐. 어떻게 되는지."
" .... "
내 말에 병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가자 김 중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 오랜만이네."
" 응."
" 나 박 중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니 길 좀 비켜줄래?"
" 어렵겠는데?"
" 응?"
" 위에서 네 행동에 제재를 가한 상황인거 알지? 넌 여기 고수부지 밖으로 나갈
수 없어."
" 누가 내 행동에 제재를 가한다는거야?"
내가 김 중사를 노려보며 말했고 보통 사람이라면 겁을 먹거나 했을텐데 김 중사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김 중사를 팔로 밀치며 말했다.
" 따라오려면 따라와. 단지 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가는 것 뿐이니."
" 전원 이동."
" 알겠습니다."
김 중사의 말에 병사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박 중사가 있는 건물로 들어갔고 병사들은 건물을 포위하듯 흩어졌고 김 중사와 몇 명의 병사만이 나를 따라왔다.
" 어? 어떻게 나왔어?"
" 그냥."
" 너 답다. 무슨 일이야?"
" 그냥.. 네가 연락도 없고 뭐하나 해서."
나는 의자 하나를 잡아 당겨 박 중사 앞에 끌어다가 앉았다.
" 손님이 왔는데 커피도 안 줘?"
" 이 판국에 아직도 커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거다."
" 칭찬이지?"
" 에휴.."
" 그럼 뜨거운 물이나 줘. 커피는 내가 가져왔으니."
내가 주머니에서 믹스 커피 봉지를 꺼내며 흔들었다. 박 중사는 그런 내 행동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내심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녀석도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뜨거운 물이 나오고 컵에 커피를 따라 마셨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가볍게 불면서 박 중사를 바라봤다.
" 뭐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아냐?"
" 뭐.. 그냥 저냥."
" 너 그냥 저 병사들 괴롭히는 재미로 나온 거냐?"
" 반반이야."
" 참네."
" 그나저나 무전은 왜 안했냐?"
" 저들이 우리 무전 주파수를 알고 있으니까."
역시나 예상했던 말이었다.
" 위에서는 어쩔 생각이야? 언제까지 나를 이런 식으로 가둬둘 수 없다는 것을
알 것 같은데?"
" 아직은 너에 대해서 알아 낼 수 있는게 없다보니 위에서도 널 가둬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겠지."
" 대책 없는 사람들이군."
" 그런 면에서는 너랑 비슷하다."
" 닥쳐."
난 커피를 마시며 박 중사의 말을 받아쳤다. 컵이 차갑다보니 금방 식은 커피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다시 건물을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 듣고 있어도 상관없으니 무전 좀 해라."
" 그래.."
" 수고하고. 시간 나면 들러."
" 응. 그런데.."
" 응?"
" 김 중사에 대해 하나도 안 물어본다?"
조금은 걸렸는지 박 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굳이 당사자가 아니라면 들을 생각도 없고 김 중사 녀석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 천하태평이구나."
" 그냥 생각하고 싶지 않아."
" 그래라.. 언젠가는 말해주겠지."
" 간다."
나는 박 중사에게 말을 하고 뒤로 돌아 건물을 나갔다. 내가 나가는 모습이 보이자 나를 따라온 병사들이 역시나 졸졸 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그런 모습이 약간은 웃겼지만 큰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배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