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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한 동안은 주변이 조용했다. 우리 옆에 있던 생존자들도 어디론가 떠났고 우리에게 감시를 붙였던 집단도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들은 폐글루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남자들만 살아남은 집단으로 보였을 것이다. 간혹 옆 집단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지나는 갔지만 우리에게 큰 관심은 가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경계선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고 주변에 식량 구하기가 힘들다보니 멀리까지 나가서 구해야 하는 점도 한 몫을 했다.
" 생각보다 여기 유동인구가 많은데?"
" 아무래도..저희 고립된 것 같습니다."
" 응?"
요 근래 무전으로 뭔가를 계속해서 말을 하고 집단 본거지에도 몇 번 다녀오던 규호가 말을 했다.
" 무슨 소리야? 고립이라니?"
" 저희가 소속...아니 제가 소속됐던 집단에서 지금 저희가 살고 있는
지역을 관할하지 않는다고 복귀하라고 합니다."
" 응?"
" 이번에 생존자들이 많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 중에는 애초에 몇 백의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여서 들어온 것 같습니다. 그 인원들이 저희 바로
아래쪽에 자리를 잡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영역다툼 없이 자연스럽게
제가 속했던 집단은 여기를 포기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 하긴...뭐 땅이 많다고 뭐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살기 좋아
보호비라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그럼 이 섬 집단이 5곳으로 늘어났네?"
" 그...그게.."
" 응? 또 무슨 일인데?"
말을 흐리는 규호의 표정이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 아무래도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집단끼리 회담이나 뭐 이런 걸
하는 것도 아니라...그냥 암묵적으로 우리는 여기. 너희는 거기.
라는 개념이라."
" 아하..."
" 아무래도 집단끼리 이번에 영역을 확실하게 정해서 뭐 이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들 구역을 정해서 그 곳에서 생활할 것 같습니다."
" 흠..."
" 번화가나 대학교나 이런 곳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 구역을 표시하는
집단이 늘었다네요."
" 어쩌다 여기에 생존자들이 몰렸을까.."
" 보통 이런 피난의 경우 따뜻한 남쪽 나라의 개념 아닌가? 왜 거꾸로
올라오지?"
" 그런 따뜻한 곳은 우리뿐만 아니라 감염체들도 살기가 좋은가보지."
" 그럴지도.."
" 일리는 있네."
그냥 뱉은 말인데 저렇게 수긍하니 뭔가 뻘쭘했다.
"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너는?"
" 전 다시 복귀할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식으로 말을 하더군요."
" 매몰찬데."
" 솔직히 말이 보호지 적극적으로 방어를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들
아마 힘 있는 집단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 흠....그럼 우리 옆이 제일 위험하겠군. 제 정신이 놈들이 아니니."
" 그나저나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았어?"
" 집단에서 간간히 섬을 정찰하긴 합니다. 뭐 큰 의미가 있는 정찰은
아니지만요."
" 그 말은 섬에 생존자들 숫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말이군."
" 아마도.."
" 뭐 우리에게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네."
" 드드드득!!!"
" 응?"
한 참 이야기 중에 묵직한 차량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반 차량이라고 하기에는 소리가 꽤 컸고 숫자도 많아 보였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무기를 챙겨 밖으로 나갔고 멀리서 연기를 내며 달리는 장갑차와 군용 차량을 볼 수가 있었다.
" 일반 생존자가 아닌 것 같지?"
" 전원 군복이라..."
" 아직까지 제대로 된 군대가 있었네?"
" 그런데 왜...이 방향으로 오는 거야?"
" 그...그러게?"
섬 북쪽 끝자락에 가까운 위치인 여기에 올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우리 위치는 산과 산 사이에 있기에 감염체 방어에도 그리 유리한 곳은 아니었고
감염 조류의 방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우리 근처로 오는 것이 불안했다. 여기 근처에는 감염 조류들이 모은 폐기물들이 많았고 그 안에는 군용 트럭이나 장비들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 지나가는데?"
" 더 위로 갈 생각인가? 허허벌판인 곳으로?"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 산 넘어 산이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무장 상태가 상당해 보이는데."
군장까지 제대로 멘 인원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오합지졸로 모은 군대는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다. 망원경으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소총을 메고 있었고 차량에 탑승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제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남은 것으로 보였다.
" 이 판국에 연비도 더러운 군용 트럭이 저렇게나 많은 숫자를 움직일 수
있다는건..."
" 어디선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았거나 제대로 된 곳에서 잘 살다가
옮겼다는 소리겠지."
