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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나는 힘없이 배로 돌아왔고 내가 무사히 돌아온 모습을 보고 다들 안도하며 기뻐했다. 은혜도 뛰어와 내 품에 안겼고 피투성이인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무사히 왔구나."
" 여긴 안왔지?"
" 다행히.."
" 그래.. 그리고.."
" 응?"
내 말에 기태가 놀라며 나를 봤다. 아무래도 내가 겪었던 내용을 무전으로 미리 기태에게 말한 것 같았다.
" 두 번 다시 우리 일행 외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없어."
" .... "
내 말에 다들 꿀 먹을 벙어리마냥 나를 바라만 봤고 나는 그런 그들을 뒤로 하고 말했다.
" 씻고 올게."
무거운 내 발걸음이 내가 지금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듯 힘들게 샤워실로 들어갔다.
" 쏴아아아!!!"
따뜻한 물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떨어지고 뭉쳤던 근육들이 풀어지는 듯 피곤이 몰려왔다. 몸에 붙은 피딱지들을 털어내고 샤워실을 나가니 은혜가 커피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한 잔 할래요?"
" 응?"
커피인줄 알았던 잔은 위스키였고 간단한 다과와 함께 티 테이블에 차려진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술을 권한적이 없던 은혜였기에 상당히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게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 그럴까?"
내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크리스탈 잔에 따라진 위스키는 영롱한 색을 보이며 꽤나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 챙!"
" 크아.."
" 후..."
살짝 건배를 하고는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빈속에 들어가는 술이라 그런지 위까지 뜨거운 감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 자요."
" 자기도 먹어."
" 네."
은혜는 안주로 준비한 육포를 내게 건내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 뭐 할 말있어?"
" 네."
" 뭔데?"
" 오늘 행동... 후회해요?"
" 응?"
" 박 중사 오빠 무전 들었어요. 완전히 후회한다는 표정으로 나왔다며요?"
" 응... 맞아. 그런데 왜?"
" 그냥... 예전에도 참 자기는 남을 잘 도와줬는데.. 결국 돌아오는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라니."
" 하아... 솔직히 뭘 바라고 도움을 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대접을
바란 것도 아닌데."
" 그럼 앞으로 어쩔 생각이에요?"
은혜는 지금과 달라질 내 모습이 불안한 것 같았다. 얼마 전 변한 내 모습을 보고 부작용도 봤으니 그런 식으로 변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 감시 받기도 싫고 우리끼리 예전처럼 그냥 이리저리
떠돌면서 살고 싶어."
" 그럼... 떠나요."
" 응?"
" 다른 사람들 의견 묻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이 가는 결정대로
움직여요. 자기는 너무 남에게 자기를 맞춰가려는 모습이 보여요. 물론 그
모습이 나쁜 건 아니지만 자기에게 너무 큰 스트레스란 말이죠. 나만 봐도
그래요. 자기가 지금까지 이렇게 맞춰왔으니 이 망한 세상에서도 내가 불평
불만만 가득하자나요."
은혜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은혜의 모습을 보고 나는 위스키를 잔에 따라 다시 입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 여기서 또,. 피난이라.."
" 못할 것 뭐 있어요? 자기 능력되겠다. 무기 충분하겠다. 강원도다 바닷가
근처에서만 지내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 동안 나도
많이 배웠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결정하면
전 무조건 따를 생각이니."
" 고마워."
" 고맙긴요."
은혜도 남은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안주로 준비한 육포가 모두 입으로 들어갔고 아침부터 힘들게 움직인 나는 술기운에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 으구... 어서 누워요. 안마 해줄게요. 졸리면 자요."
" 고마워."
나는 침대에 업들이고 은혜의 손가락이 내 등을 누르는 것을 몇 번 느끼기도 전에 잠에 빠졌다.
" 끄응.."
다시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한 밤중이었다. 꽤 오랫동안 잠을 잔 듯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몸은 개운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은혜와의 대화에도 막혔던 뭔가가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옆에서 자고 있는 은혜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면 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기에 얇은 점퍼를 챙겨 입고는 담배를 물었다.
" 여전히... 제가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 알고 오시는군요."
" 뭐... 할 일이 없다보니."
" 그 집단 문제는 잘 해결 되었습니까?"
" 해결 될 수가 있나. 아예 뜻이 다른데."
" 형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 너도 대단하다."
도대체 추가 병력까지 있는 이 구역에 무슨 수로 들어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태의 감각과 내 감각마저 피하며 배까지 오는 모습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 그래서 다시 나갈거냐?"
" !!!!! "
은혜와 둘이서만 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방에 무슨 도청기라도 장착한 상황인가?
" 뭘 그리 놀라. 도청기 따위는 없다. 걱정하지 말아야!"
" 그럼.. 도대체 단 둘이 방에서 한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내가 살벌한 눈을 하고 바라보자 정서 형님이 손을 들며 그만 오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 괜히 열 올리지마. 그러다 또 변한다?"
" 네??"
" 너 변하는 방법은 살기야. 남을 누군가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변한다. 그러니 괜히 여기서 변하지마."
" 그게 말이 됩니까? 살기라니요?"
" 살기라는 그 기운 때문은 아니고 그런 감정이 들었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
" 아 됐어요."
복잡한 말이 나오자 말을 끊고 돌아섰다. 정서 형님은 꽤 두툼한 옷을 챙겨 입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아직 여름인데.. 그런 옷은..."