" 젠장.. 괜히 여기 오지는 않겠지?"
" 어렵게 됐네. 지금까지는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좋았는데 저렇게 많은
인원이 온다면 주변에서 움직임이 많아져 우리를 감시하는 인원을
골라내기 힘든데."
"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 힘들게 됐네. 육안으로 감시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이동하는 트럭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소음은 한 동안 계속 들렸다. 물론 우리 청각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애초에 군용 트럭은 정숙과는 반대되는 녀석들이니 가능했다.
"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 보러가자."
" 그래야겠다. 우리랑 어느 정도 거리인지도 알아야지."
좋은 의도건 나쁜 의도건 그들의 위치는 알아야 했기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산을 넘어 그들을 따라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우리를 보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스럽게 이동하면서 그들을 따라갔고 우리보다 더 북쪽 한적한 마을로 보이는 곳에 멈춰서 짐을 풀기 시작했다. 마을이라고 해봐야 이삼십 가구가 모여 있는 곳에 불가했지만 저들에게는 충분한 크기였다. 일사분란하게 차에서 내려 자리를 잡고 철망을 치고 주변 물품을 이용해 간의 초소도 만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렇게 움직이는 게 익숙한 부대 같았다.
" 장난이 아닌데? 무기도 상당하고."
" 도대체 왜 이런 곳에 자리를 잡을까? 번화가나 군청 근처가 더
요충지 아닌가?"
" 생각이 있겠지. 움직임을 봐서는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같이 온 박 중사도 나랑 생각이 비슷한 것 같았다. 대충 인원은 백여명
정도 되어 보였고 물자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 왠지 부러운데.."
" 저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것을 보면 더 부럽다고 생각할걸?"
기태의 말에 박 중사가 대답을 했다.
" 하긴... 그나저나 우리도 저런 작업을 해야하지 않을까? 저건 감염체
말고도 다른 생존자를 방어하려고 만드는 것 같은데?"
" 하긴.. 우린 너무 허술하긴 하다."
" 돌아가면 바로 시작하자."
바리게이트라고 해봐야 별 것도 없는 우리와 달리 저들은 체계적으로 주변을 다듬고 있었다. 너무 우리 힘만 믿고 안일하게 대처했나 싶어 약간의 반성과 함께 폐글루로 돌아가서 남자들을 모아 작업을 시작했다.
" 우선 거리가 있는 곳은 장애물을 설치하고 근처에는 철조망을 치자."
" 저기요 아저씨? 이 근처에 철조망이 어디에 있다고 지금 그걸 구해와?"
" 여기가 무슨 강원도처럼 군부대가 많은 곳도 아니고... 당장 어디서.."
내 말에 다들 난색을 표했다.
" 그..그런가?"
" 우선 되는대로 말뚝이라도 박고 끈으로 단단하게 묶던가하자. 뭐라도
해놔야 긴장이라도 하고 들어오지."
박 중사가 우선 임시방편으로 철조망을 대신할 방법을 말했고 농사를 짓던 곳이 많아 그물 비슷한 것들이 많이 널려 있어 잘라서 사용하기로 했다.
엉성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뭔가 했다는 표시는 났다. 적어도 밤에는 함부로 들어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 후우..."
" 제법 힘든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작업이 끝났다. 완전히 마무리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기에 서둘러 작업을 마무리했다.
" 어서 들어가자. 해가 진다."
" 벌써 어두워지네?"
확실히 계절이 바뀌면서 해가 짧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벽 해가 뜨기 전에는 예전보다 확실하게 기온이 떨어짐을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 섬이고 북쪽에 가까워서 그런가.. 더 빨리 추워지는 것 같네."
" 우리... 옷도 제대로 없는데...어쩌냐?"
중간에 제대로 몇 번 털렸으니 옷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들 두세벌로 버티는 수준이었지만 그나마 대부분 여름옷이었다.
" 당연히 근처에서 구하는 건 무리겠지?"
" 생각해보니 그 때 집 늘리려고 주변을 돌았을 때도 집 안에 옷이나
이런 물품이 생각보다 적다고 느꼈는데 벌써 털어 간건가?"
" 아마도... 이곳에서 오래 지낸 생존자들이 많다고 했으니.."
" 섬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번화가도 차로 한 시간은 가야합니다."
" 난감하군. 이 상황에 그렇게 멀리 가기도 무리인데.."
" 차량을 가지고 간다면 주목받기 딱 좋은데.."
" 하웅.... 돌겠네 진짜."