" 너도 나이 들어봐. 뼈가 시려."
" 하아..."
시답지 않은 농담에 고개가 저어졌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어떻게 하면 변하게 되는지는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러니 다른 방법에 의해 변할 수도 있어."
" 지금까지...요?"
" 우리라도 그런 변화에 모든 것을 알아낸 상황은 아냐. 굳이 저기 이단자
집단만봐도 알 수 있잖아? 그들은 아예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잖아?"
" 그래서.. 제 변화에 대해 뭐가 더 남았습니까?"
" 그냥...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앞으로 인류가.."
" 됐습니다."
대충 듣고 있어도 핑계였다. 알아낸 것이 없다는. 그런 정서 형을 다시 돌아서서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었다.
" 생각해 보니.. 저와 은혜만의 대화를 어떻게 알았는지 대답을 듣지 못했군요."
" 아.. 간단해."
" 네?"
" 은혜가 알려 줬거등."
" 네에?!"
" 뭘 그리 놀라나. 너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무전하라고 챙겨준 무전기가
있었는데 낮에 무전이 오더라고. 만약 재원이가 다시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면 도와줄 수 있냐던데?"
" 그런가요.. 그래서 형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 뭐 얼마든지. 솔직히 네가 여기 없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편하니까."
" 편하다고요?"
" 응. 그래야 빨리 내 계획을 실행하지. 솔직히 내가 이렇게 밍기적 거리고 있는
것도 너 때문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어."
" 하아.. 아직도 생각을 버리지 못했군요."
" 당연하지. 뭐 나 같은 인간이 성격 바꾸기는 힘들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정서 형님이 말을 하자 나는 별다른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은혜가 나 모르게 정서 형님과 연락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 은혜를 너무 원망 하지마. 처음에는 은혜도 너에게 숨겨야 한다는 사실에 극구
반대했으니까."
" 뭐.. 크게 신경쓰는 것은 아닙니다."
"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해봐라. 누가 믿나."
정서 형님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내며 내게 건내줬다.
" 만약 네가 다시 떠나고 싶다면 여기로 가봐라."
" 어라..?"
정서 형님이 전달해준 지도에 표시된 곳은 얼마 전까지 우리가 생활하던 섬이었다.
" 여긴 얼마 전까지 우리가 생활하던 섬 아닙니까?"
" 섬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 않냐? 뭐 그렇다 치고 그 건물에 가면 예전에
네가 끌고 다닌 카라반과 비슷한 차량이 있어. 약간의 무기랑 식량도 있으니
필요하면 가져다 써. 내가 몰래 가져다 둔 물품이라 아무도 몰라. 여기 자물쇠
열쇠."
정서 형님은 나에게 열쇠를 하나 건내 주고는 다시 말했다.
" 솔직히 내가 왜 이런 호의를 너에게 하는지 나 조차 의문이야. 난 분명
거의 모든 인간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인간인데 말이야. 아무래도 거의 모든
이라는 말에 너희 일행은 포함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네."
" 감사합니다."
" 참네.. 그리고 이제 우리 공격도 본격화될 예정이야. 일반 감염체야 씨가 말라
버린 상황이지만 변종 감염체와 너와 같은 존재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으니
이제는 다를 거야. 너에게도 남은 생존자들에게도 무척이나 힘든 싸움이
되겠지. 감염 비둘기라는 변수만 없었더라도 일찍 시작될 싸움이었는데."
"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 응. 너희 일행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충분히 잘 봐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널 찾는 마지막 날이야. 더 이상 나도 잘 나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할 만큼 했다고 본다."
" 알겠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정말 적이군요."
" 응. 각오해. 다음에는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 제발... 마주치지 말죠 저희."
"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정서 형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고 나도 거절하지 않고 형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 그럼.. "
" 네.."
말을 끝낸 형님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무척이나 슬픈 표정으로 웃고는 배에서 내렸다. 나는 그런 형님을 바라봤지만 형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뛰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이제.. 시작인가.."
형님의 선전 포고. 그리고 점점 매섭게 변화는 감염 비둘기. 그리고 잠재적인 위협인 이단자 집단. 어디 하나 평범한 생존자가 살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 대단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렇게 진화한 것도 어째보면 자연이 인간이 다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다 핀 담배를 강에 버리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은혜의 모습을 보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고는 낮에 마시고 남은 위스키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 크으.."
언제 먹어도 적응하기 힘든 맛이었지만 내 의지를 확고히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다시 한 모금을 삼켰다.
" 하아.."
의자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여기서 계속 머무르며 약간은 안전하지만 감시를 받고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이단자 집단에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예전처럼 강원도 한 곳으로 자리를 잡고 살 것인가. 적어도 강원도나 한적한 해안가에서 살면 감염 비둘기나 이단자 집단의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일반 감염체도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 존재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내 감각과 기태의 감각이 있다면 멀리서도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 흠.."
얼마 남지 않은 위스키가 든 잔을 돌리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미 창 밖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밝은 빛을 뿜어내는 해가 고개를 들었고 따뜻한 기운이 방안에 감돌기 시작했다. 창밖에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이 보였다. 지상은 개판이 되어도 하늘 만큼은 여전히 맑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 그럼... 슬슬.."
내 생각을 정리하고는 은혜가 잠든 침대 옆으로 들어가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푹신한 침대와 은혜의 살내음이 콧속으로 흘러 들어오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