" 그래도 어쩔 수 있냐. 가야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생활하는데 필요하니. 수송선이 있기는 하지만 식량이나
무기 탄약을 제외하면 별 다를게 없으니."
" 간단한 취사도구만 있었지 아마?"
" 응..."
" 후..."
겨울이 다가오는 마당에 뭐라도 걸칠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예전 관광지였던 곳에 마트나 아울렛이 있을 리가 없었다.
" 전력으로 뛰면 얼마나 걸릴까?"
" 가다 지칠걸. 그것보다 어떻게 들고 올 건데? 우리 인원이 한 벌씩만
입는다고 해도 열 한 벌이다..."
" 근데...감염체 사태가 일어난 시점이 가을이 되기 전인데 과연
겨울옷이 있을까?"
" 보통 옷들은 한 계절 먼저 나오니까 있을걸?"
" 어디까지나 생존자들이 안 가져갔다는 전재조건이 붙지만."
" 그것도 문제네."
여름이 지나기도 전에 가을옷이 나오고 가을이 되면 겨울옷이 나오니 잘 만 찾는다면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있던 옷들을 주변 생존자들이 가져갔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 그래도 안 가볼 수 없으니... 내일 당장 가자. 말 나온 김에 가야지."
" 어떻게 갈 생각이야?"
박 중사의 말에 기태가 물었다. 박 중사는 지도책을 펼치고는 대충 길을 훑어보고는 말을 했다.
" 여기...가 제일 뭐라도 있어 보이는 곳이니... 우선 여기를 목표로 하자."
" 그나마 가장 가까운 번화가네... 대부분 산업단지인 것 같고."
" 그래도 김포면 사람이 많이 살던 곳이긴 하지만 그 만큼 생존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지."
" 지금은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내일 누가 갈래?"
박 중사의 말에 다들 나를 바라봤다.
" 왜... 이런 일은 내가..."
" 현재 제일 빠르고..."
" 아!!! 보드!!!!"
" 응?!!"
" 보드요?"
내 보드를 모르는 애들은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고 보드를 아는 애들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 있어 그런..게.. 근데 낮에 가면 백 프로 걸릴텐데."
" 해가 뜨기 전에 새벽에 움직이자."
" 어...그럼 나 혼자 가야하나?"
보드는 두 명이서 타기에는 무리였고 짐을 싣고 올 것까지 생각하면 불가능했다.
" 문제는 얼마나 움직일 수 있냐는 건데..."
분명 연료가 필요한 기계라고 했으니 언젠가는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운용이라 신중하게 결정해야만 했다.
" 어쩔 수 없지...이게 마지막이라고 해도."
" 알았다."
박 중사는 내 말 뜻을 알아듣고 말을 했다. 그 와중에 재효는 보드의 존재를 모르는 일행에게 보드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 그럼 내일 새벽에 출발하고 복귀도 비슷하게 할게."
" 조심해라.."
" 우선 필요한 것들이 뭔지 적어줘. 최대한 구해서 올게."
" 응."
여자들과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앞으로 필요한 물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러다 점점 바라는 게 많아진 녀석들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 야야! 이 와중에 수면 양말이 뭔 말이냐?!"
수면 양말을 적은 기태를 보고 소리쳤다.
" 아니...혹시 있으면.. 잘 때 발 시렵더라."
" 이씨!! 무릎 담요는 누구야!!!"
" 저..저요..."
" 미쳤냐?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 적냐?"
내 말에 재효가 생전 안 쓰던 존댓말까지 썼다. 이번이 기회다 싶어 생각나는 대로 마구 썼다는 게 느껴졌다. 다른 의미로 해석하자면 그냥 보이는 물건 전부 들고 와라 이거였다.
"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 얼씨구?"
기태가 쓴 물품을 보니 더 가관이었다.
" 메모리폼....배게? 진짜 죽고 싶냐?"
" 하하...."
멋쩍게 웃는 기태를 보니 나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나마 여자애들이 정상적으로 썼고 대부분 주방 용품이나 갈아입을 옷 또는 속옷이었다. 공통적으로 쓴 내용은 생리대였다. 생각해보니 직접 해본적은 없지만 없으면 정말 불편할 것 같았다.
" 우선 내가 대충 추려서 챙겨 올거니까 불만들 같지마."
" 그래그래!!"
" 조심히 다녀오고!!!"
밤이 깊어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고 나는 보드를 꺼내오려고 수송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젠장..... 어떻게 나가?"
수송기 외부는 폐자재로 가득한데 여기서 차량이나 보드를 꺼내 나갈 생각은 못하고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 생각났다.